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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경제학도 출신 성악가 김산기

“지친 영혼? 내 노래로 위로받길 소망”

  • 이남희 기자 irun@donga.com

“지친 영혼? 내 노래로 위로받길 소망”

“지친 영혼? 내 노래로 위로받길 소망”
그의 목소리엔 극적인 생동감이 넘친다. 부드럽지만 파워풀한 그의 감성적 보컬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미국과 유럽에서 오페라 주역으로 활약하는 테너 김산기(45) 미 텍사스크리스천대(TCU) 음대 교수의 이야기다.

그는 최근 미국 댈러스 아이즈만센터에서 오페라 ‘로미오와 줄리엣’의 주인공으로 열연하고 있다. 3월에는 독일 베를린, 함부르크에서도 공연을 한다. 해외 무대에서 동양인으로는 드물게 유명 오페라의 주인공을 맡아온 김산기 교수를 전화로 인터뷰했다.

김 교수가 더욱 주목받는 이유는 ‘경제학도 출신 성악가’라는 독특한 이력 때문이다. 고려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그는 1985년 호주의 한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던 중 음악가의 길로 들어섰다. 학교 합창단 활동을 하다가 우연히 음대 교수의 눈에 띈 것이 계기였다. 그는 미련 없이 경제학 공부를 접고 호주국립대 음대에 진학했다. 보장된 앞날을 포기하는 데 대한 두려움은 없었을까?

20대 중반에 찾은 새 길 … ‘동물원’ 멤버 김창기 씨가 남동생

“노래하는 것이 더 행복해 성악가의 길을 선택한 겁니다. 처음엔 부모님도 ‘전문직을 갖고 음악은 취미로 즐기라’고 하셨지만, 성악 콩쿠르에 입상하자 결국 제 결심을 인정해주셨죠.” (웃음)



20대 중반에 그가 성악가로 변신할 수 있었던 것은 가정환경의 영향이 크다.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MBC 피디로 일한 어머니와 군인이었던 아버지는 모두 음악을 즐겨 듣던 로맨티스트였다. 늘 팝송과 클래식 선율이 흐르던 집안 분위기는 그가 예술적 감수성을 키운 원천이 됐다.

김 교수의 남동생은 그룹 ‘동물원’의 멤버이자 정신과 전문의로 유명한 김창기 씨. 여동생 김고은 씨 역시 한 음악 그룹의 멤버였으며 현재 프랑스어 동시통역사로 활약하고 있다. 3남매 모두 음악적 재능을 타고났지만 음악을 ‘본업’으로 삼은 사람은 김 교수가 유일하다.

특히 김창기 씨는 “형이 준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들으며 음악에 빠져들었다”며 김 교수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한 바 있다. 비록 추구하는 음악은 다르지만 형제는 감성적으로 교감하던 동지이자 경쟁자였다.

“동생은 제게 영향을 받았다지만 사실 저도 어린 시절부터 ‘저놈(김창기)보다는 잘해야지’ 하는 경쟁심이 있었어요. 그게 발전하는 힘이 된 것 같기도 하고….”(웃음)

많은 음악가들은 대부분 어린 시절부터 혹독한 훈련을 받으며 성장한다. 반면에 그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성가대 활동을 하며 노래 연습을 한 것이 전부다. “뒤늦게 성악을 시작해 어렵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어릴 때부터 연습을 시작한 성악가들이 테크닉은 더 뛰어날지 모릅니다. 하지만 다양한 삶을 체험한 ‘늦깎이 음악도’들이 인간의 희로애락을 표현하는 데는 더 유리하죠. 노래는 기교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거니까요.”

“지친 영혼? 내 노래로 위로받길 소망”

모차르트 오페라 ‘코시 판 투테’에서 남자 주인공 역을 맡은 김산기 교수(왼쪽 사진 오른쪽)와 오페라‘돈 파스콸레’의 한 장면.

그는 1988년 호주-뉴질랜드 재단 성악 콩쿠르에 입상하면서 성장의 날개를 달았다. 재단 후원으로 미국 커티스 음악원에서 공부하며 석사학위를 받은 것. 이어 미국 템플대 음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91년 미국에서 열린 파바로티 국제콩쿠르에서 파이널에 오르며 유럽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그의 능력을 눈여겨본 유럽의 한 에이전트가 그를 발탁했다. 이후 그는 10년 넘게 체코, 핀란드, 독일, 이탈리아 등 유럽 국가에서 순회공연을 하며 유명 오페라의 주역으로 발돋움했다.

“90년대 초반 체코 프라하에서 모차르트 오페라 8편에 출연했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마술피리’에서 남자 주인공 타미노 역을, ‘돈 조반니’에서 주인공의 친구 돈 오타비오 역을 맡았죠. 그때 배운 모차르트 레퍼토리는 저의 큰 자산이 됐어요.”

한국인 자긍심으로 한국 이름 고집

음악은 그에게 행복을 선사했지만 외로움도 덤으로 주었다. 세계 각국을 떠돌면서 그는 ‘사람과 빨리 헤어지는 법’부터 배워야 했다. 외로움은 그가 싸워 이겨야 할 가장 큰 적이었다.

“한곳에 정착할 수 없었기에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이 어려웠어요. 사람을 어떻게 만나고, 또 어떻게 잘 헤어져야 하는지 고민이었죠. 그런데 일하는 세계에서 영원히 헤어지는 건 없더라고요. 언젠간 다시 만나게 된다는 것을 훗날 깨닫게 됐어요.”

그는 2001년 미국 템플대 성악과 교수로 임용되면서 안정된 삶을 찾았다. 독일인 여성과 결혼한 것도 그즈음이다. “교수가 돼 결혼도 할 수 있었다”며 그는 수줍게 웃었다.

2005년 그는 텍사스크리스천대 음대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이론과 실전을 겸비한 젊은 교수가 대학에 활기를 불어넣어야 한다”며 학교 측이 그를 설득했기 때문. 그에게 부여된 또 다른 임무는 실력 있는 외국인 학생들을 많이 스카우트하는 것이다. 그는 “중국인 학생은 벌써 두 명이나 데려왔는데 아직 한국 학생은 만나지 못했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해외 무대에서 주로 활동해왔지만 그는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을 잊은 적이 없다. 영어 이름 대신 ‘김산기’라는 한국 이름을 고집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2002년에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한인음악인협회장을 맡아 오페라 ‘춘향전’을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지금도 한국에서 저를 불러주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더 유명한 성악가가 돼서 당당하게 한국 무대에 오르는 것이 제 소망 중 하나죠.”

수줍음 많고 내성적이었던 10대 소년은 사람들의 영혼을 울리는 성악가가 됐다. 음악은 그에게 자신감을 심어줬고, 때로는 세상의 진리를 보여줬다. 김산기 교수는 음악으로부터 받은 선물들을 이제 많은 사람들에게 되돌려주려고 한다.

“무대에서 저와 함께 호흡하는 관객들의 숨소리를 느낄 때가 가장 행복해요. 제 노래가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감동을 주었으면 합니다.”



주간동아 2007.03.13 576호 (p44~45)

이남희 기자 ir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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