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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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구름도 쉬어 가는 오지 세상 향해 손 내밀다

외부 인재 영입해 다각도 사업과 실험 ‘활력 되찾기’ 박차

  • 정윤수 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입력2008-07-14 16: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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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흰 구름도 쉬어 가는 오지 세상 향해 손 내밀다

    진안은 한국에서 보기 드문 고원 마을이다.

    오늘의 세태에서, 도시를 벗어나 어디론가 출장을 떠나거나 나들이를 갈 때, 봄꽃 구경이며 여름 휴가지의 해변들, 그리고 가을 단풍 구경이나 겨울 스키 시즌의 눈밭이라면 모를까, 그 나머지 공간들로 들어갈 때면 매우 난감하고 어색하게 된 지 오래다.

    무슨 소리냐고? 자, 이런 생각을 해보자. 당신은 지금 속초를 간다. 콘도며 속초해수욕장, 자동차로 10분 안팎에 닿는 신흥사, 그리고 동해안 백사장의 포장마차는 익숙한 공간이다. 그러나 속초공항에서 설악산으로 한참 들어간 곳의 석교리나 경동대학교에서 역시 산으로 깊이 들어간 성대리 같은 곳에서 과연 얼마나 머무를 수 있을까.

    소백산 아래쪽도 그렇다. 순흥에서 선비촌을 들르고 산으로 들어가 부석사에 올라가고 다시 내려와 풍기에서 온천 하는 것이 일정한 흐름이다. 그 사이의 작은 마을들, 태장리 우곡리 좌석리 같은 곳에 갈 일은 전혀 없고 국도가 관통하는 순흥면, 단산면, 부석면의 한복판에 들어가는 일도 어지간해서 삼가는 것이 보통이다.

    그 작은 면소재지로 들어가서 우리가 할 일은, 마땅히 없다. 그럴싸한 관광지 인근의 소읍들이 아닐 경우 대체로 마을에는 활기가 없고, 노인네 몇 분이 느티나무 밑에 앉아 깊고 그늘진 눈으로 낯선 방문자를 우두커니 올려다볼 뿐이다. 밭일로 허리가 휘고 논일로 온몸이 검게 그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강렬한 태양으로 뜨겁게 달궈진 국도를 따라서 먼 길을 하염없이 걷고 있는, 그 뒷모습을 보면 갑자기 인생의 유한성을 실감하며, 그럼에도 가느다란 생의 의지로 걷고 또 걸어야만 한다는 생각에 눈물이라도 날 것 같은 상황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줄포면을 재빨리 스쳐 지나서 변산반도 국립공원으로 들어가고 풍산읍내 우회로를 따라 하회마을로 질주하고, 여름철이면 삼면의 해수욕장을 향해 풍악을 울리며 드라이브하면서 그 사이 작은 읍내와 면소재지와 부락들을 완전히 생략해버리는 것이다. 들어가봐도 ‘볼만한’ 게 없거나, 그렇게 작은 마을에 가서 아주 느리게, 거의 멈춰버린 시간을 만나는 것이 힘에 부치는 것이다.



    구경거리 넘쳐나고 음식도 다채로운 곳

    그래서 그런 곳으로는 시인들만이 소요한다. 경북 울진의 후포면에서 태어난 시인 김명인은 봄과 여름 사이에 그곳으로 갔다가 시 낙화를 얻었다.

    원곡에서 근남으로 넘어가는 비포장도로/ 거기 폐정된 우물 하나 있다/ 서두르면 냉수에도 체하니, 버드나무 한 그루/ 늙도록 잎사귀 흔드는 걸 몰랐었다/ 꽃가루 눈발처럼 흩뿌릴 때/ 앓아온 눈병 일생을 두고/ 더 낫지 말아라/ 누가 불행하다고/ 가고 있는 봄 한철에 기대랴/ 우리가 잃어버리는 것투성이니 많이 잃고도/ 하나도 잃지 않은 저기 폐정된 우물/ 들여다보면 어둑한 물 위로 낙화/ 물풀처럼 떠돈다/ 가버리면 봄이었다는 생각이/ 갈 길 새삼 낯설게 한다.

