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87

2009.05.26

입덧

  • 편집장 이형삼 hans@donga.com

    입력2009-05-20 13: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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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아이를 가진 후배 기자가 입덧이 심합니다. 지난 주말엔 고열과 장염까지 겹쳐 자리보전을 했습니다. 음식을 통 못 먹고 팔뚝에 꽂은 수액으로만 영양분을 섭취했답니다. 이틀간 휴가를 내고 끙끙 앓다 겨우 회사에 나와서는 죽 몇 숟가락으로 끼니를 때웁니다. 그런 몸으로 허위허위 취재를 다니고 자판을 두드려 동료들을 안쓰럽게 합니다.

    엄마가 입덧을 심하게 할수록 뱃속의 아기가 건강하게 자란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습니다. 영리한 아기는 중요한 신체기관이 만들어질 무렵, 자신에게 해로운 음식물이 들어올 성싶으면 강한 거부반응으로 엄마를 압박해 입덧을 일으킨다는 겁니다. 냉면을 무지 좋아하던 여성이 임신한 뒤 초여름 식당가에서 ‘냉면 개시’라고 써붙인 종잇장만 봐도 웩 하고 올라온다지 않습니까. 그래서 입덧의 정도는 유산율과 반비례한다는 통계도 있다더군요. 후배에게 그 얘기를 전해주니 좀 기운이 나는 듯 배시시 웃습니다.

    부담 갖고 믿는 종교가 없어서인지 다윈의 진화론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편인데, 아홉 달에 걸친 산고(産苦)를 떠올리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됩니다. 인류의 신체 구조와 장기들은 수만 년 세월 동안 생존에 편리하도록 진화에 진화를 거듭했을 터. 그럼에도 사람의 출산 과정은 어째서 이렇듯 캥거루만도 못하게 원시적이고 불편하단 말입니까.

    글자 하나 차이지만 진화(evolution)와 혁명(revolution)의 의미는 천양지차. 그러나 과학이 그 갭을 웬만큼 메워줄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몸무게가 600t에 육박하는 여객기가 100t이 넘는 승객과 짐을 싣고 아무렇지도 않게 9000m 상공으로 덩실 떠올라 한 시간에 900km를 날아가도 놀랄 게 없는 세상입니다. 피닉스호는 태양복사열을 에너지로 쓰면서 시속 1만2000km로 9개월 동안 7억km를 날아간 끝에 화성에 도착, 로봇팔로 화성 표면을 삽질하고 선명한 컬러사진을 찍어 지구로 전송합니다. 이런 수준이라면 사람의 수정란을 전자레인지 같은 기계에다 집어넣고 푹 숙성시켜 여성들을 출산의 고통에서 영원히 해방시켜줄 수 있을 법도 하지 않습니까.

    올해로 대한민국 지방자치의 역사가 60년을 맞습니다. 1949년 건국 헌법에 근거해 지방자치법이 제정됐으니까요. 그러나 지방자치의 산통(産痛)은 크고도 길었습니다. 전쟁 중 어렵게 구성된 지방의회는 5·16 세력에 의해 해산됐고, 유신헌법은 지방의회 구성을 ‘조국이 통일될 때’까지 유예했습니다. 대를 이은 군사정부도 푸대접하기는 마찬가지. 1988년 지방자치법 전면 개정으로 1991년 각급 지방의회가 구성됐지만, 제 구실을 하게 된 것은 민선 지자체장 시대가 열린 1995년부터입니다.



    입덧
    그로부터 다시 15년이 흘렀지만 풀뿌리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리려면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옥동자를 보기는커녕 여태 끈덕진 입덧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래도 미숙아를 낳는 것보다야 백번 낫습니다. 입덧도 까칠하고 확실하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제 몸에 해로울 성싶은 것들은 티끌 한 톨 태내(胎內)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완강하게 거부하는 ‘노회한 아기’로 자랐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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