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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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동계패럴림픽 특집

“평창동계패럴림픽만 보며 달려왔으니 금메달 따야죠”

장애인 아이스하키 국가대표 선수 정승환

  • 춘천 정혜연 기자 grape06@donga.com

    입력2017-12-19 14:4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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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제공 · 대한장애인체육회]

    [사진 제공 · 대한장애인체육회]

    2018 평창동계패럴림픽 6개 종목에 우리나라는 국가대표 선수 39명이 참가한다. 이 가운데 17명이 출전하는 장애인아이스하키는 유력한 메달 종목으로 관심을 받고 있다. 특히 빠른 속도와 뛰어난 경기력으로 이름난 정승환(31·강원도청) 선수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정 선수는 ‘빙판 위 메시’ ‘로켓맨’ 같은 별명이 붙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나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알려져 있다. 덕분에 한국 장애인 아이스하키팀은 미국, 캐나다와 함께 강국으로 꼽힌다. 실제로 12월 초 열흘간 캐나다에서 열린 챌린지컵에서 우리나라는 이탈리아를 꺾고 미국과 캐나다에 이어 3위를 기록했다. 챌린지컵을 마무리 짓고 귀국해 사흘간 짧은 휴가를 즐기고 있던 정 선수를 12월 13일 강원 춘천에서 만났다.

    하루 10시간 13년간 훈련, 실력 급성장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성큼성큼 걸어오는 모습이 잘생기고 인기 많은 교회 오빠의 표본처럼 보였다. “먼 길 오느라 고생하셨다”며 깍듯하게 인사하고 커피를 권하는 태도만 봐도 어떤 사람인지 짐작이 갔다. 귀국한 지 이틀밖에 지나지 않아 피곤할 법한데도 그는 “많은 사람이 패럴림픽에 관심을가져주는 지금이 가장 소중한 때다. 홍보대사임에도 각종 대회와 훈련 때문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뿐”이라고 답했다.

    평창동계패럴림픽 준비는 잘 돼가고 있나요.
    “본격적인 훈련은 다음 주부터 시작이에요. 보통 하루에 2번 2시간씩 경기를 뛰고 근력운동을 1시간 30분씩 하는 등 매일 10시간 정도 훈련하고 있어요. 또 국내에서는주말에 클럽팀과 시합이 있고, 1월에는 일본 나가노컵에 출전하며, 2월에는 러시아팀과 경기가 예정돼 있어요. 아무래도 동계 시즌이다 보니 평창동계패럴림픽이 열리는 3월 전에 국내외 시합이 많아요. 각종 시합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도 중요하지만 선수들이 최대한 부상 입지 않고 경기력을 끌어올리려 노력하고 있어요.” 

    최근 팀 성적을 보면 강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데, 평창동계패럴림픽에서 금메달을 기대할 만한 거 아닌가요.
    “물론 목표는 금메달이죠. 사실 패럴림픽 금메달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예요. 우리나라는 2000년대 초반 장애인 아이스하키가 도입됐어요. 세계 장애인 아이스하키 대회가 A, B-pool(풀)로 나뉘는데 처음에는 B-pool 꼴찌로 시작했고, 2008년 B-pool에서 우승한 뒤 이듬해 A-pool에서 뛰기 시작했어요. 이후 2012년 노르웨이 하마르에서 열린 IPC(국제 장애인 올림픽 위원회) 장애인 아이스하키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은메달을 땄을 정도로 실력이 급성장했죠. 반면 저희가 역대 패럴림픽에서 메달 운이 없었어요. 2010 밴쿠버동계패럴림픽 6위, 2014 소치동계패럴림픽 7위를 기록했죠. 선수들의 부상이 발목을 잡았는데 이번에는 부상 없이 결승전까지 잘 치르는 게 1차 목표예요.” 

    아무래도 패럴림픽 메달이 의미가 큰데 아쉬움이 많았겠어요.
    “소치동계패럴림픽 때는 메달 기대가 정말 컸어요. 러시아와 경기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관람했을 정도로 열기가 뜨거웠는데, 결국 저희가 이겼거든요. 그다음 이탈리아와 경기에서 1점 차로 졌어요. 이탈리아는 해볼 만한 상대였는데 부상 선수가 생겨서 제대로 싸워보지 못해 아쉬웠죠. 이번에는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패럴림픽이니 미국과 캐나다 같은 강팀도 잘하면 이길 수 있을 거라 기대하고 있어요.” 



    장애인 아이스하키는 10kg에 달하는 보호구와 장비를 착용한 채 빙판 위를 종횡무진해야 한다. 정승환 선수는 외국 선수들과 경기에서 빠른 속도와 월등한 실력으로 골을 넣어 ‘빙판 위 메시’로 불린다.

