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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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오지 황둔마을은 ‘인터넷 별천지’

정보화 시범마을 선정 이후 컴퓨터 사용 일상화 … 농사 정보 활용 척척, 진료·회의도 화상으로

  • < 허만섭기자 > mshue@donga.com

    입력2005-01-18 16: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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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골오지 황둔마을은 ‘인터넷 별천지’
    강원도 원주시 황둔마을. 오후 4시쯤이면 시외버스가 끊어지는 곳이다. 특별한 산업기반이나 관광자원도 없으며 인구는 4개 리에 걸쳐 1000여 명 정도. 겨울철만 되면 마을 전체가 1m 이상 눈에 덮여 고립무원이 된다. 그런데 전국 최초의 ‘정보화 시범마을’로 지정되면서 이 태백산맥 골짜기의 오지마을이 유명세를 타고 있다. 특히 한 통신회사의 TV방송 CF 무대가 된 뒤로 매스컴의 집중적인 취재 대상이 되었다.

    산골마을에 인터넷이 들어오면 어떤 일이 생길까. 황둔마을은 농촌 정보화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여러 양상을 미리 보여준다.

    지난 8월9일 황둔리 어귀엔 ‘정보화 시범마을’이라는 커다란 입간판이 서 있었다. 미국, 이탈리아의 교민들이 한국 TV 광고에 등장한 이 마을 풍경을 보고 “한 번 방문하고 싶다”는 뜻을 마을 출장소에 전해왔다고 한다. 황둔리 정보화추진위원회 남한순 위원장은 “인터넷이 이 마을 역사상 가장 큰 선물을 주었다”고 말했다. 마을 이름을 세상에 알린 것 자체가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이었다.

    정보통신부·강원도·한국통신·삼보컴퓨터는 지난해 말부터 도-농간 정보격차를 해소해 나가겠다는 차원에서 ‘정보화 시범마을’ 사업을 벌이고 있다. 시범마을로 선정된 지역엔 인터넷 환경과 각종 초고속 정보통신 서비스를 거의 공짜로 제공한다. 황둔마을이 그 첫 대상. 166가구 500여 명의 주민들에게 데스크톱 PC, 초고속정보통신망, PC카메라, 인터넷 TV 셋톱박스를 제공했고 마을 한 복판엔 PC 8대, 스캐너, 인터넷TV를 갖춘 정보센터를 세워 주민들에게 무료로 개방했다.

    8월9일 오후2시 황둔 보건진료소로 주민들이 진료를 받기 위해 모여들었다. 보건진료소엔 간호사 백승리씨 1명만 소장으로 파견 나와 있다. 대신 이곳 주민들은 매주 수요일 오후 2시부터 1~2시간 원주 도심 보건소의 의사에게 화상진료를 받는다. 이날 70대의 한 주민이 자신의 손발을 인터넷 TV 화면 속의 의사에게 보이면서 증세와 병력을 설명했다. TV 옆에는 환자의 몸에서 나는 소리를 실시간으로 의사에게 전송해 주는 청진기가 달려 있었다. 진단 결과 환자의 병명은 류머티즘 관절염. 의사는 환자 옆에 앉아 있던 백소장에게 소염제 등 몇 가지 약을 처방하라고 말했다. 화상진료는 환자 1명당 15분 정도로 진행되었다.



    현재 전국적으로 의사와 보건시설 부족 등 농촌 의료체계의 부실로 불편을 겪는 농어촌 마을은 한 둘이 아닌 상황. 백소장은 “황둔마을에서 시험적으로 실시한 결과 화상진료가 대안이 됨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황둔마을을 구성하는 4개 리의 이장들은 한 달에 한 번씩 이장회의를 열어왔다. 정보화 마을로 지정된 뒤부터 이 회의방식도 화상회의로 바뀌었다. 지난 7월25일 4명의 이장들은 자택에서 컴퓨터에 설치된 화상회의방에 들어가 서로의 얼굴을 보며 벼 병충해 방지책, 보조농약 사용여부 등 마을 현안에 대해 20여분 간 논의했다. 이제는 실제로 만나는 것보다 화상회의가 더 자연스럽고 편하다고 한다. 인터넷 화상전화에 익숙한 주민들도 많다.

    산골오지 황둔마을은 ‘인터넷 별천지’
    인터넷은 특히 황둔마을의 농부들에게 전혀 뜻하지 않은 선물을 주었다. 주요 판매처인 서울 가락동 농수산물시장의 가격동향을 실시간으로 알 수 있게 된 것. 남한순 위원장은 지난해 말 추수한 쌀을 15kg 한 가마 당 18만5000원에 팔았다. 중간상인이 17만 원을 제시했으나 남위원장이 가락시장 시세를 거론하며 이의를 제기하자 1만5000원을 더 올려 줬다고 한다. 남위원장은 “인터넷이 농부와 상인간 정보격차를 없애주었다”고 설명했다.

