주간동아 712

2009.11.24

현모양처→여왕 … ‘안방의 꽃’ 피다

여배우 인물형으로 본 한국 드라마 여주인공 변천사

  • 이영미 대중예술평론가 ymlee0216@hanmail.net

    입력2009-11-18 10:50: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현모양처→여왕 … ‘안방의 꽃’ 피다
    흔히 ‘드라마’라 부르는 방송극의 꽃이 여주인공 혹은 여배우라고 하지만, 사실 여주인공이 드라마의 꽃으로 부각된 것은 1970년에 이르러서였다. 1950~60년대는 라디오 드라마의 전성시대였다. 그리고 이 시대에는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보다 두드러지는 사례가 많았다.

    예컨대 라디오 드라마 ‘현해탄은 알고 있다’(한운사 作)에서 주인공 아로운 역을 맡은 이창환(배우 신성일의 목소리를 도맡은 성우)은, 행인이나 교통경찰이 목소리만 듣고도 “혹시 아로운 역의 이창환 씨 아니에요?”라고 물어왔을 정도라니 당시 인기를 짐작할 만하다. 아무래도 라디오와 텔레비전이 한 집안의 ‘보물 1호’이던 1960년대 가부장적 질서 아래서는 아버지들의 채널 선택권이 강력했던 것이다.

    1970’s ‘아씨’ ‘여로’ ‘딸’에 드러난 현모양처

    드라마의 패러다임과 채널 선택권이 여성에게로 넘어온 것은 텔레비전의 일일연속극이 성공을 거둔 1970년부터인 것으로 분석된다. TBC의 ‘아씨’ ‘딸’, 그리고 ‘아씨’를 벤치마킹한 72년작 ‘여로’(KBS)가 일일연속극의 성공사례로 자리매김하면서, 텔레비전은 어머니를 비롯한 여자들이 차지하게 됐다. 대신 아버지들은 라디오의 ‘정계야화’ 같은 것을 들었다. 매체가 성별에 따라 양분된 것이다.

    ‘아씨’ ‘딸’ ‘여로’의 여주인공은 각각 김희준 안은숙 태현실이 맡았다. ‘아씨’에는 지금 보면 답답할 정도로 모든 상황을 참고 견디는 현모양처가, ‘여로’에는 악한 시어머니 때문에 소박을 맞았으나 전쟁 통에 사업으로 성공한 생활력 강한 파워우먼이, ‘딸’에는 미니스커트를 입고 대학과 직장을 다닌 현대여성으로 까칠한 시댁 식구들과도 곧잘 화합하는 여성이 그려졌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 캐릭터들의 공통점은 차이점보다 컸다. 현대적이든, 고전적이든 어른들 말씀이라면 말대꾸 한 번 안 하는 조신한 여성들이라는 점이다. 순종적 현모양처를 롤모델로 생각하는 당시의 여성관이 드라마에 그대로 그려졌다.

    1980’s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도발

    이러한 인물형은 1980년대 들어 상당한 균열을 보였다. 70년대 중반을 계기로 텔레비전 드라마의 극작에서 대대적인 세대교체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놀라운 것은 새롭게 등장한 인기 작가 트로이카가 모두 여성이라는 점. ‘외아들’ ‘결혼행진곡’의 남지연, ‘새엄마’ ‘신부일기’의 김수현, ‘달동네’의 나연숙이 그 주인공이다. 1970년대 말, 부동의 위치를 확보한 이들 트로이카는 똘똘 뭉쳐 방송사를 상대로 작가료 인상협상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남자 선배들도 해내지 못한 ‘집필 파업’으로 얻은 성과였다. 셋이 펜을 놓으면 방송사가 벌벌 떨 만큼 이들의 위력은 대단했다. 셋 가운데 가장 획기적인 인물은 김수현이었다. 당시로는 위태위태할 정도로 도발적인 김수현의 여성 인물형은 지나치게 현대적이었고, 시대를 앞서나간 이런 면모 덕에 그는 2000년대에까지 인기 작가로 남을 수 있었다. 작가 김수현이 현모양처를 그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착한 계모를 그려낸 ‘새엄마’(1972년)부터 2000년대의 ‘엄마가 뿔났다’까지 김수현의 홈드라마는 ‘착하다’는 공통점이 있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여주인공도 현모양처가 많았다. 그러나 김수현이 그리는 여성 인물형의 내면은 상당히 복잡한 편이다. 남성이 지배하는 세상의 질서가 결코 여자들에게 유리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매 순간 몸으로 이를 느끼며 살아가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뿐 아니라 김수현 작품 여주인공은, 여자로 살아가는 이런 억울함을 ‘감히’ 입 밖으로 말한다.

