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03

2009.09.15

애니메이션 사랑 ‘짱구도 못 말려’

재미있으면 뭐든 용서 … 보는 사람, 만드는 사람 탄탄 최강 콘텐츠 자랑

  • 김소원 리쓰메이칸대 첨단종합학술연구과 박사과정 wish411@hotmail.com

    입력2009-09-11 14: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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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니메이션 사랑 ‘짱구도 못 말려’
    2009년 8월31일자 오리콘 DVD 판매 차트. 지브리 스튜디오(이하 지브리)의 애니메이션 ‘이웃집 토토로’(となりのトトロ)가 34위에 올라 있다. 극장 개봉 후 DVD로 출시된 것이 2001년 9월28일이니, 무려 400주나 연속 상위 300위에 들었다.

    이뿐만 아니다. 일본 영화 역대 흥행순위 10위에 지브리의 애니메이션이 4편이나 들었고, 일본 영화만 놓고 보면 1~3위가 모두 지브리 작품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일본 애니메이션의 인기는 일본을 넘어 세계화했다.

    1970~80년대 싸구려 TV 시리즈로 세계 진출을 시작한 이후 차별화한 스타일과 이야기로 독보적 문화 콘텐츠가 된 일본 애니메이션. 세계를 제패한 애니메이션의 힘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애니메이션을 보는 사람도, 만드는 사람도 아주 많으니 일본 애니메이션은 힘이 세다. 현재 도쿄의 5개 민영방송국에서 일주일에 방영하는 TV 시리즈 애니메이션은 총 32편. 자체 제작 프로그램이 적은 지방 방송국들은 일주일에 30편 가까운 재방송 애니메이션을 편성하기도 한다.

    이들 애니메이션의 방영시간은 이른 아침부터 심야 2~3시까지 다양하다. 심지어 후지TV는 일요일 저녁 6시라는 황금시간대에 애니메이션을 방영한다. 많이 만들고 많이 보는 이유는 재미있기 때문이다. 재미의 힘은 스토리텔링에서 나온다. 물론 일본 애니메이션 특유의 스토리텔링은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다.



    TV 시리즈 애니메이션이 처음으로 시작되고 만들어진 출판물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연계 시스템에서 비롯된다. 데즈카 오사무는 전후 일본 만화를 다양한 장르로 발전시킨 일본 만화의 아버지. 자신의 인기 만화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고 싶었던 그는 1963년 전국에 보급되기 시작한 TV에 매주 방영되는 새로운 콘셉트의 애니메이션, 즉 TV용 시리즈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냈다.

    특유의 스토리텔링 일요일 저녁에서 TV 방영

    1964년 도쿄올림픽이 끝나고 초고도 성장기에 돌입한 일본의 어린이들은 만화잡지를 통해 만화를 봤고, 그 가운데 인기를 끈 만화를 TV의 애니메이션으로 봤다. 거대한 만화시장과 함께 연동하며 정착한 일본 애니메이션은 서구의 애니메이션과 달리 다양한 장르를 장기 시리즈로 제작할 수 있었다. 많이 만들어지고, 많이 보는 일본 애니메이션 특유의 시스템이 정착된 것.

    이후 1970년대 ‘기동전사 건담(起動戰士ガンダム)’과 ‘우주전함 야마토(宇宙戰艦ヤマト)’ 등의 작품을 통해 애니메이션의 수용층이 어린이에서 청소년은 물론 성인층으로까지 확대됐다. 1980년대에 들어 가정용 비디오 플레이어(VTR)가 보급된 이후 일본의 애니메이션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OVA(Original Video Animation)라는 콘셉트를 발명한 것이다.

    OVA는 TV 시리즈도, 극장용도 아닌 비디오테이프로 판매하는 것을 목적으로 제작한 애니메이션이다. TV 전원을 켜고 채널을 돌리는 수고만 하면 무료로 즐길 수 있던 TV 애니메이션과 달리, OVA는 비디오테이프를 구입하거나 빌리는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따라서 이들 OVA의 주 고객층은 어린이가 아닌 경제력이 있는 성인 소비자였고, OVA 애니메이션의 스토리와 구성은 TV용 애니메이션과 달리 어른들의 눈높이에도 맞춰야 했다.

    실제로 TV 시리즈로 방영됐던 애니메이션의 번외편 성격을 띤 OVA는 원작 만화에는 없는 새로운 스토리를 갖기도 했다. 이렇게 긴 시간을 거치며 탄탄한 제작 여건을 갖춘 애니메이션은 극장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이후 매년 일본 영화 흥행순위에선 애니메이션이 빠지지 않았다. 이러한 극장판 애니메이션의 성공 뒤에는 1960~70년대 애니메이션의 그림자가 있다.

