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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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란 기성세대에 반기 드는 것

히피 무브먼트

  •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noisepop@daum.net

    입력2014-09-29 10: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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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중문화란 기성세대에 반기 드는 것

    1969년 8월 우드스톡 페스티벌에 모여 음악을 즐기는 히피들.

    인터넷상에서 언젠가부터 ‘개인적으로’라는 말이 많이 보인다. 불필요한 논쟁이나 시비를 피하려고 ‘개인 의견일 뿐이니 태클 걸지 말라’는 메시지를 담은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익명 공간인 인터넷에서조차 ‘개인적으로’라는 익명의 방패 안에 숨는 문화가 득세하는 경향은 대중문화 발전에도 좋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대중문화란 언제나 기존 경향과 기성세대에 노골적인 반기를 들며 새로운 깃발을 세우곤 했다. 기존 문화가 채워주지 않는 무언가에 대해 갈증을 느끼던 사람들을 핵심 지지자로 끌어모으면, 이들은 새로운 문화 전파자가 돼 여름날 태풍처럼 문화의 바다를 헤집는 원동력이 되곤 했다.

    1960년대는 대중문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로 평가받는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피폐해졌던 서구 경제가 다시 활황기로 접어들던 그때 비틀스가 세상을 정복했고, 인류는 달을 정복했으며, 초강대국 미국은 베트남이라는 ‘약소국’과의 전쟁에서 사실상 패배를 맛봤다. 명분 없는 전쟁에 반대하는 베이비붐 세대의 움직임은 미국 내에서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동부(뉴욕) 중심의 프로테스탄트 포크 무브먼트와 UC버클리에서 발현해 캘리포니아(서부) 전역으로 확산한 히피 무브먼트다.

    부와 명예 같은 자본주의적 가치를 부정했던 히피는 LSD(환각제 일종)를 비롯한 약물의 힘을 빌려 이성 대신 무의식을 탐험하고 그 안에서 진리를 발견하고자 했다.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 대신 자신들의 공동체를 만들어내려고도 했다. 당시 서구 정신문화에 강력한 영향을 행사하던 젠(禪)을 바탕으로 형성된 히피들은 인간성 회복과 자연으로의 회귀를 외치며 슈트와 넥타이를 벗어던졌다.

    그 대신 그들의 패션에 직접적 모티프가 된 건 아메리카 원주민 복장이었다. 술과 프릴 소재가 과도할 만큼 적극적으로 사용됐다. 평화를 상징하는 꽃은 헤어밴드와 셔츠에 일종의 서명처럼 쓰였다. 개인 지향성을 이토록 강하게 드러낸 패션은 일찍이 존재하지 않았다. 테디 보이 등 기존의 하위문화 패션이 상류층을 동경하는 노동계급 청년의 열망을 담아냈다면, 히피는 사회와 분리된 개인의 내면을 의상에 반영했던 것이다.

    음악 역시 무의식이란 내면의 확장에 주안점을 두고 발달했다. 음향기술 발달은 전기기타의 표현 영역을 확장했고, 정제된 음악 이론이 아닌 즉흥성과 환각 상태에서의 영감이 표현의 주된 무기가 됐다. 현재까지도 몽롱한 분위기의 음악에 주로 쓰는 사이키델릭이 바로 이때 만들어졌다. 광기를 극단까지 몰고 갔던 짐 모리슨의 도어스, 록 역사상 최초의 헤로인 재니스 조플린, 기타의 신 지미 헨드릭스가 그 주인공들이다.



    히피 문화의 정점은 1969년 8월 열렸던 우드스톡 페스티벌이었다. ‘사랑의 여름’이라 불리던 그해, 예상 인원 5만 명을 아득히 초과한 40만 인파가 페스티벌이 열린 야스거 농장으로 몰려들었다. 거대한 혼돈 그 자체였음에도 미국 전역에서 모인 히피들은 사랑과 평화를 외치면서 약에 취하고, 누드 선탠을 즐겼으며, 공연에 몰입했다.

    사랑의 여름은 다시 오지 않았지만 히피의 유산은 지금도 유효하다. 히피 룩은 지금도 런웨이에서 종종 보일 만큼 현대 패션의 주요 모티프가 됐다. 사이키델릭은 레드 제플린과 핑크 플로이드로 대표되는 1970년대 록의 뿌리다. 물론 뉴욕과 런던, 서울에 이르기까지 지금도 종종 보이는 사조이기도 하다. 어떤 의미에선 21세기 현재까지 가장 강력하게 남아 있는 60년대 유산이 히피 무브먼트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반발을 두려워했다면, 자아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면, 아마 히피는 그저 과거의 단어에 머물고 말았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개인이다. 개인의 합이 바로 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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