    장애인 아이스하키는 10kg에 달하는 보호구와 장비를 착용한 채 빙판 위를 종횡무진해야 한다. 정승환 선수는 외국 선수들과 경기에서 빠른 속도와 월등한 실력으로 골을 넣어 ‘빙판 위 메시’로 불린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무엇인가요.
    “베스트 포워드 상을 받은 2009년 체코, 2012년 노르웨이 세계선수권대회도 기억에 남지만 지금도 생생한 경기는 2005년 말에 치른 토리노동계패럴림픽 예선전이에요. 그때 우리나라는 B-pool에서도 약체였는데 결국 3전 3패를 했죠. 팀은 졌지만 제가 국가대표 자격으로 나간 첫 패럴림픽이었고 제가 골을 넣었거든요. 그 장면은 지금도 또렷하게 떠올라요. 개인적으로 의미가 컸던 경기예요.”

    아이스하키 입문 2년 만에 국가대표

    누가 봐도 호감형인 정승환 선수는 “운동하고 나서 성격이 바뀌었다”며 장애인들에게 운동을 권했다. 경기 이천시 대한장애인체육회 이천훈련원에서 상체 근육을 단련하는 정 선수. [사진 제공 · 대한장애인체육회]

    누가 봐도 호감형인 정승환 선수는 “운동하고 나서 성격이 바뀌었다”며 장애인들에게 운동을 권했다. 경기 이천시 대한장애인체육회 이천훈련원에서 상체 근육을 단련하는 정 선수. [사진 제공 · 대한장애인체육회]

    정 선수가 처음 운동을 시작한 건 2004년이다. 그해 경기 평택시 국립한국복지대에 입학한 정 선수는 우연히 친해진 이종경, 장종호 선수가 아이스하키를 권해 재미로 시작했다. 제대로 된 운동을 처음 접한 그는 당시 다른 선수들로부터 “길어봐야 한두 달”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체력도, 근성도 부족했다. 하지만 지금은 팀 내 ‘에이스’로 꼽히며 이들과 함께 국가대표로 뛰고 있다.

    취미로 시작했는데 어떻게 직업 선수로까지 뛰게 됐나요.
    “고등학생 때까지 섬에서 살았기 때문에 대학 와서 아이스링크를 처음 봤어요. 모든 게 마냥 신기하더라고요. 호기심이 컸죠. 형들이 재미있다고 하니까 가벼운 마음으로 해봤는데 정말 힘들었어요. 썰매를 타고 질주하다 허리를 돌려 멈춰서야 하거든요. 몇 번 하고 나니 옆구리가 너무 아프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고 형들이 얼마 못 갈 거라고 놀리기도 했죠.(웃음) 그때 국가대표팀을 이끌던 이영국 감독님을 만났어요. 제겐 평생의 은사 같은 감독님이에요. 2005년 초 열린 토리노동계패럴림픽 아시아 예선 일본전을 감독님 덕분에 스태프로 따라갔는데 우리나라가 3-0으로 졌어요. 연습할 때 아주 커 보이던 형들이 지니까 욕심도 생겼고, 꼭 일본을 이기리란 다짐에 본격적으로 아이스하키를 시작하게 됐죠.” 

    시작한 지 2년 만에 국가대표가 됐는데, 타고난 운동 실력이 있던 것 아닌가요.

    “전혀요. 운동이란 걸 해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일단 경기장에 들어가면 마인드가바뀌어요. 같이 운동하는 선수 모두 대기실에서는 농담도 많이 하고 화기애애하지만, 경기장에만 들어가면 형, 동생도 없거든요.(웃음) 선수들이 22세에서 48세까지 연령층이 다양한데, 아이스하키 시작하고 몇달 만에 국가대표가 된 경우도 있어요. 장애 시기가 다르고, 운동을 시작한 시기도 달라서 단순 비교할 수는 없어요. 장애인 선수에겐 실력도 실력이지만 열정이 더 중요하다고 봐요.”
     
    ‘빙판 위 메시’ ‘로켓맨’이란 별명이 붙은 이유를 알겠네요. 별명은 마음에 드나요.

    “감사하죠. 축구도 좋아하는데 메시에 비유해주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에요. 저희끼리 있을 때는 ‘내가 키가 작아서 메시냐’라며 우스갯소리로 했지만요.(웃음) 속도가 빠른 건 아무래도 신체적인 한계를 극복하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미국이나 캐나다 등 해외 선수들은 체격이 크니까 힘으로 상대하기보다 빠르게 벗어나 골을 넣는 전략이 필요했고, 그러려면 속도가 빨라야 하니까요.” 

