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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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타킨테’가 팔려간 그 ‘노예섬’

  • < 글·사진/ 전화식(Magenta International Press), magenta@kornet.net >

    입력2005-01-31 16: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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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쿤타킨테’가 팔려간 그 ‘노예섬’
    아프리카라는 말만 들어도 눈물이 난다’는 한 시인의 말에 나는 동감한다. 아프리카는 분명 비극적인 대륙이다. 피부색 때문에 벌어진 차별이나 아프리카인들은 미개하다고 폄하하는 사람들의 편협함에서만 기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오래 전부터 이 대륙에서 벌어졌던 ‘흰색 악마’들의 먹이사냥 탓에서 느끼는 감정이다. 악마적 탐욕의 결과가 여전히 오늘날에도 살아 숨쉰다는 현실이 이 대륙을 눈물나게 만든다. 흰색의 악마들은 바로 유럽 대륙의 백인 조상이다.

    나는 1년에 2~3차례나 아프리카를 찾을 정도로 그곳을 좋아하고 그들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고 자부하면서도 솔직히 그들의 실제적인 생활상에는 어느 정도 미개한 부분이 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몇몇 나라를 빼면 단 몇백 달러 수준에 그치는 GNP에서 알 수 있듯 낙후한 경제는 다른 대륙의 여타 국가와 비교하기 어렵다. 또한 유럽 등 다른 대륙에 대한 의존도를 따지면 그것 또한 다른 국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다. 이런 의존성이나 미개인이라는 허울은 선진 문화를 가진 유럽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대륙이라는 불행에서 연유한 것이라 볼 수 있다.

    15~16세기 당시 최강국가이던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에서 배편으로 반나절 거리, 지금은 비행기로 불과 2시간이면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닿는 곳이 바로 아프리카다. 유럽이 급격한 산업사회로 변화하기 시작하면서 더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던 시절, 전성기를 누리던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 이탈리아 등은 껄끄러운 상대인 중동이나 좀더 먼 아시아보다는 근접하기 쉬운 아프리카를 먹이대상으로 선택했다. 중동이나 아시아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따라서 무방비상태에 있는 아프리카는 영국, 독일, 프랑스, 포르투갈, 네덜란드, 이탈리아, 벨기에가 갈가리 찢어 오늘날까지 식민지 시대의 삶과 전통적인 삶이 병존하고 있다.

    ‘쿤타킨테’가 팔려간 그 ‘노예섬’
    세네갈(Senegal)은 아마도 그러한 혼합된 문화, 아프리카 대륙의 슬픈 어제와 오늘을 가장 잘 보여주는 나라일 것이다. 20여 개국이 넘는 아프리카를 다녔음에도 세네갈의 노예 집결지인 고레섬(Ile de Goree)에서만큼 아프리카인들의 비극적인 삶을 생생하게 느낀 적은 없었다. 노예무역이 아프리카를 비탄의 땅으로 만들었을 때, 고레섬은 노예들의 집결지로써 마지막으로 아프리카 땅과 이별하는 곳이었다.

    다카르에서 배로 15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는 고레섬은 걸어서 1시간이면 섬을 다 볼 수 있을 정도로 크기가 작은 섬이다. 이 섬이 중요한 까닭은 인도양의 진지바르섬과 대서양의 이 작은 섬이 아프리카 전역에서 잡혀온 노예들의 집결지였다는 역사성 때문이다.



    고레섬의 작은 항구에 도착하면 먼저 소란스런 광경에 넋을 잃는다. 수십 명의 아이들이 다카르에서 온 배로 헤엄쳐 몰려와 마치 우리네가 미군들에게 초콜릿을 달라 했듯이 관광객들에게 동전을 던져달라고 소리치기 때문이다. 이 광경을 보며 관광객들은 웃으며 바다로 동전을 던지고 아이들은 흰 거품을 일으키며 쉼 없이 자맥질을 해 돈을 건진다. 피의 역사로 얼룩진 고레섬에서 맞닥뜨린 이 풍경이 내게는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쿤타킨테’가 팔려간 그 ‘노예섬’
    300년 동안 기니만 기슭과 내륙부의 오지에서 포획한 무려 2000만 명에 가까운 아프리카인들이 이 섬을 거쳐 미국으로 실려갔고, 수백만 명이 이곳에서 죽었음에도 이 섬에 갇혔던 조상들의 삶은 잊은 채 오늘날에도 백인들이 던지는 하찮은 ‘먹이’에 현혹되어 놀잇감으로 전락한 아이들과 현실이 안타깝기만 했다.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만행을 자행한 이곳에서는, 지금도 돌로 지은 ‘노예의 집’이 남아 당시의 참혹함을 알려준다. 방이라 할 수 없는 차가운 돌덩이로 이루어진 곳에서 자신이 어디로 팔려가는지도 모른 채 대서양의 푸른 물을 바라보며 눈물지었을 먼 옛날의 그들이 떠오른다. 한 점의 빛도 들어오지 않는 작은 공간에서 얼마나 몸부림쳤는지 벽에 손톱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여자의 방, 아이의 방, 남자의 방으로 나뉜 그곳에서 자신의 가족과 생이별한 채 짐승처럼 끌려온 그들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흰둥이’들에게 채찍으로 맞으며 자신들이 팔려갈 아메리카 대륙이 어딘지도 모르면서 고향을 떠난다는 사실만을 본능적으로 알았으리라. 차가운 돌덩이에 몸을 기대고, 풍요로운 초원에서 자유롭게 사냥하고 배가 고프면 나무의 열매로 허기를 채우던 소중한 시간들을 그리워했을 그들을 상상하면 인간이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지 치가 떨리기도 한다.

    ‘쿤타킨테’가 팔려간 그 ‘노예섬’
    내가 고레섬을 찾은 날에도 역시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관광객들로 좁은 노예의 집 앞마당이 붐볐다. 대부분이 서구에서 온 이들은 흑인 가이드의 열변에 가까운 설명을 들으며 마치 유태인 학살관의 독일 관광객들 같은 표정으로 조상이 저지른 만행의 흔적을 둘러보았다.

    노예의 집 뒤쪽에는 늘 문이 열려 있는 곳이 있는데, 아메리카 대륙으로 바다를 향해 난 이 문은 아프리카 땅을 떠나는 ‘마지막 관문’이다. 선별한 노예들은 이 문을 거쳐 고향인 아프리카를 떠나 아메리카로 향하는 배에 실려 머나먼 항해를 했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고단한 삶이 기다리는 곳으로 끌려간 이별의 문인 셈이었다.

    지금도 마지막 문은 열려 있고, 문 앞에 펼쳐진 대서양의 출렁이는 물결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푸르다. 거친 항해를 거쳐 아메리카 대륙으로 끌려간 노예들의 피와 땀이 현재 미국이 누리는 부를 이루는 데 기초가 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으리라. 그리고 인과응보처럼 비참하게 끌려간 노예의 후손들이 지금은 미국의 사회적 문제가 되어 골칫거리로 변모한 현실을 보면 인간사의 연결고리가 두려워지기도 한다.

    과거에는 힘이 없어 식민지가 되어 당해야 했던 서글픔이 지금은 비록 독립했지만 새로운 ‘경제적 힘’을 가진 예전의 주인에게 기대어야 하는 쳇바퀴 같은 서글픔으로 남아 있다. 이것이 세네갈의 현실이다. 그러나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오늘의 세네갈인들은 활기차고, 순박하며, 낙천적인 모습으로 그들의 삶을 영위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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