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82

2009.04.21

‘집사람’의 굴욕

  • 편집장 이형삼 hans@donga.com

    입력2009-04-16 12: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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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동안 재미가 쏠쏠하던 다이어트 전선에 경고등이 켜졌습니다. ‘저의 집’(집사람)이 식단을 엉망으로 짰기 때문입니다. 푸릇푸릇한 봄동 겉절이, 올 봄에 처음 잘라낸 초벌 부추김치, 인삼과 다를 바 없다는 향긋한 약도라지무침, 지난 가을 단풍 들었을 때 한 장, 한 장 따 모은 뒤 겨우내 절였다가 산초 따위로 톡 쏘게 양념 입힌 콩잎, 몸통은 물론 무청까지 아삭아삭 씹히는 싱싱한 총각김치, 고운 살얼음이 목구멍을 확 틔워주는 칼칼한 열무 물김치…. 아지랑이 뒷동산에 소풍 나온 듯 ‘봄맛’에 취해 정신없이 수저를 놀리다 보면 고봉밥이 한순간에 ‘뚝딱’입니다. 도대체 어쩌자고 이런 반찬을 식탁에 올려 자꾸만 식욕을 돋우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봄이라지만, 점심을 먹고 사무실에 돌아오면 한 시간도 못 돼 졸음이 쏟아집니다. 숯덩이 우려낸 듯 쓰디쓴 커피도 별무효과. 이건 집사람이 시간 관리를 엉망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맞벌이하는 집사람이 퇴근해 저녁상을 물리면 9시를 훌쩍 넘깁니다. ‘내조의 여왕’이나 좀 보다가 후딱 샤워하고 코 골면 될 텐데, 설거지하고 쓰레기 분리수거하고 청소기 밀고 아이 공부 봐주고 밤참 챙기고 빨래 개고 제 셔츠 다림질한다고 부산을 떱니다. 그러고는 새벽녘에야 잠자리를 찾아드니 제가 밤새 숙면을 취할 수 있겠습니까.

    술이 꽤 세다는 말을 들어왔는데, 이젠 체력에 한계가 왔는지 영 맥을 못 춥니다. 그런데도 못 이길 말술을 불사(不辭)합니다. 이건 집사람이 제 컨디션 관리를 엉망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집사람은 제가 술 마시고 들어간 날 밤엔 숙취해소 음료와 생약 성분 소화제를, 다음 날 아침엔 육개장이든 콩나물국이든 속풀이 국물을 한 대접 말아줍니다. 이렇게 믿는 구석이 있으니 술 앞에서 긴장하긴커녕 자제력을 잃고 일단 들이붓고 보는 겁니다. 고독한 취객은 절대 스스로 무너지지 않는 법.

    월말이 다가오면 꼭 통장 내역을 조회해봐야 합니다. 우르르 어울려 먹고 마시기 좋아하는 탓에 신용카드 결제액이 종종 예금잔고를 초과하니까요. 덩치가 곰만 한 대장부가 이렇듯 쩨쩨하게 통장이나 뒤적거려야 하는 건 집사람이 재테크를 엉망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집사람’의 굴욕
    “기름 넣을 땐 이 카드, 음식점에선 저 카드를 써” “소득공제 혜택이 크다는데 우리도 연금보험 들자” “MMDA보다 CMA 금리가 1%포인트 높다니 계좌를 바꿀까?” “스타벅스 포인트 다 찼어, 월말까진 할리스에서 마셔”…. 이리 궁상스럽게 수선을 부린다고 큰돈을 모으겠습니까. 다른 집 집사람처럼, 안 갚아도 되는 돈 10억쯤 떡하니 빌려오면 대범하고 정의롭게 큰소리 땅땅 치며 살 수 있을 것을요. 멀쩡한 후배들을 팔자에 없는 마약밀수범으로 위장시켜 공항 입국장 잠입취재(이번 호 커버스토리입니다)나 시키는 무정한 선배로 살지 않아도 될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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