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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한반도시대가 온다

독자 연호 사용 ‘천하’를 꿈꿨다

역사로 본 한반도 중심론…기회 있을 때마다 변방국가 탈피 안간힘

독자 연호 사용 ‘천하’를 꿈꿨다

독자 연호 사용 ‘천하’를 꿈꿨다
김대중 대통령의 한반도 중심론

새천년의 첫 광복절날 김대중 대통령은 독립기념관에서 한반도 중심론을 역설했다. 남북이 손잡을 경우 우리나라는 해양에서 대륙, 대륙에서 해양으로 진출하는 전진기지가 될 것이고, 이는 “아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 있는 주변국가가 이제 당당히 세계의 한 중심국가가 되는 것”을 뜻한다며 “바야흐로 한반도 시대가 오는 것”이라고 설파했다.

그러나 이런 가슴 벅찬 선언에 대한 국민들의 호응은 거의 없는 듯하다. 흔히 그렇듯이 국내정치용으로 해석하려는 기류가 다수다. 그러나 한반도 중심론을 제기한 이면이 어떠하든지 간에 거기에는 대단히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다. 여기에는 어느 한 정치세력의 이해와 계산을 떠나 우리 민족사의 분명한 과제가 담겨 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고대국가들의 천하 중심론

한반도 중심론을 근대 이전의 용어로 표현하면 칭제건원론(稱帝建元論)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황제를 칭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자는 것이 칭제건원론이다. 바다 멀리 떨어져 있는 일본과 달리, 한반도는 칭제건원할 경우 중국의 통일제국과 대결이 불가피했음에도 고구려는 칭제건원했다.



유명한 광개토대왕비는 “옛날 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세우셨는데, 왕은 북부여에서 오셨으며 천제(天帝)의 아들이자 어머니는 하백(河伯·물의 신)의 따님이셨다…”로 시작한다. 고구려 왕실의 공식 역사관을 나타내는 이 비문은 고구려인들이 자신들을 하늘의 아들이자 물의 외손으로 여겼음을 보여준다. 이런 천하관에 맞게 광개토대왕은 임금보다 큰 임금이란 뜻의 호태왕(好太王)이란 칭호를 사용했는데, 이는 황제의 고구려식 표기였다. 광개토대왕이 영락(永樂)이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것은 물론이다. 고구려는 영락 이외에도 건흥(建興)-연가(延嘉)-영강(永康) 등의 연호를 사용한 칭제건원의 자주 국가였다.

백제 또한 마찬가지였다. 고구려가 대륙을 지배했다면 백제는 일본을 지배했다. 백제에서 일본 임금에게 내린 칠지도(七支刀)에는 “널리 후왕들에게 공급할 만하다”는 구절이 있다. 후왕은 제후국의 왕을 뜻하므로 백제의 임금도 후왕들을 거느린 황제였던 것이다.

신라 또한 법흥왕 23년(536)에 건원(建元)이란 연호를 사용했고, 진흥왕 때에는 개국(開國) 등의 연호를 사용했으며, 선덕왕 때 인평(仁平), 진덕왕 때 태화(太和)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그러나 신라는 이후 독자적 연호 사용을 포기하고 당나라의 연호를 사용하면서 백제-고구려와 전쟁에 나선다. 독자적인 천하관을 갖고 있던 고구려는 수(隋) 양제, 당(唐) 태종의 침입을 물리쳤으나 나당(羅唐)연합군에 멸망하고 말았다. 신라의 통일은 비단 백제-고구려의 멸망일 뿐만 아니라 신라 자신도 독자적인 연호 사용을 포기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점에서 민족 자주성의 시련으로 기록된다. 통일신라의 헌덕왕(憲德王) 14년(822)에 웅주도독 김헌창(金憲昌)이 군사를 일으키며 국호를 장안(長安), 연호를 경원(慶元)이라 한 것은 신라의 이런 사대성에 대한 반발이란 점에서 주목된다.

