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4월 17일.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이상(1910~1937, 본명 김해경)이 태어났다. 탄생 100주년, 그간 수많은 연구에도 이상의 정체는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여전히 그의 문학에 대해서는 그가 남긴 본문보다 훨씬 많은 해석과 주석이 붙고, 그가 살았던 짧은 삶을 놓고도 수식과 설명이 수없이 이어진다. 그는 희대의 천재가 되기도 하고, 전위적인 실험주의자가 되기도 한다. 그가 철저히 19세기를 거부한 반(反)전통주의자였다고 지목하는 사람도 있고, 그의 시가 1920년대 이후 일본에서 일어났던 신감각파 시운동의 영향권에 있었다고 평가절하하는 사람도 있다.
이상의 짧은 생애는 인간의 삶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극적인 요소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그의 삶과 문단 활동은 객관적으로 서술되기보다 오히려 과장하거나 신비화되고 있다. 특히 문단 진출 과정, 특이한 행적과 여성편력, 도쿄에서의 죽음 등은 불행한 천재의 삶의 단면을 보여주는 일화처럼 이야기되고 있을 뿐이다. 더군다나 그의 문학 텍스트 자체도 이러한 삶의 특징과 결부돼 잘못 해석되거나 왜곡 과장된 경우가 허다하다.
‘조선과 건축’에서 시 창작 활동 시작
아직 그의 필명 ‘이상(李箱)’의 유래조차 속 시원히 드러나지 않았지만 여러 정황을 살펴본 결과, 이상이라는 필명을 경성고등공업학교 시절부터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찍이 시인 김기림은 “조선총독부 건축기사 시절 공사장에서 어느 인부가 그를 (일본식 호칭인) ‘이상~’ 하고 부른 것을 존중해” 필명을 얻게 됐다고, 1949년 발간된 ‘이상선집’에서 밝힌 바 있다. 하지만 경성고등공업학교 졸업사진첩에 수록된 “보고도 모르는 것을 폭로(曝露)식혀라! 그것은 발명(發明)보다 발견(發見)! 거기에도 노력(努力)은 필요(必要)하다. 이상(李箱)”이라는 자필 문구에 ‘이상’이라는 필명이 적혀 있어 김기림의 지적은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특이한 필명은 이상의 친구였던 화가 구본웅에게 선물로 받은 화구상자(畵具箱子)에서 연유했다는 증언이 있다. ‘이상(李箱)’이 ‘오얏나무 상자’라는 뜻으로 풀이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상이 본격적으로 시 창작 활동을 한 것은 1931년 조선건축회 월간지 ‘조선과 건축(朝鮮と建築)’에 일본어로 시를 발표하면서다. 이 잡지에 시 ‘이상한 가역반응(異常ナ可逆反應)’을 비롯, 연작시 형태로 쓴 ‘조감도(鳥瞰圖)’와 ‘삼차각설계도(三次角設計圖)’ 등이 실렸다. 1922년 6월에 창간한 ‘조선과 건축’은 일본인 건축기술자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조선건축회의 전문 학회지로서 매달 발간됐다.
이상은 1929년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수석 졸업하고 학교 추천으로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술사로 취직했으며, 곧바로 조선건축회 정회원으로 들어갔다. 이상의 조선건축회 가입 소식은 1929년 10월 발간된 ‘조선과 건축’ 제5호에 소개됐는데, ‘김해경’이라는 본명과 함께 주소는 경성부 통동 154번지, 근무처는 조선총독부 건축과로 표시돼 있다. 이상은 조선건축회의 회원 자격으로 1929년도 ‘조선과 건축’ 표지그림 디자인 현상공모에 2편의 표지화를 응모했다. 그의 작품은 1등과 3등에 선정됐으며, 1등 당선작은 1930년 1월부터 12월까지 ‘조선과 건축’의 표지화로 활용됐다.
