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의 보물 창고는 한국이라는 현실이다. 우스꽝스러운 비유지만 사실이 그렇다. 최근 화제가 됐던 영화 대부분이 실화를 소재로 했다. ‘도가니’ ‘변호인’ 등이 그렇고, 역사도 넓은 범주에서 실화로 볼 수 있다면 외연은 더 커진다. ‘광해’ ‘명량’ ‘역린’ 등 거의 모든 작품이 사실이란 뼈대에 허구의 살점을 얹었기 때문이다.
‘제보자’ 역시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임순례 감독은 이미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우생순’)에서 실제 이야기를 영화화한 바 있다. 한국 여자핸드볼 국가대표 선수들이 눈물겨운 승부 끝에 은메달을 딴 스토리였으니 말이다. ‘우생순’에 비하면 ‘제보자’의 소재가 되는 실화는 스캔들이라는 보통명사가 더 적합할 듯싶다. 제보라는 명사의 은밀함이 암시하듯, ‘제보자’는 한때 한국 사회를 휩쓸었던 황우석 사태를 담고 있다.
황우석 사태는 아직껏 개운치 않은 뒷맛이 남아 있는 최근 사건이다. 난자 불법매매 의혹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믿기 힘든 대국민 사기극으로 드러났으니 말이다. 황우석 사태에 대한 난감함은 이 범죄에 국민 모두가 조금씩 힘을 보탠 데서도 온다. 과장을 부풀린 언론도 문제였고, 과학이란 고급 용어 앞에 조아린 대중도 무책임했으며, 경제적 가치라는 말에 무조건 추켜세운 정부도 자유롭지 못했다.
‘제보자’는 제법 스케일 있는 대중영화답게 현대적 영웅 탄생기라는 장르적 문법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여기서 영웅은 진실과 정의를 지키려고 악과 맞서 싸우는 언론인이다. 제보자의 용기를 사회 변화의 실체로 바꿔준 것이 바로 영화 속 언론이다. 박해일이 연기하는 방송사 PD는 우리가 바라는 이상적 언론인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제보자’가 문제와 충돌하고, 그것을 해결해나가는 방식은 사실 그다지 새롭지 않다. 영화 ‘제보자’에서 흥미로운 것은 이 낡고 익숙한 장르적 문법이 아니라 신선한 재연 효과다.
한국 시민의 공통점 중 하나는 빠른 망각 능력이다. 물론 망각도 능력이다. 상처가 깊고, 고통이 많을수록 망각은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 문제는 그 능력이 너무 자주 발휘된다는 것이다. 4월 발생한 세월호 사고에 대한 감각도 서서히 무뎌지는 지금, 10년 전 황우석 사태는 사건 추이조차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오래된 추문이다. ‘제보자’는 이 희미해진 기억을 서사적 힘으로 변환해 스피디한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배우들의 연기력을 통해 당시 혼란스러웠던 사건에 대한 판단이 오히려 선명해지는 쾌감을 선사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제보자’가 기대는 지점은 사회적 정의라는 판타지에 대한 카타르시스라고 할 수 있다. 영화 속 윤민철 PD는 ‘변호인’의 송우석 변호사와 묘하게 겹친다. 언론의 의무에 대한 법률 조항을 암송할 때는 법정에서 헌법 가치를 설파하던 송우석 변호사가 떠오른다. 이는 한편 영화 ‘명량’에서 “무관의 충은 무릇 백성을 향해 있어야 한다”던 이순신의 대사와 통하기도 한다.
영화가 판타지라면 지금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바로 이 정의가 아닐까. 영화 속 영웅은 모두 반듯하고, 우리가 요구하는 원칙을 준수하며 살아간다. 문제는 그들 모두 영화 속에만 있다는 것이다.
‘제보자’ 역시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임순례 감독은 이미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우생순’)에서 실제 이야기를 영화화한 바 있다. 한국 여자핸드볼 국가대표 선수들이 눈물겨운 승부 끝에 은메달을 딴 스토리였으니 말이다. ‘우생순’에 비하면 ‘제보자’의 소재가 되는 실화는 스캔들이라는 보통명사가 더 적합할 듯싶다. 제보라는 명사의 은밀함이 암시하듯, ‘제보자’는 한때 한국 사회를 휩쓸었던 황우석 사태를 담고 있다.
황우석 사태는 아직껏 개운치 않은 뒷맛이 남아 있는 최근 사건이다. 난자 불법매매 의혹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믿기 힘든 대국민 사기극으로 드러났으니 말이다. 황우석 사태에 대한 난감함은 이 범죄에 국민 모두가 조금씩 힘을 보탠 데서도 온다. 과장을 부풀린 언론도 문제였고, 과학이란 고급 용어 앞에 조아린 대중도 무책임했으며, 경제적 가치라는 말에 무조건 추켜세운 정부도 자유롭지 못했다.
‘제보자’는 제법 스케일 있는 대중영화답게 현대적 영웅 탄생기라는 장르적 문법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여기서 영웅은 진실과 정의를 지키려고 악과 맞서 싸우는 언론인이다. 제보자의 용기를 사회 변화의 실체로 바꿔준 것이 바로 영화 속 언론이다. 박해일이 연기하는 방송사 PD는 우리가 바라는 이상적 언론인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제보자’가 문제와 충돌하고, 그것을 해결해나가는 방식은 사실 그다지 새롭지 않다. 영화 ‘제보자’에서 흥미로운 것은 이 낡고 익숙한 장르적 문법이 아니라 신선한 재연 효과다.
한국 시민의 공통점 중 하나는 빠른 망각 능력이다. 물론 망각도 능력이다. 상처가 깊고, 고통이 많을수록 망각은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 문제는 그 능력이 너무 자주 발휘된다는 것이다. 4월 발생한 세월호 사고에 대한 감각도 서서히 무뎌지는 지금, 10년 전 황우석 사태는 사건 추이조차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오래된 추문이다. ‘제보자’는 이 희미해진 기억을 서사적 힘으로 변환해 스피디한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배우들의 연기력을 통해 당시 혼란스러웠던 사건에 대한 판단이 오히려 선명해지는 쾌감을 선사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제보자’가 기대는 지점은 사회적 정의라는 판타지에 대한 카타르시스라고 할 수 있다. 영화 속 윤민철 PD는 ‘변호인’의 송우석 변호사와 묘하게 겹친다. 언론의 의무에 대한 법률 조항을 암송할 때는 법정에서 헌법 가치를 설파하던 송우석 변호사가 떠오른다. 이는 한편 영화 ‘명량’에서 “무관의 충은 무릇 백성을 향해 있어야 한다”던 이순신의 대사와 통하기도 한다.
영화가 판타지라면 지금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바로 이 정의가 아닐까. 영화 속 영웅은 모두 반듯하고, 우리가 요구하는 원칙을 준수하며 살아간다. 문제는 그들 모두 영화 속에만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