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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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의회민주주의 ‘없던 일로’?

갸넨드라 국왕, 내각 해산하고 군주제 선포 … 정치권·반군 ‘反국왕’ 목소리 커져

  • 델리=이지은 통신원 jieunlee333@hotmail.com

    입력2005-03-17 17: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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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팔의 의회민주주의가 재출범한 지 겨우 14년 만에 최대 위기를 맞았다. 2월1일, 네팔 갸넨드라 국왕은 31분간의 대국민 성명을 통해 데우바를 총리로 하는 네팔 국민회의 내각을 해산하고 모든 권력을 접수한다고 선포했다.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고 모든 정당 활동을 중지시키는 무기한 비상사태가 시작된 것이다.

    “내전 해결 정치권에 못 맡기겠다”

    국왕은 바로 다음날 군주제를 선포하고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줄 인물로 내각 평의회를 구성했다. 또한 국왕 직속의 부패통제위원회를 신설하여 정치인들의 비리를 조사해 엄단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이는 정치권에 대한 협박으로 비칠 수 있는 조치다. 국제사면위원회도 이 같은 조치가 불러올 수 있는 인권 문제에 우려를 포명했다.

    국왕의 성명 직후 네팔 정부의 공시 아래 네팔 국내는 물론, 국내외를 잇는 모든 전화선과 인터넷이 차단되었다. 이러한 통신 두절 사태는 일주일 넘게 계속됐다. 모든 언론 매체에 대한 사전검열은 기본이요, 공보부가 배포한 보도자료 이외 공산 반군과의 대치 상황에 대한 보도도 금지되었다. 심지어 일부 매체가 고속도로를 2주일간 폐쇄할 것이라는 반군의 발표를 보도했다가 경고를 받았을 정도다. 또한 국왕의 ‘쿠데타’ 행위를 비판하는 보도문을 써서 해외로 유출시킨 혐의를 받은 두 언론인이 국제연합사무소에서 망명신청을 하려던 중 체포되었다.

    이러한 조치의 배경에는 지난 수년간 네팔 정부를 괴롭혀온 공산 반군의 활동이 큰 몫을 차지한다(관련 기사 주간동아 2001년 12월27일자). 국왕 또한 성명을 통해 친정 기간 동안 반군 세력을 억누르고 국내의 갈등을 불식한 다음 3년 안에 선거로 선출된 대표들에게 정권을 이양하겠다고 밝혔다.



    남아시아 각국에서는 공산주의가 불법이 아니기 때문에 일찍이 공산당이 창당되어 선거를 통해 의회민주주의에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다. 국가 창건 이래 사회주의 노선을 견지해온 인도의 경우 공산주의가 계파별로 별도의 정당을 이루고 있고, 일부 주에서는 다수당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다.

    그러나 마오쩌둥 노선을 지향하는 일부 공산주의자들은 의회민주주의 참여를 거부한 채 군사 조직을 만들어 게릴라전을 펼치며 정부에 대항하고 있다. 네팔에서의 경우 마오주의 반군들은 ‘왕정 폐지’와 ‘공화제 실시’를 내걸고 정부군과 맞서고 있다.

    이러한 네팔 마오주의 반군들은 이미 10년째 계속 활동해오고 있다. 이들은 2001년 네팔 왕실 총격사건으로 현 국왕 갸넨드라가 즉위하면서 더욱 가열되는 양상이다. 반군들의 테러와 정부군과의 교전으로 현재까지의 사망자는 1만1000명이 넘는 것으로 집계된다. 60여개의 군(郡)이 이미 반군 수중에 넘어갔다. 국토의 3분의 2를 마오주의자들이 지배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들이 네팔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이들이 지역을 장악했다는 말은 정부가 그 지역을 포기하고 철수해 반군이 행정조직을 접수했다는 의미일 뿐 주민들의 지지 여부와 무관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마오주의자들은 죄 없는 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미성년자들을 유혹하여 군사 조직에 편입시켜 인권운동가들에게서 거센 비난을 받고 있다. 특히 반대파 처형이나 고문은 정부군과 마오주의 반군들이 똑같이 비난받는 부분이다.

