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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영훈의 ‘길을 따라서’| 18번 국도

멋과 풍류 흐르는 ‘남도의 동맥’

  • < 양영훈/ 여행작가 > www.travelmaker.co,kr

멋과 풍류 흐르는 ‘남도의 동맥’

멋과 풍류 흐르는 ‘남도의 동맥’
18번 국도는 전라남도의 동서를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길이다. 총길이는 187km로 전라남도의 국도 구간 중 가장 길다. 또한 길이 지나는 곳곳에는 풍광 좋고 인심 넉넉한 남도를 대표하는 명소가 적지 않다. 남도의 두 거찰(巨刹) 화엄사와 송광사, 명산 지리산과 청류(淸流) 섬진강, 물빛 말간 주암호와 득량만 바다, 다향(茶香) 그윽한 보성다원, 정다산과 김영랑의 고장 강진, 겨울 철새들의 새로운 낙원 고천암호와 영암호, ‘민속의 보고(寶庫)’ 진도 등이 모두 18번 국도가 거쳐가는 곳에 있다. 하지만 이 길은 이름난 관광명소나 문화유적을 일부러 탐하지 않아도 기대 이상의 여정(旅情)을 채울 수 있을 정도로 산과 바다, 강과 호수 등의 자연풍광이 다채롭다.

18번 국도를 따라가는 여정의 시점은 화엄사. 이곳 일주문을 나서자마자 만나는 왕복 2차선 아스팔트 도로가 18번 국도의 동쪽 시점이다. 지리산 제일의 대가람 화엄사는 중언부언이 새삼스러울 만큼 소문난 명찰이다. 화엄사 골짜기를 빠져나와 구례 읍내를 지나면 지리산은 점점 멀어지고 섬진강은 쏜살같이 달려온다. 이내 섬진강 구례교를 건너서니 ‘구례의 입구’ 구례구다. 18번 국도와 17번 국도가 하나 되고 전라선 열차가 잠시 쉬어가는 마을이다. 흔히들 구례 땅으로 생각하지만 실은 순천시 황전면 선변리에 속한다.

구례구에서 곡성군 압록까지 20여리 구간은 17·18번 국도의 찻길과 전라선 철길과 섬진강 물길이 나란히 달린다. 압록은 석압강(또는 보성강)과 섬진강 본류의 합수머리에 위치한 남도 제일의 강변 유원지다. 여기서 17번 국도와 헤어진 18번 국도는 다시 석압강과 어깨를 맞댄 채 30여리를 달리는데, 19번 국도의 섬진강 구간 못지않게 강변길의 운치가 빼어나다.

멋과 풍류 흐르는 ‘남도의 동맥’
평범한 시골 풍경이 이어지는 곡성군 목사동면과 순천시 주암면을 지나 주암호 호반길에 들어선다. 이 구간에서는 좀체 길이 붇지 않는다. 승보사찰 송광사(순천시 송광면 신평리), 고인돌공원(송광면 우산리 내우마을), 독립운동가 서재필 선생 기념관(보성군 문덕면 용암리) 등 발목과 마음을 붙잡는 데가 여럿이기 때문이다.

멋과 풍류 흐르는 ‘남도의 동맥’
18번 국도의 주암호 호반길은 80리 가량 이어지다가 복내면 면소재지를 지나자마자 슬그머니 사라진다. 이즈음부터 미력면을 거쳐 보성 읍내까지의 길가 양쪽에는 화살촉 모양의 메타세쿼이아나무가 가지런히 늘어서 있다. 잎은 모두 떨구고 가지만 앙상한데도 메타세쿼이아 특유의 준수한 수형(樹形)이 그대로 드러난다.



보성군 미력면 도개리의 18번 국도변에는 지금도 천연재료만을 사용해 살아 숨쉬는 옹기를 만든다는 미력옹기(061-852-4232)가 있다. 국내 유일의 인간문화재(제96호) 옹기장이이던 이옥동·이래원 형제(모두 작고함)의 고집스런 장인정신과 예술혼이 배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이옥동 선생의 아들 이학수씨(50)가 9대째 가업을 잇고 있다.

