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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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 삐딱이’가 몰려온다

‘약골’ ‘문화사기단’ 등 사이트 폭발적 접속…기존 가치관, 기득권 세력에 거센 도전장

  • 입력2005-07-06 13: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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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이버 삐딱이’가 몰려온다
    ”앞으로 다가올 사이트는 당신에게 심한 구토와 설사, 정신장애를 일으켜 당신도 모르는 발작으로 당신의 컴퓨터를 부숴 버릴지도 모릅니다. 정신연령이 미숙한 사람들은 당장 돌아가 주시기 바랍니다.”

    정중하면서도 강력한 경고문, 곧 모니터에 뜨는 ‘수상한’ 목차들은 이렇다. 아나키즘과 파시즘, ×같은 코리아 사회의 기득권, 아나키즘에 대한 오해들….

    심지어 ‘당신이 절대로 보고 싶지 않은 극단적 내용들’이란 코너엔 동성애, 자위, 시간(屍姦), 식인 풍습, 마리화나 등에 관한 내용과 사진을 담은 ‘역겹고 기괴한’ 사이트들까지 링크해 놓았다. 이 홈페이지(http://anarclan.tripod. com)의 주인은 자신을 ‘사람들이 튀기 혹은 깜둥이라 부르는 흑인 혼혈아’라고 소개했다. 별명은 ‘약골’. 그는 자신은 아나키스트라고 주장한다.

    인터넷에서는 주류와 비주류의 차별이 없다. ‘인터넷 카리스마’란 디지털 시대 그 이전의 잣대로 본 문화 구분법인지 모른다. 지금 넷(net) 세계에서 일단의 아나키스트들이 내뿜는 열기가 뜨거운 것도 자연스럽게 보인다. “주류 획일 보수 독점 자본 억압 등의 칼날이 넷 상에서만이라도 사라지길 두 손 모아 빈다.” 이들의 ‘공격 대상’은 사회의 비주류와 소수의 다양한 의견, 개인의 자발성을 ‘획일’이란 ‘폭력’으로 억누르는 국가라는 이름의 권위와 기득권 세력이다.

    6월23일 서울 종로 S커피숍에서 ‘체게바라’ 배지를 가방에 달고 나타난 ‘약골’을 만났다. 사이트에서 느낀 선입견과 달리 그는 ‘약골’이나 ‘혼혈아’와는 거리가 먼 ‘빵빵한’ 체격의 ‘토종’ 한국인 남성. “만 27세의 언어학 전공 대학원생”이라고만 자신을 소개한 ‘약골’은 본명을 밝히길 거부했다. 그가 ‘약골’이나 혼혈아로 자신을 감춘 건 스스로 아직 우리 사회에서 소수일 수밖에 없는 존재가 아나키스트라는 생각에서다.



    그는 왜 이런 도발적인 사이트를 만들었을까. “생각의 획일화는 파시즘을 낳는다. 예컨대 서갑숙이란 사람이 자신의 성 체험을 담은 책을 낸 것에 대해 섹스에 대한 한국인의 공통된 기준을 행여 넘지는 않았나, 그것을 선동하지는 않을까 등을 염려하고 감시하는 사람들이 분명 있다. 그들의 생각은 획일화돼 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걸 이해하지 않는다. 자유로운 생각들이 억압되지 않고 소통되는 것, 이것이 내가 사이트를 만든 이유다.”

    최근 ‘약골’ 사이트의 접속 건수는 10만을 넘었다. 98년 처음 ‘넷츠고’에 만들었던 원래의 홈페이지는 ‘음란성이 짙다’는 이유로 폐쇄됐다. ‘약골’은 그것 또한 ‘생각의 다양성’을 부정하는 ‘또다른 폭력’이라 불렀다. ‘기괴한’ 사이트를 링크시킨 것도 다양한 생각의 소유자라면 자신의 ‘클릭’에 스스로 책임질 수 있다는 그의 지론에서 기인한다.

    인터넷엔 ‘약골’의 ‘동지’와 ‘추종자들’이 많다. 아나키즘에 대한 견해와 아나키즘 관련문서를 소개한 사이트만도 50여 개. 개성 있는 사이트를 운영하며 실제 생활을 ‘아나키적’으로 하는 네티즌도 부쩍 늘고 있다. 이들의 공통분모는 ‘저항’.