    애니메이션 사랑 ‘짱구도 못 말려’
    유년기에 TV 애니메이션을 접한 중장년층에게 극장에서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은 그다지 낯선 일이 아니었으며, 어린 시절 자국의 애니메이션을 보고 자란 감독과 제작자들은 자연스럽게 일본적 색채의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처럼 일본 애니메이션의 탁월한 산업성은 탄탄한 제작여건과 확실한 소비계층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하드웨어’ 측면에서 그렇다면, ‘소프트웨어’에서 일본 애니메이션 스토리의 강점은 무엇일까. 일본 애니메이션 스토리가 다양한 이유를 그들의 세계관과 작품에 현실을 투영시키는 영리함에서 찾고 싶다. 일본인들의 세계관 기저에는 독특한 종교관이 있다. 일본은 종교인의 비율이 매우 낮지만 대다수 일본인은 대단히 종교적이다.

    새해 아침이면 신사에 가서 소원을 빌고, 브라이들 채플에서 목사님을 모시고 결혼식을 올리며, 장례식에서는 스님을 모셔 죽은 이의 안식을 빈다. 이런 종교적 감수성은 애니메이션에 놀라운 상상력을 제공한다. 한국에도 열혈 팬을 거느린 인기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新世紀エヴァンゲリオン)’에 등장하는 여러 용어와 모티프는 성경과 유대교에서 가져왔다.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만화 ‘세인트 오니상(聖☆おにいさん)’은 바캉스차 일본에 내려온, 조니 뎁을 닮은 예수가 도쿄에서 부처와 친구로 지내며 살고 있다는 설정이다. 예수가 쓴 가시관이 천국에서 위치 추적을 할 때 쓰는 GPS 장치라 하니 일본 애니메이션 스토리에 불가능이란 없는 듯하다.

    재미 위해 교육과 도덕성에서 약간의 희생 감수

    최근 ‘세카이계(セカイ系)’라고 분류되는 애니메이션 스토리 유형이 있다. 세카이계 애니메이션이란 이렇다. 정체불명의 적들이 지구를 공격하고 세계는 멸망의 위기에 처해 있는데 주인공들은 타고난 특수능력 때문에 적과 싸워야 한다. 하지만 이들에겐 전쟁보다는 친구, 연인, 가족 그리고 지금의 나 자신이 중요하다.

    지구를 지키기 위해 원치도 않는 싸움을 계속 해야 하지만 세계를 지킨다는 사명감과 의지는 별로 없다. 세카이계 애니메이션의 대표작인 ‘별의 목소리(ほしのこえ)’와 ‘최종병기 그녀(最終兵器彼女)’의 주인공 소녀들은 끝 모를 전쟁보다는 지구에 남아 있는 친구와의 문자메시지가 더 중요하고(별의 목소리), 자신의 정체가 남자친구에게 탄로 날지 모른다는 게 가장 큰 걱정거리다(최종병기 그녀).

    이들 애니메이션을 보는 10, 20대 젊은이들은 버블경제 붕괴 이후 긴 불황의 터널 속에서 자랐다. 그들에게 히어로를 꿈꿀 여유는 없었다. 이런 현실은 비단 일본에만 있었던 게 아니다. 경제불황 속에서 많은 사람에게 세카이계 애니메이션은 묘한 공감대를 형성했다. 현실을 투영하는 어른스러운 이야기, 일본 애니메이션이 세계인에게 사랑받는 이유다.

    일본의 애니메이션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 가운데 하나는 상업성이다. 모든 대중문화 콘텐츠가 그렇지만 일본 애니메이션 역시 상업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독자 설문을 바탕으로 철저히 계획되고 관리되는 잡지의 특성상 인기 잡지에 연재된 만화는 애니메이션 원작으로서 흥행성을 보장받는다. 이들 TV용 애니메이션을 극장판으로 만든 작품들도 매년 영화 흥행순위에서 빠지지 않는다.

    1회 30분 분량의 TV 시리즈에서는 다 할 수 없었던 밀도 있는 이야기, 스크린이 아니면 보여줄 수 없는 화면 구성은 극장판만의 매력으로 관객에게 어필한다. 인기 있는 작품은 몇 번이고 재생산하지만 관객을 질리게 하지 않는다.

    재미있는 스토리를 위해서는 교육과 도덕성에서 약간의 희생은 감수한다. 한국에서 유해 만화라는 논란이 있었던 ‘짱구는 못 말려(クレヨンしんちゃん)’는 코미디물인데도 어른 관객들이 눈물을 흘릴 만큼 잘 짜인 스토리를 가진 작품이다. 수십 년 전부터 기초가 탄탄히 다져진 시스템을 이용해 재미있게 만들고, 보는 사람도 많은 일본 애니메이션. “재미있으면 무엇이든 용서받는다.”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이 이상의 진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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