    ‘사랑이 뭐길래’(1991~92년)의 김혜자처럼 비록 남편 앞에서 무릎을 꿇는 굴욕을 당할지언정, 이것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일인지 억울한 속내를 누군가에게 털어놓으며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다. 남성 작가들의 인물과는 달리 김수현의 여성 인물은 복잡한 내면과 섬세한 감각을 지닌 ‘인간’으로 그려졌다. 또 또박또박 뱉어내는 놀라운 ‘말발’로 이러한 인간성을 드러내던 그의 여주인공들은 어김없이 여성 시청자의 폭발적 호응을 얻었다.

    하지만 김수현이 추구하는 인물형은 착한 가족물에 어울릴 만한 캐릭터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가 쓴 애정물의 여주인공들은 억울함을 말로만 표현하는 것을 넘어 행동으로 도발을 해버린다. ‘사랑과 진실’(1986년)의 말썽꾸러기 여동생 원미경은 엄마의 유언을 조작해서 언니의 행운을 가로채고, ‘사랑과 야망’(1986~87년)의 차화연은 애인의 홀어머니가 결혼을 결사반대하자 가출해 여배우가 된다.

    ‘모래성’(1988년)의 김청은 성질이 못돼 노처녀가 됐다는 어른들의 핀잔에 우울한 나날을 보내다 친구 오빠인 유부남과 사랑을 하고, 그 아내인 김혜자는 남편의 불륜을 알고 과감하게 집을 나가 홀로서기를 시도한다. 그러나 ‘버림받은 미혼모의 복수’라는 과감한 소재를 다룬 ‘청춘의 덫’은 1970년대 말, 보수적 여론과 심의의 벽을 넘지 못하고 조기 종방을 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당시로서는 너무 큰 파격이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이렇게 과감한 여성상이 등장하는 드라마 콘텐츠의 변화는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다. 980년대의 30, 40대 여성들은 해방 이후에 태어나 교육열기 속에서 성장한 고학력자로, 머리와 가슴만큼은 남자들과 다를 바 없는 욕망과 사고능력을 지닌 이들이었다.

    인간의 평등이나 민주주의를 당연한 것으로 알고 배워온 이 세대의 여자들은 비록 직업전선에서 남자들에게 밀려 있을지언정 인간으로서의 자존심과 욕망까지 포기하고 살 수 있는 존재는 아니었던 것이다. 머리와 가슴은 성장했는데 현실은 이를 받아주지 못하니, 이들은 저항하거나 도발적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 여자들이 몸으로 보여주는 억울함에 여성 시청자들은 환호했다.

    1990’s 여성상의 고정관념을 깨라

    이에 비하면 1990년대 드라마의 여성들은 참으로 행복한 존재였다. 이른바 트렌디 드라마의 새 장을 연 92년 작 ‘질투’의 주인공 최진실은 얼마나 발랄하고 구김살 없는 모습을 보여줬는가. 친구인지 연인인지 알 수 없는 동갑내기 최수종과의 관계는 평등했고, 직장인 여행사에서도 실력을 인정받았다.혼자 사는 작가인 엄마 김창숙과의 관계는 모녀가 아니라 친구 사이처럼 스스럼없다.

    애인 앞에서 내숭 떠는 짓을 하지 않아 최수종이 잠시 얌전하고 분위기 있는 이응경에게 눈을 돌리지만, 결국 친구처럼 편한 최진실에게 돌아온다는 결말도 그렇다. 최수종의 귀환과 해피엔딩은 이들의 가정이 권위적인 남편과 순종적인 부인의 조합이 되지 않을 것임을 시사한다. 이런 현상은 영화에서도 드러났다. 같은 해 개봉한 ‘결혼 이야기’의 심혜진과 최민수도 이런 관계를 보여줬다.

    직장 동료인 그들은 결혼 후에도 친구처럼 지낸다. 남자의 권위를 보이려는 최민수에게 심혜진은 “나보다 학력고사 성적도 낮은 게 까불어!”라고 윽박지른다. 남성들과 똑같은 조건에서 경쟁했고, 경제적으로도 밀릴 것 없다는 자긍심으로 가득 찬 90년대의 여성 인물형은, 사랑과 분노의 표현은 물론 성적 표현까지 스스럼없다. 몇 년이 더 지나자 한술 더 떠, 농구 코트를 선머슴처럼 뛰어다니는 신은경 같은 인물형이 등장했다.

