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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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독도 사진으로 화제 김한용 사진작가

필름에 담고 마음에 새긴 ‘50년 세상사’

  • 이정훈 기자 hoon@donga.com

    입력2005-03-17 18: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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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3년 독도 사진으로 화제 김한용 사진작가
    지난 호(476호, 3월15일자) 주간동아가 보도한 1953년 ‘한국산악회의 독도 쾌거’(산악회원들이 독도에서 다케시마 표시 말뚝을 뽑아내는 장면)는 최초로 공개된 것이다. 이 사진을 찍은 김한용(81) 씨가 “그 필름이나 사진을 한국산악회에 넘겨준 적이 없다. 물론 산악회 회지에도 실리지 않았다. 그 필름은 50여년 동안 보관 해오다 지난해 80세 개인전 때 처음 공개했으나 어느 언론도 보도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 씨는 다케시마 말뚝을 뽑아내는 ‘신나는 사진’을 왜 감춰두었을까.

    “사진을 찍을 때부터 문제작이 될 것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사진을 보면 말뚝이 한 군데도 썩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박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나는 이 사진이 공개되면 일본인들이 ‘봐라, 다케시마는 일본 땅인데 한국인들이 일본 영토 표지를 뽑아냈다’고 나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50여년을 그냥 흘려보냈는데, 그러다 보니 나도 뭔가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런 차에 독도 문제가 불거졌고 때마침 주간동아 측에서 ‘내 사진을 보자’고 찾아왔기에 준 것이다.”

    사진 세계에 대해 문외한인 기자는 사진을 받아든 뒤 동아일보 윤기은 출판사진부장에게 김한용 씨에 대해 물었다. 윤 부장의 첫마디는 “첫 세대 광고사진 작가로 유명한 분인데, 아직도 정정하신가?”였다. 윤 부장의 물음이 무색할 정도로 김 씨는 정정했다. 김 씨는 평남 성천 출생으로 만주 봉천에서 제일공업학교 인쇄과를 다닐 때 사진을 익혔다고 한다. 그는 청년 시절을 이렇게 회상했다.

    1953년 독도 사진으로 화제 김한용 사진작가

    여원 62년 1월호 표지.

    “그때 운동을 좀 했는데, 일본 놈 팔씨름을 해서 졌어. 나는 지금도 ‘바빠 죽겠다’는 말을 절대로 안 해. 바쁘면 미리미리 일을 해야지 바빠 죽겠다고 하면 일이 줄어드는가? 일본 놈한테 졌으면 이를 만회하기 위한 운동을 해야지, 뒤에서 욕해봤자야. 나는 100일 동안 말수를 줄이며 매일 기도한 뒤‘얍’ ‘얍’ 하고 기합을 넣어가며 아령을 들었지. 그리고 다시 붙어 단번에 이겨버렸어.”



    김 씨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기합을 질러가며 과거를 회상했다. 한창때 김 씨는 이렇게 기합을 질러가며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50년대까지는 보도사진을 찍었는데, 이 시기 그가 찍은 유명한 사진이 오로라 같은 후광이 있는 이승만 대통령 사진이다. 김 씨는 “49년 공군의 날(10월1일) 한강 백사장에서 에어쇼를 할 때 나온 이 대통령을 찍은 것인데 이 사진이 코리아 리뷰에 실리면서 유명해졌다”라고 말했다.

    59년 그가 몸담았던 월간 ‘국제보도’가 문을 닫으면서 광고사진 작가로 변모했다. 그는 일찍부터 컬러 슬라이드 사진을 찍었는데, 때마침 한국이 오프셋 컬러 인쇄 시대로 들어가면서 잘나가는 작가가 되었다. 그가 한국 최초로 컬러 사진을 표지로 쓴 여원 62년 1월호의 표지 모델을 촬영한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1953년 독도 사진으로 화제 김한용 사진작가


    1953년 독도 사진으로 화제 김한용 사진작가

    윤정희, 문희, 남정임, 공은아 씨(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톱스타 전문 광고사진 작가 ‘명성’

    당연히 그는 일반인들은 꿈꿀 수밖에 없는 많은 스타들을 일상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김지미 엄앵란 문희 최은희에서부터 김자옥 고두심 유지인 이혜숙 등 내로라하는 미녀들을 찍게 된 것이다. 그에게 누가 제일 예쁘냐고 물어보았다.

    “에이, 예쁜 사람은 하나도 없어…. 내 눈에는 결점만 보이고 모두 슬퍼 보여. 나는 그들에게서 눈이 짝짝이거나 얼굴에 주름이 있는 등, 내가 사진에서 감춰야 할 결점부터 발견하게 돼. 그 결점을 줄이기 위해 그들에게 스튜디오에 오기 전에는 반드시 잠을 푹 자고 목욕을 한 뒤 오라고 했지. 그래야 사진이 잘 나오거든. 사진이든 일이든 기를 모아야 잘되는 것이야. 그렇게 했는데도 그 시절의 여배우들에게는 슬픔이 묻어 있어. 당시 우리 사회는 전쟁을 치른 다음이라 먹고살기 힘들었는데, 그런 분위기가 여배우들에게 투영된 것 같아. 요즘 여성들은 그렇지 않은데 옛날 여배우 얼굴에는 슬픔이 있어.”

    요즘도 김 씨는 자신이 운영해온 스튜디오에서 생활한다. 그러나 ‘김한용 사진연구소’라는 간판을 붙여놓은 이 스튜디오에서는 더 이상 사진을 찍지 않는다. 큼직한 조명장비가 설치돼 있는 어두운 공간에서 그는 평생 동안 찍어온 사진을 차근차근 정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틈틈이 자신이 찍은 사진으로 벽과 천장을 장식한 방에 들어가 휴식을 한다. 꽃과 누드와 무희(舞姬)와 나무와 하루방 등 그가 찍어온 수많은 사진으로 둘러싸인 방은 카펫으로 치장한 아라비아 궁전 같다.

    1953년 독도 사진으로 화제 김한용 사진작가

    애국가 작곡가 안익태의 지휘.

    “얼마나 좋나. 나는 이곳에서 혼자 살아. 나의 모든 것이 모여 있고 자유롭기 때문이지. 여기서 조금만 나가면 명동이고 남산이지 않나. 이따금 그곳에 나가 내가 찍고 싶은 사진을 찍을 수도 있고.”

    그의 스튜디오 안은 컴컴했다. 이따금 찾아오는 손님들이 여닫는 문틈으로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잠시 열린 문이 카메라 파인더(finder) 같다. 김 씨는 평생 파인더를 통해 세상을 봐온 사람이다. 그 문을 통해 밖으로 나오자 조리개처럼 문이 닫혔다.

    밖에서 본 그의 스튜디오는 오랜 풍상을 겪어온 카메라 보디(body)였다. 그리고 독도 사진을 공개함으로써 그는 광고사진의 김한용보다 독도 사진의 김한용으로 세인에 기억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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