이상은 이 과정을 거치면서 ‘조선과 건축’에 일본어로 쓴 시를 발표했다. 그의 일본어 시들은 정식으로 문단 활동을 하기 전에 이뤄진 습작기의 창작이지만 특이한 시적 상상력과 기법적 실험을 보여주고 있다. ‘선에 관한 각서’를 비롯한 여러 작품은 현대 과학의 발전이라든지 상대성이론 같은 이론의 등장에 관한 상념을 이른바 ‘기하학적 상상력’에 기초해 형상화하고 있다. 몇몇 작품은 1931년 폐결핵을 진단받은 뒤 겪은 정신적 좌절과 죽음의 공포를 시각적 기호로 표상했다. 그리고 당시 사회 현실이나 현대문명의 속성 등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패러디와 몽타주 기법으로 그려낸 ‘열하약도 No.2’ 등도 있다.
실제 경험이 아닌 허구적 소설
이상은 장편소설 ‘12월 12일’을 비롯해 단편 ‘지도의 암실’ ‘휴업과 사정’ ‘지주회시’ ‘날개’ ‘동해’ ‘종생기’ ‘환시기’ ‘단발’ ‘봉별기’ 등을 발표했다. 이 소설들에서 그려내고 있는 삶의 세계는 경험적 자아로서 작가 이상의 실제 삶과 자주 대비됐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소설에 등장하는 ‘나’라는 1인칭 주인공을 작가 이상으로 규정했으며, 상대역인 여성 주인공은 실제 인물인 ‘금홍’이나 ‘변동림’으로 바꿔버렸다.
개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엮어내는 신변적 이야기를 통해 작가가 의도했던 실재성에 대한 환상은 고려하지 않은 채, 허구적 양식으로서 소설의 텍스트 공간을 작가의 경험적 현실로 귀착시킨 것이다. 작가의 내면과 작중인물 성격과의 거리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이러한 접근 태도는 결국 소설 속 이야기를 작가의 실제 이야기로 읽는 오류를 초래했음은 물론이다.
이상의 소설은 도시적 공간에서 이뤄지는 개인의 일상적 삶을 바탕으로 새로운 성(性) 윤리와 그 문제성을 여러 유형으로 서사화하고 있다. 그가 소설을 통해 그려내는 개인의 삶은 대부분 일상의 기본 단위인 하루 동안의 이야기로 압축돼 나타난다. 특히 결혼과 가정이라는 사회제도에 감춰진 성과 욕망을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일상에 숨겨져 있던 성의 문제성을 부각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부여된 남성과 여성의 성 역할을 전복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그 내적 욕망의 해체를 시도했던 것이다.
이상의 시와 소설은 당대 독자층에게 하나의 문단적 스캔들처럼 파문을 던졌다. 그러나 당시 현실의 모순에 대응해 직접적인 변혁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그의 예술적 재능과 문학적 상상력은 그 전위성과 감수성을 이해하고 인정한 몇몇 지인에게만 부분적으로 수긍됐을 뿐이다.
그의 문학에서 볼 수 있는 식민지 근대성 초극 의지는 근래에 와서야 적극적으로 평가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문학에 담긴 기호적 표현의 모호성, 통사적 규범을 넘어서는 언어의 비문법적 결합과 의미 해체, 의식의 흐름에 대응하는 단절적인 산문적 진술 등이 드러내는 특이한 긴장은 아직도 제대로 해명되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세기의 천재라는 찬사에도 이상의 문학과 내면세계는 그 천재성에 가려져 상당 부분 오해되고 있다.
이상의 짧은 생애는 인간의 삶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극적인 요소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그의 삶과 문단 활동은 객관적으로 서술되기보다 오히려 과장하거나 신비화되고 있다. 특히 문단 진출 과정, 특이한 행적과 여성편력, 도쿄에서의 죽음 등은 불행한 천재의 삶의 단면을 보여주는 일화처럼 이야기되고 있을 뿐이다. 더군다나 그의 문학 텍스트 자체도 이러한 삶의 특징과 결부돼 잘못 해석되거나 왜곡 과장된 경우가 허다하다.
‘조선과 건축’에서 시 창작 활동 시작
박태원과 함께한 이상(아래). 동갑내기인 두 청년은 치열하게 예술을 고민했다.