    ‘문화사기단’(http://munsadan.wo. to), 약칭 ‘문사단’도 그런 부류의 하나다. ‘공연이나 하고 앨범이나 슬슬 내면서 펑크록을 하는 잡놈 모임’을 표방한 문사단에선 ‘들뜬 마음 가라앉히고’ ‘지랄탄99’ ‘노브레인’ ‘삼청교육대’ 등 이름조차 이상야릇한 4개의 밴드가 활동하고 있다. 반항적 가사와 폭발적인 사운드가 이들의 ‘무기’다.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을 자, 그 누구라더냐. 저 철옹성을 쳐부수고자 힘차게 맹진하노라. 짓밟힌 자들의 처절한 복수로다…. 아, 우리는 자랑스런 대한국의 청년폭도. 아, 힘차게 맹진하며 골로 가는 청춘이다.” ‘노브레인’이 7월초 선보일 ‘청년폭도맹진가’ 가사는 자못 공격적이기까지 하다. 노브레인은 ‘뇌가 없다’는 뜻. 하지만 ‘대한민국의 흉악한 시스템을 장악한 모든 수뇌(brain)에 대한 부정’이라는 위악적 의미도 담겨 있다. 이들 역시 아나키스트를 표방한다.

    ‘문화사기단’ 멤버 ‘김작가’(26·남·인터넷방송국 PD)는 “아나키즘을 폭동 파괴 테러와 동일시하는 고정 관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방송 영화 등 지배계급의 미디어에 눈과 귀를 빼앗겼기 때문이다. 획일적 가치를 버리는 일은 조직적인 활동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 대안이 바로 인터넷 아나키즘”이라고 말한다.

    당연하지만 인터넷 아나키스트들은 자유로운 ‘담론’을 즐긴다. 만화를 그리는 별쥐(29·남), 벤처기업 직원 묘아(猫兒·21·여), 음악 웹진에 글을 올리는 루저(31·여) 등의 개인 홈페이지는 아나키스트들의 사랑방으로 자리잡았다. “너무 앞서가는 것 아냐?” “헛짓 하지 말고 생산적인 일이나 해.” 아나키스트들에 대해 보이는 네티즌의 반응 스펙트럼은 다채롭다. ‘파격’을 용납하지 못하는 네티즌들의 욕설과 강한 비판이 난무하기도 한다. ‘인터넷 아나키즘 리더’ 격인 ‘약골’도 한때 ‘또라이’로 취급받았다. 지금도 그 ‘대접’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아나키스트들이 인터넷을 선호하는 이유는 뭘까. “내가 믿는 가치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태도, 이런 내 주장에 기본적으로 동의하는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는 훌륭한 매체가 인터넷이다. 우리는 인터넷을 사랑한다.” 이들은 온라인에서는 물론이고 ‘오프 모임’에서조차 실명을 쓰지 않는다. 사회에서 주류를 차지하는 가치관과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 주장하는 ‘인터넷 실명제’는 그들이 리얼 스페이스에서 가진 권력을 더욱 강고히 해 줄 뿐이라는 것.

    서로 다른 다양한 가치의 충돌이 비로소 ‘더 좋은’ 가치를 낳을 수 있다는 아나키스트들의 주장은 완전한 정보 공유를 전제로 한다. ‘산업세계의 정권들아. 우리는 희망의 새 고향,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왔노라. 미래의 이름으로 너 과거의 망령에게 명하노니 우리를 건드리지 마라…. 우리는 인종, 경제력, 군사력, 출신 지역 등에 대한 편견이나 특권이 없는,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세계를 건설할 것이다…. 이는 너희 정권들이 이전에 만든 그 어떤 것보다 더 인간적이며 공명정대할 것이다.’(미국 아나키스트 Louis Rossetto가 쓴 ‘사이버 스페이스 독립선언문’ 중에서)

    그러나 이들의 격렬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주장은 사이버의 익명성 뒤에 숨어 있다는 점에서 실천이 담보되기 어려운 ‘젊은 한때의 유희’로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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