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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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과 거리를 가족 삼는 즐거움

  • 입력2005-03-17 1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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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과 거리를 가족 삼는 즐거움
    부모님과 함께 살던 20대에는 통금 시간이 밤 10시 반이었다. 어쩌다 11시를 살짝 넘길 때면 두 테이블 건너의 귀먹은 노인들까지 생생하게 들을 수 있도록 전화기 너머로 소리치던 엄마의 호통은 다음과 같았다.

    “결혼해서 밤 늦게 싸돌아다니는 건 상관 않겠는데 내 집에서 이러는 꼴은 죽어도 못 본다!”

    강요당한 규범이라고 인정하기엔 너무 나이 들어버린 자존심에 나는, 이른 귀가를 자유의지의 일환으로 변명하기 바빴다. “정숙한 딸의 모습을 연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웬만한 약속은 대개 저녁 먹고 차 한잔 마시면 마무리되게 마련이니 밤 시간은 호젓하게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읽으며 보내는 편이 더 생산적이거든”이라고. 다른 못된 짓은 겁 없이 감행하고 다녔어도 대문 넘어서까지 술 마신 흔적을 남기거나 외박하기는 그저 남의 일이기만 했다.

    가족과 떨어져 원룸에 세들어 살던 독립 초기만 해도 나는 스스로의 양명(陽明)함을 관성대로 가꿔나갔다. ‘막돼먹은’ 다른 세입자들에게 진저리를 치던 주인 부부는 늦은 오후가 되면 집 안을 조용히 정리하던 나를 기특해했다. 수도와 가스 상태를 둘러본다는 핑계로 수시로 드나들며 사는 모습을 꼼꼼히 살피더니 어느 날엔 번듯한 공기업에 다닌다는 참한 청년과의 중매를 서기에 이르렀다. 혼자 살면서도 반듯하게 처신하는 ‘경우 바른’ 처녀에 대한 아름다운 소문은 이렇게 동네 너머 공공기관의 안마당에까지 퍼져갔을 정도였다.

    그러나 강제적 구속 없이 방치된 규범은 금세 헐거워졌다. 내가 이사 왔던 시기와 거의 동시에 관계하던 출판사와 지인들이 홍익대 인근의 같은 ‘나와바리(구역)’로 몰려오게 되면서 약속이 늘고 모임 자리는 으레 길어졌다. 그리고 무심히 지나치던 요란한 네온사인의 밤 풍경은 점차 묘한 생기로 비쳐지기 시작했다.



    일종의 환락 공동체라고 할 수 있는 홍대 입구에는 한국 여성과 외국 남성들의 ‘원 나이트 스탠드’로 매스컴을 달구는 클럽 문화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클럽보다 오히려 유사 가족과 같은 친밀함으로 술병을 기울이는 작은 술집들이 이 지역의 실제 얼굴이다. 손님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며 안부 챙기기를 잊지 않는 주인은 한잔하며 사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친구가 되고 가족이 된다. 압구정동이나 광화문, 평창동의 술 문화와는 또 다른, 끈끈한 생기가 있는 곳이다. 결국은 지갑을 열고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엄연한 사실까지 깜빡 잊으며 오랜 술친구를 찾는 그리움으로 술집을 드나들게 되었다.

    그러니 음주는 과하기 일쑤고, 술집을 나와 집을 향해 걸을라치면 그때부터 시작을 외치는 ‘부킹’이 사방에서 들어온다. 동이 틀 때까지 ‘비명과 웃음, 욕망으로 들끓는’ 이 소란스러운 거리는 지리멸렬한 일상을 탈주하는 해방 공간으로 보이기도 한다. 가족제도에서 미끄러져 나와 집 안보다 바깥공기로 호흡하는 싱글에겐 삶이 축제라는 착각마저 선사한다.

    이제 자정이 넘은 시간에 태연하게 밤 나들이를 가는 나에게 주인 아주머니는 더 이상 살갑던 관심과 참견을 두지 않는다. 하긴 어머니도, 어머니 노릇을 하려 했던 주인집 아주머니도 더는 내 삶에 어른의 권위로 관여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착한 딸에서 밤 도깨비로 추락했더라도 술집과 거리를 가족 삼는 즐거움을 포기할 마음은 들지 않는다. 혹 유흥가를 부유했던 한심한 젊음으로 기억되면 뭐 어때. 내 의지로 선택한 삶의 양식인 것을 어찌 후회하랴. 주어진 자유 안에서 내 안에 품고 있는 낮과 밤을 충실하게 관찰하며 살아가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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