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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욱의 술기로운 생활

그 말통에는 휘발유, 아니 막걸리가 들었다오

막걸리 용기 변천사

그 말통에는 휘발유, 아니 막걸리가 들었다오

한국인에게 추억이 가장 많이 깃든 술은 뭘까. 누구는 호프집의 생맥주를, 또 누구는 고된 노동 후 대폿집에서 들이켜곤 하던 한 잔의 소주를 꼽을 것이다. 이러한 소주, 맥주와 달리 ‘고향’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술이 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동네마다 각각 다르게 담가 마시던 술, 막걸리다. 

2002년까지 막걸리에 대해서는 ‘지역판매 제한’이라는 주세법상 규제가 있었다. 전국 면 단위마다 양조장이 있었고 각 양조장에서 만든 막걸리는 해당 동네에서만 팔아야 했다. 남의 동네에서 만든 막걸리를 마시려면 그 동네로 건너가야 했다. 자연히 막걸리에는 ‘우리 동네 술’ ‘우리 고향 술’이라는 친근한 이미지가 생겼다.


숙취에 좋은 빈대떡과 파전의 소화를 돕는 술

[shutter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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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는 요즘에도 비 오는 날 가장 많이 팔린다. 장마철 대형마트에 가보면 막걸리와 부침가루를 세트로 묶어 판매할 정도다. 농번기 때 비가 내리면 일손을 멈추고 막걸리를 한잔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비 오는 날엔 막걸리’라는 공식이 생겼다고 전해진다. 

1970년 9월 5일자 ‘동아일보’ 기사에서도 이러한 한국인의 문화를 엿볼 수 있다. ‘땀 흘리는 한국인, 적도림 개발’이라는 연재물의 21번째 ‘망향(望鄕)’ 편에 ‘비가 오는 날이면 일에 쫓겨 덮어두었던 고향 생각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이다. 이런 때면 그들은 한국인끼리 둘러앉아 막걸리 타령, 음식 타령 등 입으로나마 고향에 대한 회포를 나누기 마련이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적도 부근에서 정글을 개척하던 한국인 노동자들도 비 오는 날만큼은 일을 쉬었고, 한국인끼리 둘러앉아 막걸리 얘기를 하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는 것이다. 이는 비단 해외 파견 노동자만의 사연은 아니었다. 1970~80년대 서울로 상경한 건설 노동자들도 비 오는 날엔 일손을 놓고 고향 생각을 하며 막걸리를 마셨다. 

막걸리와 파전은 1970년 이후 인연을 맺은 것으로 전해진다. 파전에 앞서 빈대떡이 있었다. 녹두를 갈아 돼지기름에 부친 빈대떡은 고기와 기름이 부족하던 시절 상당한 고급요리였다. 1930년대부터 서울을 중심으로 빈대떡집이 생겨나면서 여기서 팥죽과 국수, 소주와 막걸리를 함께 팔았다고 한다. 흥미로운 대목은 빈대떡에 들어가는 녹두가 숙취 해소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궁중에서는 누룩을 만들 때 녹두를 넣기도 했다. 녹두빈대떡은 술 마신 다음 날 숙취까지 고려한 안주인 셈이다. 



1970년대 정부가 분식을 장려하고 1980년대 대학가 주변으로 민속주점이 생겨나면서 파전이 막걸리의 짝꿍으로 본격 등장한다. 파전에 사용하는 식용유는 1960년대까지만 해도 고급 선물세트에 들어가는 고가 제품이었다. 1950~60년대 밀가루 선물세트가 있었을 정도로 밀가루 역시 1970년대 이전까지는 대중이 즐기는 곡물이 아니었다. 파전이라는 말은 1980년대 초 부산 동래파전이 유명해지면서 전국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밀가루를 기름에 부친 파전은 좀 느끼한 게 사실. 그런데 막걸리가 파전의 소화를 돕는다. 막걸리 속 누룩에는 전분 분해 효능이 있어 파전의 밀가루를 분해해준다. 막걸리가 밥보다 소화가 잘 안 되는 밀가루 음식과 짝을 이뤄 천연소화제 역할을 하는 셈이다.


공용 유리병 사라지고 ‘막걸리 홀더’ 등장

1 플라스틱 말통. 2 막걸리 양조장의 목통. 3 막걸리 홀더. 4 막걸리 서버. [사진 제공 · 대강양조장, 사진 제공 · 완주 대한민국 술테마박물관, 사진 제공 · 월향]

1 플라스틱 말통. 2 막걸리 양조장의 목통. 3 막걸리 홀더. 4 막걸리 서버. [사진 제공 · 대강양조장, 사진 제공 · 완주 대한민국 술테마박물관, 사진 제공 · 월향]

막걸리를 플라스틱 말통(‘사진1’ 참조)에 담아 사발로 마셨다는 어른들의 이야기를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터. 어르신들이 즐겨 이야기하는 레퍼토리라 광복 이후 계속된 ‘전통’이겠거니 싶은데, 휘발유를 담았을 것처럼 생긴 이 플라스틱 말통은 의외로 1970년대 들어 등장했다. 