    현재 세계랭킹 1, 2위인 미국과 캐나다를 꺾을 자신이 있나요.

    “우리나라 팀이 조직력이 더 좋고 홈경기 이점도 있어 아마 미국이나 캐나다도 일방적으로 경기를 이끌지는 못할 거예요. 사실 미국, 캐나다를 상대로 승리를 점치는 것만으로도 기적이죠. 우리나라 아이스링크장은 100개도 안 되는데 캐나다는 7000개가 넘어요. 한때 우리 선수들은 새벽에만 링크장을 쓸 수 있을 정도로 환경이 열악했어요. 캐나다는 선수층도 청소년 리그, 성인 리그로 나뉘어 있을 정도로 두텁죠. 캐나다 팀 코칭스태프가 우리를 ‘도깨비 팀’이라고 부를 정도예요. 선수도 몇 명 없는데실력은 만만치 않다고요. 우리는 사실 평창동계패럴림픽 하나만 보고 만들어진 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그래서 이번 패럴림픽 금메달이 절실합니다.”

    다섯 살 때 예기치 못한 사고 겪어

    [김도균 기자]

    [김도균 기자]

    인터뷰 내내 정 선수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대답 도중에 농담을 종종 섞어 집중하게 만들었다. 원래 운동하는 사람이 성격도 좋고 유머러스하다지만 정 선수는 확실히 인간적인 매력이 넘쳤다. 장애와 관련해 질문하기 어려워하자 도리어 “편하게 말씀하세요. 하도 말해서 이제는 아무렇지 않아요”라며 긴장을 풀어줬다. 

    어린 시절 사고는 어떻게 해서 일어났나요.
    “전남 신안군이 고향이에요. 다섯 살 때였는데, 부모님은 일 나가시고 형과 누나는 학교에 갔어요. 토요일이라 유치원만 문을 닫아 홀로 집에 있어야 했죠. 심심하니까 집 밖으로 나가 공사장에 앉아 있었는데 상수도 파이프가 굴러떨어져 오른쪽 다리가 깔렸어요. 일단 섬에 있던 보건소에서 응급처치를 하고 목포 병원으로 갔는데 광주 종합병원으로 가라고 했고, 결국 서울 종합병원으로 옮겨야 했어요. 한 이틀 걸렸던 것 같아요. 병원에서는 손쓸 수 없는 상태라고 했어요. 7시간 안에만 왔어도 절단은 안 했을 거라며 안타까워했죠.” 

    본인뿐 아니라 부모님도 힘들었겠어요.
    “지금 어머니만 살아 계시는데, 두 분 모두 그때 집에 혼자 놔둔 걸 미안해하셨어요. 지금이야 웃으며 말하지만, 그때 수술하고도 8개월간 더 입원해 있을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어요. 형과 누나는 친척에게 맡기고 부모님이 서울에서 저를 돌봐주셨죠. 병원비도 많이 들고 여러 가지 현실이 꽤 힘들었어요. 그래도 아버지는 드러내지 않으셨어요. 자라면서 의족을 계속 바꿔야 해 광주 종합병원까지 매번 가야 했어요. 그때마다 아버지 손을 잡고 갔는데, 저한테 무척 잘해주셔서 지금까지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학창 시절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나요.
    “섬에서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다녔어요. 반이 하나밖에 없어 친구들이 그대로 진급했죠. 사정을 다 잘 아니까 저를 많이 위해줘 어려움은 없었어요. 그런데 친구들끼리 운동하는 걸 보고만 있는 게 너무 싫었어요. 특히 수영이 그렇게 하고 싶더라고요. 다들 바다에 뛰어들고 제가 옆에서 무척 하고 싶어 하니까 아버지가 ‘의족 끼고 들어가도 돼’라며 물에 넣어주셨어요. 그다음 날 바로 의족이 고장 나 새로 맞춰야 했죠.(웃음) 물론 벗고 들어가도 되지만 어린 마음에 다리를 보여주기 너무 싫어 결국 그렇게 하지 못했어요.” 

    대학에서는 무엇을 전공했나요. 
    “국립한국복지대 영상디자인학과 04학번이에요. 입학 후 6월부터 본격적으로 아이스하키를 시작하면서 수업에 들어가지 못해 교수님들에게 정말 죄송해요. 사실 학교를 그만두고 싶었지만, 기숙사에 살아야 운동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계속 다녔죠. 졸업하고 나서는 강원도청 소속 선수로 뛰게 돼 지금까지 쭉 춘천에 살고 있어요. 20대는 정말 아이스하키에 다 걸었어요.” 