이 특이한 필명은 이상의 친구였던 화가 구본웅에게 선물로 받은 화구상자(畵具箱子)에서 연유했다는 증언이 있다. ‘이상(李箱)’이 ‘오얏나무 상자’라는 뜻으로 풀이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상이 본격적으로 시 창작 활동을 한 것은 1931년 조선건축회 월간지 ‘조선과 건축(朝鮮と建築)’에 일본어로 시를 발표하면서다. 이 잡지에 시 ‘이상한 가역반응(異常ナ可逆反應)’을 비롯, 연작시 형태로 쓴 ‘조감도(鳥瞰圖)’와 ‘삼차각설계도(三次角設計圖)’ 등이 실렸다. 1922년 6월에 창간한 ‘조선과 건축’은 일본인 건축기술자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조선건축회의 전문 학회지로서 매달 발간됐다.
이상은 1929년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수석 졸업하고 학교 추천으로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술사로 취직했으며, 곧바로 조선건축회 정회원으로 들어갔다. 이상의 조선건축회 가입 소식은 1929년 10월 발간된 ‘조선과 건축’ 제5호에 소개됐는데, ‘김해경’이라는 본명과 함께 주소는 경성부 통동 154번지, 근무처는 조선총독부 건축과로 표시돼 있다. 이상은 조선건축회의 회원 자격으로 1929년도 ‘조선과 건축’ 표지그림 디자인 현상공모에 2편의 표지화를 응모했다. 그의 작품은 1등과 3등에 선정됐으며, 1등 당선작은 1930년 1월부터 12월까지 ‘조선과 건축’의 표지화로 활용됐다.
이상은 이 과정을 거치면서 ‘조선과 건축’에 일본어로 쓴 시를 발표했다. 그의 일본어 시들은 정식으로 문단 활동을 하기 전에 이뤄진 습작기의 창작이지만 특이한 시적 상상력과 기법적 실험을 보여주고 있다. ‘선에 관한 각서’를 비롯한 여러 작품은 현대 과학의 발전이라든지 상대성이론 같은 이론의 등장에 관한 상념을 이른바 ‘기하학적 상상력’에 기초해 형상화하고 있다. 몇몇 작품은 1931년 폐결핵을 진단받은 뒤 겪은 정신적 좌절과 죽음의 공포를 시각적 기호로 표상했다. 그리고 당시 사회 현실이나 현대문명의 속성 등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패러디와 몽타주 기법으로 그려낸 ‘열하약도 No.2’ 등도 있다.
실제 경험이 아닌 허구적 소설
이상의 ‘오감도’ 육필 원고.
개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엮어내는 신변적 이야기를 통해 작가가 의도했던 실재성에 대한 환상은 고려하지 않은 채, 허구적 양식으로서 소설의 텍스트 공간을 작가의 경험적 현실로 귀착시킨 것이다. 작가의 내면과 작중인물 성격과의 거리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이러한 접근 태도는 결국 소설 속 이야기를 작가의 실제 이야기로 읽는 오류를 초래했음은 물론이다.
이상의 소설은 도시적 공간에서 이뤄지는 개인의 일상적 삶을 바탕으로 새로운 성(性) 윤리와 그 문제성을 여러 유형으로 서사화하고 있다. 그가 소설을 통해 그려내는 개인의 삶은 대부분 일상의 기본 단위인 하루 동안의 이야기로 압축돼 나타난다. 특히 결혼과 가정이라는 사회제도에 감춰진 성과 욕망을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일상에 숨겨져 있던 성의 문제성을 부각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부여된 남성과 여성의 성 역할을 전복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그 내적 욕망의 해체를 시도했던 것이다.
이상의 시와 소설은 당대 독자층에게 하나의 문단적 스캔들처럼 파문을 던졌다. 그러나 당시 현실의 모순에 대응해 직접적인 변혁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그의 예술적 재능과 문학적 상상력은 그 전위성과 감수성을 이해하고 인정한 몇몇 지인에게만 부분적으로 수긍됐을 뿐이다.
그의 문학에서 볼 수 있는 식민지 근대성 초극 의지는 근래에 와서야 적극적으로 평가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문학에 담긴 기호적 표현의 모호성, 통사적 규범을 넘어서는 언어의 비문법적 결합과 의미 해체, 의식의 흐름에 대응하는 단절적인 산문적 진술 등이 드러내는 특이한 긴장은 아직도 제대로 해명되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세기의 천재라는 찬사에도 이상의 문학과 내면세계는 그 천재성에 가려져 상당 부분 오해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