    TV CF에 모델로 등장해 밭에서 인터넷에 접속하는 장면을 연출한 농부 심재근씨는 “나는 실제로도 매일 인터넷을 이용한다”고 말했다. 심씨는 대형 비닐하우스에서 오이와 토마토를 재배하는데 인터넷으로 얻는 기상정보가 농사에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습도가 많은 환경에서 오이는 노균병에 걸리기 쉬워 비닐하우스 천정을 제 때 열어줘야 한다. TV나 신문에 비해 인터넷은 습도에 대한 훨씬 더 빠르고 상세한 정보를 제공해주기 때문에 매일 아침 인터넷으로 기상정보를 체크하고 있다”(심씨). 황둔마을은 물과 토양이 깨끗해 작물의 질이 좋은 것으로 알려졌다. 심씨는 황둔마을의 인지도가 높아진 것이 황둔에서 생산하는 농산물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쪽으로 연결되기를 기대했다.

    35세의 주부 김 모씨는 정보화센터의 단골 이용자다. 그녀는 6세 된 딸에게 영어동화를 접할 기회를 주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8월9일에도 김씨는 딸에게 헤드폰을 씌워주면서 1시간 동안 영어 동요가 곁들인 영어동화를 들려주었다. “대도시에 크게 뒤쳐진 영·유아교육의 기회를 인터넷이 보충해주고 있다”는 것이 김씨의 말이다.

    강원도 영월군 두산리에 사는 문정옥 할머니(75)도 매주 월요일마다 황둔마을 정보화센터를 찾는다. 해외에 사는 자녀들과 e-메일을 주고 받기 위해서다. 자녀들은 국제전화로는 일일이 전하기 힘든 일주일간의 여러 잡다한 주변 이야기들을 e-메일로 보낸다. 이 일대에서 인터넷 환경이 갖춰진 곳은 황둔마을이 유일하다. 문할머니는 남편에게도 자녀들의 소식을 전해주기 위해 e-메일 내용을 모두 복사해 간다고 한다. 그래서 황둔마을을 찾는 문할머니의 나들이 길은 언제나 즐겁다. 인터넷은 문할머니의 삶에 활력을 주고 있는 셈. 인터넷과 산골마을의 만남은 때때로 이렇게 순박하고 인간적인 풍경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정보화 시범마을’ 사업은 어디까지나 ‘시혜차원’에서 이뤄지고 있는 것. 통신망 구축비용 등 사업적 측면에선 이용자 수가 적어 채산성이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정보화 시범마을이 주변 농촌으로 인터넷환경을 확산시키는 ‘거점’역할을 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시범마을사업이 농어촌 정보화의 표준모델을 만들었다’는 정보통신부의 의미 부여가 ‘자화자찬’으로 비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현재 전국의 정보화 시범마을은 모두 16곳. 그러나 마을 한 곳 당 13억 원이나 드는 이 사업이 얼마나 더 확대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정보화 시범마을의 불투명한 장래는 황둔마을에서도 드러난다. 이 마을의 경우 기지국에서 10km 이내에 있는 가구만 초고속통신서비스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작은 산골마을 내에서도 ‘정보화의 격차’ ‘소외지역’이 발생한 셈이다. 요행히 정부가 정보화 시범마을 사업을 확대할 경우에도 ‘어느 마을에 우선적으로 혜택을 주느냐’의 문제, ‘농촌과 농촌사이의 정보격차’의 문제가 필연적으로 뒤따르게 되는 것이다.

    황둔마을은 또 초고속인터넷의 부작용이 농촌에서 더 ‘맹독성’을 발휘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농부들이 자료검색으로 도움 받는 경우를 빼면 현재 인터넷통신망이 농가소득 향상으로 연결되는 효과는 미미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반면 ‘자나깨나’ 인터넷게임에 몰두하는 청소년들은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이를 걱정하는 부모들의 목소리도 높다. 여가시설이 거의 없는 농어촌 지역일수록 청소년들이 훨씬 더 심각하게 인터넷에 중독될 수 있음은 자명하다는 설명이었다.

    인터넷이 황둔마을을 태백산맥 골짜기 밖으로 끄집어 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IT 세계로의 화려한 ‘데뷔’ 이후가 문제다. 그래서 황둔마을과 농촌정보화사업의 앞으로의 전개과정이 더 주목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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