    평창동계패럴림픽 이야기만 나오면 정선수의 눈빛이 반짝였다. 모두에게 올림픽은 꿈의 무대지만, 그에게 패럴림픽은 의미가 다른 듯했다. 정 선수는 “20대를 통째로 아이스하키에 쏟아부을 수 있었던 건 평창에서 동계패럴림픽이 열리기 때문”이라며 “이번에 반드시 메달을 목에 걸겠다”는포부를 드러냈다. 같이 뛰는 선수들 중에는평창대회를 끝으로 은퇴를 선언한 이도 많다. 하지만 정 선수는 아직까지 평창동계패럴림픽 이후를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대회 준비에 여념이 없다.

    시작부터 지금까지 평창 금메달이 꿈

    [김도균 기자]

    [김도균 기자]

    아무리 즐거운 일이라도 직업이 되면 싫어진다고 하는데, 정 선수는 그렇지 않나요.
    “직업이 되고 나니 힘든 시기도 왔어요. 실력이 정체되고 성적은 왔다 갔다 했죠. 그런데 경기는 즐겨야만 이길 수 있더라고요. 처음에는 링크 안에서 자유롭게 뛰는 게 좋았고 그 생각 하나로 경기에 임했기 때문에 좋은 성적이 나왔죠. 그때 생각을 하면서 마음을 다잡았어요. 사실 아직까지 경기가 즐거워요. 외국 선수들이 보디 체킹(몸을 부딪치는 것)을 많이 하고 스코어가벌어지면 패널티를 받더라도 반칙을 해요. 그러면 저는 ‘하려면 해라. 넘어져도 먼저 일어나면 된다’며 독기를 품고 경기하죠.” 

    운동선수에게 30대는 좀 다를 것 같은데, 경기를 해보면 어떤가요.
    “선수마다 실력 차이가 나서 나이가 많을 수록 경기력이 떨어진다고 볼 수는 없어요. 그런데 개인적으로 보면 20대 때 경기력이 좋긴 했어요. 체력이 해가 갈수록 달라지거든요. 다섯 경기를 뛰면 네 번째부터는 정신력으로 버텨요. 회복 속도도 다르죠. 20대 때는 그런 걸 몰랐는데 요즘 좀 느껴요.” 

    장애를 갖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하고픈 조언이 있다면.
    “운동하면 좋겠어요. 일단 시작하면 성취감이 생기고 사회생활을 하기도 좋아요. 저도 아이스하키 이외에 알파인 스키, 외발 스키 등 동계 종목과 창던지기, 펜싱, 조정 등 하계 종목에 도전했는데 레저로 즐기기에 모두 좋더라고요. 운동하면서 성격도 많이 바뀌었어요. 그 전까지는 내성적이고 말 없는 우울한 아이였어요. 다리 하나 때문에 부정적이었고, 사람들이 질문하는 게 너무 싫었죠. 형들도 ‘승환이 운동 시작하고 석 달 동안 말하는 걸 못 봤다’며 지금까지 놀려요.(웃음) 예전에 라커룸이 없어 링크장 밖에서 장비 벗고 옷을 갈아입을 때 꼬맹이들이 와서 ‘저 삼촌은 다리가 하나, 이 삼촌은 다리가 두 개 없네’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당시에는 위축됐는데 지금은 그런 애들이랑 장난칠 정도로성격이 변했어요.” 

    평창동계패럴림픽 이후 계획은 무엇인가요.
    “평창이 3수 끝에 개최지로 결정됐잖아요. 탈락될 때마다 내심 기뻤어요. 연습할 시간이 늘어나니까요. 그만큼 평창동계패럴림픽은 제 평생의 꿈이에요. 사실 평창 이후는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마음 같아서는 할 수 있는 한 선수로 뛰고 싶어요. 지금은 강원도청의 지원 아래 관심을 받으며 운동하지만, 평창동계패럴림픽 이후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죠. 은퇴 후 지도자로 나설 예정인 선수들도 있는데 장애인 아이스하키 클럽이 더 생겨나 평창동계패럴림픽을 계기로 아이스하키를 하는 장애인이 더 늘어났으면 좋겠어요.” 

    마지막으로 국민에게 한마디 한다면. 
    “패럴림픽에 가장 필요한 건 관심이에요. 국가대표 선수 39명 모두 대단한 분들이에요. 장애를 극복하고 운동을 통해 해외선수들과 경쟁하는 것만으로도 존경스러워요. 평창동계올림픽이 끝나더라도 패럴림픽에 대한 관심을 끝까지 가져주셨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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