보성은 차(茶)의 고장이다. 이 지방의 대규모 차밭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처음 조성한 이후 재배면적이 꾸준히 늘었다. 오늘날에는 우리나라 차 생산량의 28%를 차지하는 고장답게 매년 5월에 ‘다향제’(茶香祭)라는 향토축제도 열린다. 보성군에서도 가장 차밭이 많은 곳은 18번 국도가 지나는 보성읍 봉산리와 회천면 영천리 사이의 활성산 봇재 일대. 사계절 내내 산비탈 전체가 싱그러운 초록빛이다. 대양(大洋)에 일렁이는 물결처럼 끝간 데 없이 펼쳐진 초록의 다원(茶園)은 다른 데서는 만날 수 없는 풍경이다. 이 일대의 여러 다원 가운데서도 대한다업의 보성농원(061-852-2593)은 아름드리 삼나무 숲길과 푸른 차밭이 그림처럼 어우러져 있어 영화, 드라마, CF의 배경장소로도 곧잘 활용된다.

멋과 풍류 흐르는 ‘남도의 동맥’
봇재 고갯마루에서는 호수처럼 잔잔한 득량만의 율포 앞바다가 빤히 내려다보인다. 그러나 18번 국도는 율포해수욕장을 살짝 비껴 곧장 장흥 땅의 수문해수욕장으로 넘어간다. 봇재를 넘어설 즈음부터 난분분하던 눈발이 그치자 빠끔히 열린 먹장구름 사이로 몇 가닥 눈부신 햇살이 섬과 바다 위로 쏟아져내린다. 그러나 날씨가 여전히 을씨년스럽다 보니 수문리의 별미인 바지락회 한 접시조차 맛볼 염(念)이 나지 않는다.

언제부터인가 ‘남도답사 일번지’가 된 강진 땅을 찾기에는 역시 춘삼월이 제격이다. 그때쯤이면 핏빛보다 더 붉은 백련사 동백꽃을 찬미할 수 있고, 다산초당의 천일각에 서서 봄기운 피어오르는 강진만 구강포를 바라보기도 좋다. 그러니 설경(雪景) 없는 겨울날이라면 해남 간척지의 노을진 하늘을 무대 삼아 펼쳐지는 가창오리 떼의 군무를 기대하는 편이 더 낫다.

멋과 풍류 흐르는 ‘남도의 동맥’
고천암호, 영암호, 금호호 등 해남군의 간척지가 겨울 철새들의 새로운 낙원으로 탈바꿈한 것은 지난 90년대 후반부터였다. 바다와 개펄이 드넓은 농토로 바뀌고 대규모 담수호가 조성되자 수만 마리의 겨울 철새가 날아들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국제보호조류인 가창오리는 지구상에 남아 있는 개체의 대부분이 여기서 겨울을 난다. 10만~20만을 헤아리는 가창오리 떼가 펼쳐 보이는 비행쇼와 군무는 경이와 감동 그 자체다. 세 담수호 중 가장 많은 철새를 볼 수 있는 곳은 고천암호 일대다. 가창오리의 군무도 이곳에서 감상할 수 있고, 호숫가의 광활한 갈대밭도 구경할 수 있다.

고천암호에서 가창오리 떼의 군무를 구경하고 나면 진도 가는 길은 천생 밤길이다. 하지만 고천암호에서 진도대교까지는 느긋하게 차를 몰아도 20~30분밖에 걸리지 않으므로 굳이 낯설고 위험한 밤길을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더욱이 울돌목(鳴梁)을 가로지른 진도대교의 밤 풍경은 그냥 지나칠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

진도 땅은 ‘살아 있는 민속박물관’이요 ‘민속의 보물창고’다. 육안으로 보이는 아름다움보다는 가슴으로 느껴지는 아름다움이 더 많은 곳이다. 한두 차례의 주마간산식 여정으로는 깊고도 넓은 이 땅의 진면목을 알아내기 어렵다.

초행길이라면 18번 국도의 종점인 진도군 임회면 서망리와 팽목 바닷가에서 화려하다 못해 비장함마저 느껴지는 다도해의 낙조만으로도 커다란 수확이다.







주간동아 319호 (p88~89)

< 양영훈/ 여행작가 > www.travelmak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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