    결국 이번의 비상사태 선포는 기존 정치권이 풀지 못한 이와 같은 실질적인 내전 상태를 갸넨드라 국왕이 직접 통치를 통해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2002년 10월 데우바 총리의 권고로 의회가 해산된 이래 지금까지 네팔은 총선을 치르지 못한 채 2년 4개월간 3명의 총리가 재임했다. 갸넨드라 국왕은 2002년 의회를 해산 한 뒤 왕정을 옹호하는 인물을 총리에 임명하여 내전 상황을 극복하고자 했으나, 두 명의 총리가 모두 실패했다. 결국 지난해 6월 네팔 국민회의의 데우바를 총리로 다시 임명하면서 마지막 시도를 했던 셈이다. 그러나 데우바 내각도 마오주의 반군과의 갈등 해결에 아무런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친정은 국왕이 내놓은 마지막 카드인 셈이다.

    미국과 주변국들 네팔 정부 압박

    그러나 문제는 민주적 입헌군주제를 지지하던 정치인들마저 국왕의 적으로 돌아서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 비상사태로 데우바 전 총리 등 내각 요인들이 모두 가택 연금 상태에 놓였다. 네팔의 모든 정당들은 한목소리로 국왕의 정부 해산에 반대하며 다당제 민주주의로 복귀하라고 주장하고 있다. 네팔의 국내 사정이 여의치 않자, 네팔 국민회의의 총재이며 전 총리인 코이랄라의 딸 수자타가 인도 뉴델리에서 국왕 반대 집회를 지휘했다. 뒤를 이어 조카 쉐카르도 네팔을 몰래 빠져나와 인도에서 네팔의 소식을 전하며 네팔의 민주주의 재개를 위한 국제사회의 관심과 대응을 호소했다.

    영국 정부는 사태 발생 이후 네팔 주재 대사를 본국으로 소환했다. 미국은 즉시 다당제 민주체제로 복귀하지 않으면 군사 원조를 줄이겠다는 압력을 가했다. 인도 정부는 네팔 사태에 대한 항의로 올해 예정된 사크(SAARC·남아시아 지역협력기구) 정상회담의 불참을 선언했다. 인도 육군참모총장도 ‘비민주적 국가의 초대에 응할 수 없다’며 네팔 육군의 초청을 거절했다.

    네팔 정부는 이러한 영국 미국 인도 중심의 국제적 보이콧을 총력을 다해 막으며, 국내 사태에 대해 ‘이중적 잣대’를 적용하지 말라고 주장하고 있다. 네팔의 의회 해산과 비상사태 선포는 미국이 9·11 사태 이후 강행하고 있는 ‘테러와의 전쟁’과 같은 맥락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각료 위원회는 마오주의 반군들의 테러 행위를 부각시키며 이들이 네팔의 국가 존립을 위협하고 있음을 국제사회에 주지시키려 하고 있다. 그러나 네팔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는 강대국들은 이 논리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있다.

    갸넨드라 국왕에게는 마지막 카드가 될 이번 조치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미지수다. 그가 마오주의 반군들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는 데 성공한다면 조금이라도 지지세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 ‘정부와 총리를 국왕의 꼭두각시’라고 매도하며 협상 테이블에 나오기를 거부했던 마오주의 반군들은 내각 해산 이후 국왕의 반민주적 쿠데타를 비난하며 국왕과의 협상마저 거부하고 있다. 결국 이번 사태 이후 네팔의 모든 정당들과 마오주의 반군들이 한목소리로 ‘반(反)국왕’을 외치고 있는 셈이다. 정치권이 마오주의자들과 어떤 방식으로든 실질적인 협력관계를 구축할 경우 갸넨드라 국왕은 왕위를 잃을 수도 있다. 결국 네팔 사태의 추이는 국왕과 마오주의 진영이 함께 협상 테이블에 앉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관건이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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