발해는 태조 고왕(高王·대조영)이 천통(天統)이란 연호를 사용한 것을 필두로 역대 임금이 모두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으며, 후삼국시대의 궁예 또한 무태(武泰)-수덕만세(水德萬歲) 등의 연호를 사용했다. 고려 태조 왕건은 천수(天授)라는 연호를 사용했고, 광종도 광덕(光德)-준풍(峻豊)이란 연호를 사용했다. 그러나 광종 이후 거란, 여진의 침입을 받으면서 고려의 독자적 천하관은 크게 위협받기 시작했다.

인종 13년(1135)에 발생한 ‘묘청의 난’을 단재 신채호 선생이 ‘조선역사상 1천년래 제1대 사건’으로 규정한 이유도 이 사건이 한반도 중심론, 즉 우리민족의 독자적 천하관을 지키려던 사건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신채호는 ‘묘청의 난’을 묘청이 대표하는 낭불양가(郎佛兩家)-국풍파(國風派)-독립당-진취사상 대 김부식이 대표하는 유가(儒家)-한학파(漢學派)-사대당-보수사상의 싸움으로 보았는데, 이 싸움에서 묘청이 이겼다면 이후 역사는 독립적-진취적 방면으로 나아갔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묘청이 서경, 곧 평양 천도를 주장한 데에는 금나라에 사대하는 당시 상황을 풍수지리설로 극복하려는 생각도 한몫 했는데, 평양 임원역(林原驛)에 수도를 쓰면 서른여섯 나라가 조공할 것이라는 비결(秘訣)이 신라 말기부터 유행했던 것이다.

신라의 황룡사 9층탑의 창건연기도 한반도 중심론과 관련이 있다. 선덕여왕 때 자장법사가 서쪽으로 유학해 문수보살을 만났을 때 문수보살은 황룡사 호법룡(護法龍)이 자신의 장자(長子)라며 그 절에 9층탑을 세우면 이웃나라가 항복하고 구한(九韓)이 와서 조공할 것이라고 예언했고, 이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탑을 세운 지 20여년 후에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했다.

그러나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한반도는 동아시아의 중심국가가 되지 못했고, 조선시대에는 사대교린(事大交隣)을 제1의 외교정책으로 내세우면서 칭제건원을 포기했다. 그런 조선의 현실에 반발한 사대부가 임제(林悌)다. 서도병마사로 제수받아 가던 길에 명기 황진이의 무덤 앞에 앉아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란 시조를 지었다가 임지에 도착도 하기 전에 파직당한 것으로 유명한 임제의 유언은 되새길 바가 많다.

“천하의 여러 나라가 제왕을 일컫지 않은 나라가 없었는데, 오직 우리나라만은 끝내 제왕을 일컫지 못하였으니, 이같은 나라에 태어나서 죽는 것이 무엇이 아깝겠느냐! 내가 죽거든 곡을 하지 말아라.”

요동정벌을 반대한 이성계의 4불가론 중 하나가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칠 수 없다”는 것이었으니, 그것이 비록 군사전략적 사고의 표현이랄수도 있으나, 그 이후 조선이 제왕을 일컫지 못하고 제후국의 왕에 머무른 것은 아쉬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명이 망하고 청이 들어서자 북벌론(北伐論) 소중화(小中華) 사상이 나타났으나 결국 일본에 멸망하게 된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청나라와 맺은 시모노세키(下關)조약의 제1조가 “청국은 조선국이 완전무결한 독립국임을 확인한다”고 되어 있는 것은 일본이 한국의 독립을 원해서가 아니라 청과의 사대관계를 끊고 일본에 예속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런 일본의 억압에서 벗어난 지 반세기 만에 우리는 이제 적어도 ‘중심국가’와 ‘한반도 시대’를 언급할 정도의 발전은 이룩한 것이다.

러시아의 학자 베르나츠키(D.Vernadsky)는 13세기 몽고의 급격한 팽창을 일종의 영적 폭발(靈的爆發)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한반도 시대를 여는 데도 이런 영적 폭발이 필요하다. 그 매개는 우리 것이 세계화될 때 가능한 것 아닐까. 하긴 외국인의 눈에 비치는 우리의 모습이 지역감정, 정실주의, 부패 등에 불과한 상황에서 세계화를 주장할 우리 것이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주간동아 2000.09.14 251호 (p4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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