    ‘마지막 승부’ ‘종합병원’의 신은경이 그토록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것은 1970, 80년대에 남녀차별 없이 자란 신세대 여성들이 이제 청소년기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이 그렇게 녹록한 것만은 아니었다. 구세대의 권위를 과감히 무시한 신세대 붐에는 거품이 끼어 있었고, 그 거품이 걷히자 현실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여성들은 실감했다. ‘그대 그리고 나’(1997년)의 최진실은 가난한 어부의 아들 박상원과 결혼하면서 현실의 벽에 부딪힌다.

    자신이 얼마나 행복하게 자랐는지, 세상이 얼마나 험하고 여자에게 불리한지 절절히 느끼는 것이다. 바람둥이 시동생 차인표가 처녀를 임신시켜놓고 차버리려 하자, 이를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최진실은 친정엄마에게 울면서 이야기한다. “너무 억울해. 엄마, 나 직장 그만두고 여성운동 할까 봐.” “나, 이런 고생 모르게 키워줘서 엄마 아빠 정말 고마워.” 이게 이 시대 여성들의 현실이었다.

    현모양처→여왕 … ‘안방의 꽃’ 피다

    드라마 속 여성상은 여권 신장의 사회 분위기와 맞물려 진화했다. 왼쪽부터 ‘여로’(1972년), ‘아씨’(1970년)`, '사랑과 야망'(1986~87년), '질투'(1992년), ‘청춘의 덫’(1999년), ‘여름향기’(2003년), ‘스포트라이트’(2008년).

    1990’s~2000’s 치열한 생존경쟁형

    1997년 말 외환위기가 시작되고 ‘명퇴’ ‘구조조정’ 등이 일상어가 되면서 우리 사회는 남을 짓밟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생존경쟁의 공포심으로 가득 찼다. 따라서 이 시기의 트렌디 드라마에는 두 명의 여주인공이 사랑과 야망을 성취하려고 피 터지게 싸우는 이야기로 채워졌다. 필자는 이런 드라마를 ‘야망의 콩쥐팥쥐형 드라마’라고 명명했는데 1998년의 ‘토마토’를 비롯, ‘이브의 모든 것’(2000년)을 거쳐 ‘라이벌’(2002년)에 이르는 드라마가 모두 이에 속한다.

    ‘토마토’(1999년)의 김지영, ‘비밀’의 하지원(2000년), ‘이브의 모든 것’(2000년)의 김소연 등은, 가장 친한 친구나 언니를 못살게 구는 악녀 중의 악녀였다. 물론 이들의 악행에는 억울함이라는 동기가 있었고 또 남자 못지않은 야망이 있었다. 최고의 디자이너, 최고의 앵커우먼, 최고경영자의 후계자 아내 자리까지 차지해야만 속이 시원했던 이들은 착하디착한 김희선과 김하늘, 채림의 디자인 시안을 지워버리고, 방송원고를 찢어버리고, 애인과 상사 앞에서 거짓울음을 보이면서까지 이들을 짓밟고 올라선다.

    야망을 향해 피도 눈물도 없는 전쟁을 펼치는 새로운 여성 인물형은, 1980년대 김수현의 도발적인 주인공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였다. 김수현의 인물들은 개인적 억울함을 도발적인 행동으로 해소하긴 하지만 그것이 직업적 성취라는 야망 때문은 아니었던 반면, 90년대 드라마 속 그녀들은 확실한 직업적 목표를 가진 커리어우먼이었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주목할 것은 악한 여자만 야망을 지닌 건 아니라는 점이다.

    김희선, 채림, 김하늘 등 착한 인물형도 직업적 성공이라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고 악녀들과 끊임없이 경쟁했다. 이는 ‘대장금’의 장금이가 금영에게 결코 자기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직업적 성공은 여자에게도 포기할 수 없는 존재의 이유가 돼가고 있었고, 이들 인물은 충분히 이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한편 외환위기는 이처럼 직업적 성공과 사랑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커리어우먼과 정반대 캐릭터, 청순가련형의 부활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이미 여성들의 직업적 야망도, 상큼하고 쿨한 사랑도 모두 체험한 마당에 이런 구태의연한 캐릭터의 ‘부활’이 쉽지만은 않았을 터다. 이를 가능하게 하기 위한 장치가 ‘극단적 설정’이었다. 여주인공들은 극단적인 청순가련미를 자랑해야 했고, 이를 가능케 하는 소재로 불치병이 쓰였다.

