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가 도입하기로 결정한 미국의 미사일방어(MD)체계 PAC-3 MSE.
폴란드가 도입하는 MD체계는 미국 패트리엇 미사일의 최신형인 PAC-3 MSE. 기존 PAC-3보다 사거리가 늘었고 높은 고도에서 미사일 요격이 가능하며 정밀도도 30% 정도 향상됐다. 폴란드는 50억 유로(약 5조8000억 원)를 들여 2017년부터 2025년까지 PAC-3 MSE 8개 포대를 실전 배치할 계획이다. 구매비용은 폴란드 역사상 최대 규모다. 미국 정부는 폴란드 안보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집단 방어에 대한 미국의 공약은 굳건하다고 강조했다.
오랜 악연, 다른 정체성
반면 러시아 정부는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폴란드는 1999년 동유럽 국가 가운데 가장 먼저 NATO에 가입한 바 있다. 발레리 게라시모프 러시아 총참모장은 “미국의 MD체계를 도입하는 비핵 국가들은 러시아의 선제적 대응 대상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러시아는 그동안 NATO가 유럽에 구축 중인 MD체계를 자국 핵전력에 대한 위협이라고 주장하며 반대해왔다. 모스크바의 눈으로 보자면 폴란드의 PAC-3 MSE 배치는 ‘러시아판 쿠바 미사일 위기’인 셈이다.
폴란드는 러시아의 전신인 옛 소련과 오랫동안 악연을 맺어왔다. 폴란드는 1932년과 34년 소련 및 나치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했지만, 소련과 독일은 39년 6월 상호불가침조약을 체결하면서 폴란드와 발트 3국 등을 각각 분할해 통치한다는 비밀의정서(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를 맺었다. 이에 따라 나치 독일은 39년 9월 1일 폴란드 서부 지역 국경을 넘었고, 2주 후에는 소련이 폴란드 동부를 침략했다. 이후 영국과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선전포고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나치 독일은 소련과의 불가침조약을 깨고 폴란드의 소련 점령 지역까지 모두 차지했으며 소련으로 진격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4년 8월 폴란드 저항세력이 수도 바르샤바에서 나치 독일의 점령에 맞서 무장투쟁을 벌였다. 하지만 당시 소련군은 바르샤바 인근까지 진출했음에도 폴란드 저항세력을 지원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나치 독일의 무자비한 보복으로 폴란드인 20만 명이 학살당하고 바르샤바는 잿더미가 됐다. 전쟁이 끝난 뒤 폴란드에 공산당 정부를 세울 속셈으로 수수방관한 것이었다.
소련군은 1945년 1월 바르샤바에 입성해 해방군이 됐으며, 47년 폴란드에 공산당 정권을 세우고 사실상 간접적으로 통치했다. 폴란드가 냉전시절 소련이 지배하던 동구권에서 공산당의 일당 독재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가장 적극적으로 벌인 것도 이 때문이다.
폴란드는 유럽 남서부와 북동부를 잇는 전략적 요충지인 데다 국토의 75%가 해발 200m 이하 대평원이어서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주변 열강의 침탈을 받아왔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과 소련이 폴란드를 차지하고자 각축전을 벌였던 것도 이 때문이다. 폴란드는 러시아와 언어, 혈통이 같은 슬라브 계통이지만 사회·문화적 정체성은 상당히 이질적이다. 폴란드 국교는 슬라브 국가들과 달리 가톨릭이고 문자도 라틴 알파벳(로마자)을 사용한다.
특히 폴란드는 러시아의 안보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선 친(親)서방 노선을 선택하는 게 최선의 방책이라고 판단한 듯하다. 미국과 러시아 간 신(新)냉전체제가 본격화하면서 ‘양다리 전략’을 쓰기에는 너무 위험하다는 판단에서다. 폴란드는 소련과 나치 독일 사이에서 양다리전략을 쓰다 실패한 만큼, 이번에는 분명히 한쪽을 선택했다고 볼 수 있다. 현재 유럽의 안보 구도는 미국이 주도하는 NATO와 러시아가 충돌하는 상황이다. 지정학적으로 두 세력의 중간에 위치한 폴란드는 NATO가 버팀목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인계철선이 필요하다”
폴란드 국민은 대통령선거에서도 반(反)러시아 성향의 후보를 선택했다. 5월 24일 치른 대통령 결선 투표에서 야당인 법과 정의당(PiS)의 안제이 두다 후보가 집권 여당인 시민강령(PO)의 브로니스와프 코모로프스키 현 대통령을 제치고 승리한 것. 8월 취임할 두다 당선인은 43세로, 폴란드가 공산주의 체제에서 벗어난 1989년 이후 가장 젊은 대통령이다. 폴란드 남부 도시 크라쿠프 출신으로 야기엘론스키대에서 법학을 전공한 후 변호사로 활동하던 두다 당선인은 법무부 차관과 레흐 카친스키 전 대통령의 비서관을 역임했다.
두다 당선인의 승리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우크라이나 사태에 따른 국민의 안보 불안이 한몫했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두다 당선인은 NATO군의 폴란드 주둔을 강력하게 추진하겠다는 공약을 제시했다. NATO군 주둔은 러시아가 폴란드를 침략할 경우 NATO가 자동 개입할 수 있는 ‘인계철선’이 될 수 있다. 폴란드는 내각책임제로 총리가 국정을 총괄하지만, 대통령은 군 통수권자로서 외교안보정책에 의견을 개진하고 법률안 제출과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앞으로 MD체계가 폴란드에 본격적으로 구축되면 미국과 러시아의 관계는 더욱 악화될 것이 분명하다. 미국은 지난해 10월 루마니아 데베셀루에 미사일 방어기지를 완공하고 지상발사용 SM-3 요격미사일과 AN/SPY-1 위상배열 레이더 및 지휘통제시설을 배치했다. 데베셀루 기지는 루마니아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남서쪽으로 120km에 있고, 흑해로부터는 300km 떨어져 있다.
루마니아에 이어 폴란드에도 MD체계가 구축되면 미국은 러시아를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게 된다. 그만큼 러시아로선 폴란드와 루마니아의 MD체계가 눈엣가시가 될 수밖에 없다. 미국과 러시아라는 두 고래 싸움에 폴란드의 선택이 앞으로 어떤 변수로 작용할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