    ‘가버리면 봄이었다’는 생각, 그것은 분명 자연 시간의 변화에 대한 관찰이면서 더 깊게는 삶에 대한 성찰인데, 조금 다른 각도로 보면 그러한 관찰이나 성찰은 정말로 작은 읍내와 농로가 잇고 있는 부락들 사이를 걷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런 생각은 국립공원이나 해수욕장에서는 가질 수 없는 일이고, 저마다의 마음속에 남아 있을 작은 마을에 대한 기특한 편애에 의해서만 길어올릴 수 있는 물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비록 ‘폐정된 우물’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이번 여름에 전북의 깊숙한 곳, ‘무진장’이라고 합쳐 말해지는, 무주 진안 장수 그쪽으로 가보자. 이곳도 곳곳에 구경거리가 넘쳐나고 음식도 다채로워서 다른 지역의 관광코스와 다를 바 없지만, 그래도 오늘의 생각을 가다듬어 진안의 작은 마을 백운면 원촌마을에 가보자. 다가가면 갈수록 기이하면서도 아늑한 마이산 남쪽으로 자동차로 15분이면 닿는다. 그 마을에 들어가는 순간, 당신은 이 작은 마을의 ‘낯선 풍경’ 때문에 카메라부터 꺼내들게 될 것이다.

    진안은 북한의 개마고원에는 비교할 바 아니지만 그래도 남쪽에서는 찾기 드문 고원 마을이다. 이 때문에 오지의 대명사가 되었다. 흰 구름도 쉬어 간다는 백운면의 이름은 그래서 나왔다. 마을 위쪽으로 높은 산에서 발원한 데미샘의 물이 이어지는 섬진강 물길이 흐르고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의 산길이 만나며 30번 국도가 지나는 까닭으로 예로부터 이 일대에서는 물산이 풍부하고 장터가 크게 열렸으나, 지금은 여름철 휴가 때나 국토종단하는 도보순례 행렬이 지나는 때를 빼놓고는 조용하다. 한때 인구가 10만명이 넘었으나 지금은 진안군 전체가 3만명이 채 되지 않는다.

    농촌 마을답지 않은 예쁜 간판들 인상적

    흰 구름도 쉬어 가는 오지 세상 향해 손 내밀다

    백운마을의 소박한 간판들이 정겹다.

    그럼에도 이 마을은 활력을 되찾아가는 중이다. 2001년부터 진안군청은 ‘마을만들기 팀’을 조직하여 몇 년째 다각도의 실험과 사업을 벌여 조금씩 기틀이 잡혀가는 중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일용잡급직 박사’로 일했던 유정규 박사에 이어 서울대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구자인 박사가 연고도 없는 진안군에 내려와 다양한 ‘활력 사업’을 구상하고 이를 진안군청이 티에프팀까지 만들어 실행하고 있다.

    백운마을의 검박하면서도 예쁜 간판들도 그런 과정의 일환이다. 전주대 도시환경미술학과 이영욱 교수가 디자인그룹 ‘산 디자인’과 ‘티팟’ 등의 협력으로 이룬, 작지만 아름다운 성과다. 이 전문가들과 전주대학교, 그리고 백운면 마을조사단이 협력하였고 무엇보다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동의하였다. 큰 글씨에 번쩍거리는 조명이 간판의 모든 것인 줄 아는 시대에 작은 크기에 소박한 디자인으로 마무리하는 과정이었다.

    이렇게 간판이 바뀌었다 해서 오늘의 농촌 사정이 바뀌고 작은 마을의 공기가 일순간 바뀌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관청이 적극 지원하고 전문가들이 협력하며, 무엇보다 마을 주민들이 지지하고 참여하여 작은 것 하나씩 고쳐나갈 때, 또 무엇보다 주민들의 삶의 내면으로부터 그런 일들이 진행되어 마을과 인근의 부락과 자연들이 어우러질 때, 우리는 그곳의 작은 가게에 앉아서 한나절 편안하게 쉬었다 갈 수 있는 것이다.

    작은 마을들이 살아야 이 산하가 살고 국토가 살고 우리의 허황된 삶도 위로받는다. 국토개발이니 대동맥이니 하면서 오로지 시속 100km 이상의 고속도로와 왕복 4차선의 국도만을 추앙하여왔으니 이제 그런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낮은 일들이 필요하다. 이번 여름, 요란법석을 떠는 해수욕장이 아니라 작은 마을의 낮은 공간과 느린 시간 속으로 슬며시 들어가보자. 아마도 우리 모두는 황동규 시인이 되어 개구리 한 마리에서 경이로움을 느낄 것이다.

    방금 올챙이에서 땅에 기어오른 개구리가/ 초점 맞추듯/ 네 다리 움츠렸다./ (심상치 않은 그의 거동)/ 뛰었다, 새 공간 확 달려들어/ 숨 일순 정지./ 황홀!/ 처음으로 세상에 기어나와 앞을 향해 펄쩍 뛸 때/ 낙하 장소가 웅덩이든 바위든 뱀 입이든/ 내리기 직전 공중의/ 숨 일순 정지,/ 이 긴장,/ 지구 거죽 한 점(點)의 황홀! - 황동규 뛰었다, 황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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