    백혈병을 앓는 ‘가을동화’(2000년)의 송혜교, 심장병이 있는 ‘여름향기’(2003년)의 손예진이 좋은 예다. 여기에 또 한 가지 설정이 추가됐다.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적 사랑이라는 틀이 그것이다. 어릴 적 헤어진 오빠를 연인으로 다시 만난다거나, 심장 이식을 받은 여자가 그 심장의 주인이 사랑한 남자를 사랑하게 된다는 식이다.

    불치병이든, 생사와 시간을 초월한 운명적 사랑이든 매우 비현실적인 설정이다. 하지만 각박한 외환위기를 겪은 대중은 이미 과거에 사라진 순정적 사랑과 인간의 영혼을 통해 ‘구원’을 희구했고, 이는 순정적 사랑의 여주인공을 창출한 것이다.

    2000’s, 그 후 남자를 능가하는 카리스마

    외환위기는 극복했지만 서민 경제는 나아지지 않았던 2000년대 초반. 여전히 대중의 ‘살림살이’는 팍팍하기만 했다. 여성들도 세상은 냉혹하며, 사랑 따위에 매달려 문제가 해결되는 시대가 끝났음을 간파하게 됐다. 이때 마침 불어온 미국 드라마 바람은 대중으로 하여금 수사물, 전문직 드라마 등 애정물을 탈피한 다양한 소재에 관심을 갖게 했다. 2000년대 중반에 이르러 여주인공들은 다양한 직업군을 드라마 속에서 선보이게 됐다.

    1990년대 말처럼 디자이너나 앵커 같은 ‘여성적’ 직업에 한정되지 않았다. 경찰서를 제 집 드나들듯 하는 사회부 여기자, 밀가루로 범벅이 되는 파티셰, 변호사까지는 어느 정도 상상할 수 있었던 직군이다. 더 과감한 직업도 등장했다. 검사, 경호원, 무사, 재벌그룹 경영자가 여성 캐릭터로 탄생했다. 여기에 급기야 여왕까지 등장했으니 놀라운 발전이 아닐 수 없다. 2000년대 드라마에서 이들 여성은 남자들 세상의 ‘꽃’에 머물지 않는다.

    올해 방영된 ‘꽃보다 남자’와 ‘미워도 다시 한 번 2009’의 여성 최고경영자는 남편을 뒷전으로 밀어놓고 자신이 회사일을 좌지우지하는 실질적 오너였다. 또 드라마 속 여자 경호원은 몸을 아끼지 않았으며, 여자 검사는 약혼자의 숨겨진 범죄를 밝혀냈고, 패션 잡지사의 악바리 편집장은 온몸을 바쳐 잡지사의 경영 정상화에 이바지했다. 2009년엔 사극에서도 여성이 진정한 주인공이 됐다.

    왕비가 아닌 여왕을 꿈꾸는 덕만과, 미천한 출신 때문에 여왕은 넘보지 못했으나 두 남편을 거느리며 한 국가를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미실은 목숨을 걸고 정치적 싸움을 벌인다. 후에 선덕여왕이 될 덕만은 미실에 맞선 대항권력을 형성하고, 삼한일통(三韓一統)의 통 큰 비전을 제시하는 한편, 자신의 몸을 던지는 과감한 계략으로 미실을 꺾고 승기를 잡는다.

    이전의 남자 작가들이 쓰던 남자들의 사극이, 기껏해야 파쟁의 이전투구로 정치 허무주의를 느끼게 하고 여기에 칼싸움의 스펙터클을 더한 정도라면, 여성 작가의 목소리가 반영된 2000년대의 여왕 이야기에는 한층 성숙한 정치관과 정치인의 모습이 담겨진 것이다.

    물론 ‘선덕여왕’은 사극이기에 현대 여성상을 완벽히 담아낼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대박 드라마’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여성상에 공감하는 시청자, 대중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제 여성들이 드라마를 통해 꾸는 꿈은 이처럼 국가 통치와 리더십이라는 진일보한 영역에까지 다다르게 됐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