1930년대 충남 당진 신평양조장의 모습. 막걸리를 나무통에 담아 자전거로 배달했다. [사진 제공 · 신평양조장]

1930년대 충남 당진 신평양조장의 모습. 막걸리를 나무통에 담아 자전거로 배달했다. [사진 제공 · 신평양조장]

1969년 정부는 위생 증진을 목적으로 막걸리 용기를 플라스틱통으로 바꾸게 했다. 이에 플라스틱 말통이 국세청 검열을 거쳐 만들어졌고, 금성사라는 곳이 입찰을 따내 생산, 보급했다. 이전에는 ‘목통’으로 불리는 나무통이 쓰였다(‘사진2’ 참조). 90년 역사를 가진 충남 당진 신평양조장의 김용세 명인에 따르면 신평양조장은 참나무로 만든 목통을 썼다고 한다. 참나무는 유럽에서 와인과 위스키를 숙성시키는 통을 만들 때 사용하는 나무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막걸리 페트병은 1970년대 후반에 등장했다. 10~20ℓ 대용량 플라스틱 말통에서 750㎖짜리 소용량 막걸리가 나온 것이다. 뚜껑은 부직포로 제작해 생막걸리 특유의 탄산이 빠져나올 수 있게 했고, 지금보다 훨씬 더 유연한 재질의 플라스틱 소재가 쓰였다. 문제는 발효가 진행되면서 페트병 형태가 변형돼 갈수록 세워놓기가 어렵다는 점. 이 때문에 1980년대 ‘막걸리 홀더’가 등장했다(‘사진3’ 참조). 생맥주 잔과 비슷하게 생긴 플라스틱 홀더에 발효가 진행될수록 점점 쓰러져가는 막걸리 페트병을 세워두는 과도기적(?) 도구였다. 

그리고 잠깐 유리병 막걸리가 출시됐다. 1980년대 초반 정부는 공용 유리병을 만들어 전국 막걸리 양조장에 배포했다. 햇빛을 차단하고자 맥주병과 마찬가지로 갈색으로 제작됐다. 하지만 1~2년 후 자취를 감췄다. 빈 유리병을 수거하기 난망했고, 재활용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플라스틱 말통으로 막걸리를 받는 민속주점이 꽤 많았다. 하지만 위생이 문제가 되자 정부는 막걸리를 2ℓ 이하 용기에만 넣어 판매하게 했다. 하지만 2014년 다시 ‘2ℓ 이상 10ℓ 이하’로 규정이 바뀌면서 최근에는 생맥주 서버처럼 생긴 막걸리 서버가 등장했다(‘사진4’ 참조). 

1990년대 들어 막걸리 페트병은 진화한다. 병 입구가 부직포에서 플라스틱 캡으로 변경되고, 플라스틱 소재 역시 발효 과정에서도 견디는 내압 소재로 바뀐다. 그간 페트병 디자인에 한계가 있다는 인식이 많았는데, 최근에는 페트병 디자인이 다채롭게 발전하고 있기도 하다.


막걸리병 디자인 다양화 추세

[사진 출처 · 복순도가, 사진 제공 · 포천일동막걸리, 사진 제공 · 포천일동막걸리]

[사진 출처 · 복순도가, 사진 제공 · 포천일동막걸리, 사진 제공 · 포천일동막걸리]

‘스파클링 막걸리’로 유명한 울산 ‘복순도가 손막걸리’는 탄산이 올라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막걸리병을 매끈한 디자인으로 제작했으며, 경기 포천일동의 ‘담은’은 구름 같은 색과 맛을 표현했다는 막걸리답게 흰색 병으로 출시되고 있다. 신평양조장의 ‘백련’ 막걸리는 10년 전부터 연꽃놀이하는 선비를 보여주는 라벨과 캘리그래피가 돋보이는 유리병 디자인을 선보여왔다. 


그 말통에는 휘발유, 아니 막걸리가 들었다오
막걸리는 한국 경제발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1970년대 고도성장기 때 막걸리 판매량이 총 주류 판매량의 75%를 차지하며 노동의 고단함을 달래주는 서민 술을 대표했다. 하지만 지역적인 것이 많이 쇠퇴해갔듯, 막걸리 또한 잊혔다. 이번 여름 국내로 휴가를 떠난다면 그 동네 막걸리를 꼭 마셔보길 권한다(지도 참조). 강원 횡성에서 한우를, 남도에서 한정식을 즐기듯 그 동네 막걸리를 마신다면 자연스럽게 현재 머무는 곳과의 훈훈한 소통으로 이어지리라 믿는다.






주간동아 2019.08.09 1201호 (p70~73)

  • 주류 문화 칼럼니스트 blog.naver.com/vegan_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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