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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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채무

  • 편집장 이형삼 hans@donga.com

    입력2009-05-15 09: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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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꼭 19년 전 이맘때 ‘수습기자’ 딱지를 떼고 사람이 됐습니다(그때나 지금이나 언론사에선 ‘수습기자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가르칩니다). 졸업을 앞둔 대학생 처지에 정식으로 ‘사람’의 월급을 받아보니 입이 딱 벌어지더군요. 취업 준비를 하느라 섭생이 부실한 친구들에게 삼겹살 정도는 얼마든지 살 수 있었고, 호기롭게 맥주를 ‘짝’으로 시켜놓고 마셔도 겁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즐거운 것은, 읽고 싶은 책은 물론 ‘갖고 싶은 책’도 마음껏 살 수 있다는 사실! 더는 해적판 원서 찍어내는 제본소를 수소문하거나 헌책방 아저씨에게 기약 없이 예약해두고 하릴없이 기다릴 필요가 없게 된 겁니다.

    수집 취미가 가세한 본격적인 책 쇼핑은 문학에서 시작됐습니다. 군더더기 없어 깔끔하지만 화장기 없어 무미한 보도체 문장으로 글쓰기 훈련을 받다 보니, 퇴근 뒤 자취방에 소설책 쌓아놓고 캔맥주 곁들이며 날 새도록 ‘글다운 글’을 읽는 낙이 이만저만 아니었습니다. 길산이 이제나 저제나 묘옥을 다시 만날까 기대하며 애먼 산적떼들 싸움질에 휘말리다 보면 10권짜리 ‘장길산’도 사흘을 못 넘겼습니다. 운우지정(雲雨之情) 현장을 묘사하며 “모기 날갯짓에서 시작해 암소 배 앓는 소리로까지 소란스러워진다”고 풀어내는 ‘황구라’의 현란한 입심!

    결혼하고 아이가 생기면서 주요 쇼핑 장르는 역사로 옮겨갔습니다. 신혼집으로 이사하면서 책들이 얼마나 무지막지한 짐이 되는지 실감한 터라, 이젠 한 권을 사더라도 훗날 아이가 읽을 만한 것으로 골라야지 마음먹었습니다. 글만 깨치면 옛날이야기처럼 살랑살랑 빠져들 수 있는 역사책이 그 목적엔 가장 적합할 듯했습니다. 아빠와 딸이 서재에 마주앉아 석굴암 만파식적의 비밀이며, 칭기즈 칸이 유럽대륙에서 말 달리던 이야기를 도란도란 주고받는 정경을 떠올렸습니다.

    하지만 피아제의 인지발달이론도 모르는 아빠는 성미가 급했습니다. 딸아이는 ‘강아지똥’에서 ‘만화 그리스·로마신화’를 거쳐 ‘노빈손 시리즈’에 도달하는 데만 몇 년이 걸리더군요. 기다리다 지쳐 다시 독자노선을 추구했습니다. 밥벌이하고 아이 키우는 단조로운 일상이 행여 정신세계마저 단선적으로 만들진 않을까 하는 걱정에, 거의 10년 만에 철학책을 집어들었습니다. 메시지의 절반쯤은 놓칠 각오를 하고(“소외는 범주적으로 대상화와 동일하지만 대상화와는 엄격히 구별되는 변별 자질을 지닌다.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은 대상화의 소외로의 변질로 집약되어 설명될 수 있다”라니…) 집중, 몰입, 논리구성 연습에 주력했습니다.

    그러다 얼마 전 문학으로 되돌아왔습니다. 노후 대책의 일환입니다. 요즘 세상에 정년퇴직은 언감생심. 직장을 그만둔 뒤 30년쯤 우울증이나 치매 걱정 없이 살아가려면 수불석권(手不釋卷)으로 소일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소일거리로야 문학작품만한 게 없지요. 그래서 나이 들어 집에 들어앉아 읽으면 좋겠다 싶은 문학서를 하나둘 사들이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자연스럽게 문(文)→사(史)→철(哲)을 거쳐 다시 문으로 돌아온 셈이네요. 말년에 이르도록 이처럼 문→사→철 사이클을 서너 번 반복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文史哲 六百’(문학서 300권, 역사서 200권, 철학서 100권 독파), ‘男兒須讀五車書’의 꿈을 이루면 좋겠습니다. 육백 권과 다섯 수레! 거기에 담긴 지혜를 빌려올 수만 있다면!

    자연채무
    빌린 사람이 빌려준 사람에게 갚지 않아도 된다는 부채, 이른바 ‘자연채무’가 많은 이들을 황당하고 허탈하게 했습니다. 더 열 받기 전에 얼른 책 펴들고 고금 현인(賢人)들의 지혜를 ‘자연채무’로 끌어오는 게 정신건강에 이로울 듯합니다. 주간동아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 속편한 대출방법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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