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9일 열린 인천아시아경기대회 개회식에서 대한민국 선수단이 입장하고 있다.
‘각본 없는 드라마’라는 말처럼, 그동안의 땀이 결실을 맺는 스포츠는 항상 이변이 존재한다. 세계 최고 남자권총 선수지만, 유독 아시아경기대회 개인전 금메달과는 거리가 멀었던 한국 진종오(KT)는 이번 대회 초반 50m 권총과 10m 공기권총에서 연속 결선에 진출하고도 또다시 금메달과 인연을 맺지 못했다. 자기 이름이 걸린 ‘문학박태환수영장’에서 공식 대회 첫 금메달을 따겠다며 스폰서 부재의 악조건 속에서도 고군분투했던 ‘마린보이’ 박태환 역시 연이어 고개를 숙여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승부의 세계에서는 우는 선수가 있으면 웃는 선수도 있게 마련. 여러 종목에서 이변이 속출하는 이번 대회에는 진종오나 박태환처럼 아쉽게 고개를 숙인 선수도 있지만, 남다른 사연과 패기로 대회를 빛내고 있는 새로운 스타도 제법 많다. 인천아시아경기대회를 뜨겁게 달구며 ‘영 파워’를 과시하는 선수들을 모았다.
# ‘활짝 꽃핀’ 우슈 신동 이하성
우슈 장권에 출전한 이하성의 경기 모습.
전국체육대회(전국체전) 고등부에서 1위를 휩쓸며 청소년 대표를 지낸 그는 한동안 부상으로 힘겨워했다. 2년 전 골반뼈 부상으로 4개월간 침대에 누워 있기도 했던 그는 성인 무대 진출 후 난도가 높은 일반부 레벨 프로그램에 적응하지 못해 국내 대회에서조차 상위권에 들지 못하는 등 좌절을 겪었다. 처음으로 성인 무대를 밟은 것은 지난해 전국체전 때였다. 그러나 장권전능에서 곤술 5위, 도술 6위, 장권 4위, 종합 5위에 오르며 중상위권 성적을 거두는 데 그쳤다. 당연히 아시아경기대회 출전은 언감생심 욕심조차 낼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행운이 찾아왔다.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태극마크가 당연하게 여겨지던 베테랑 조승재와 조계용이 작은 실수를 범하면서 이하성에게 기회가 왔고, 그는 하늘이 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번 대회를 앞두고 집중 훈련을 통해 난도 높은 기량을 연마하며 굵은 땀방울을 흘렸다.
중국의 불참으로 금메달이 기대되던 종목이었지만, ‘풋내기’ 이하성이 출전한다는 것에 우려의 시선도 많았다. 하지만 이하성은 끊임없는 노력과 훈련을 통해 성장했고, 결국 장권 종목에서 화려한 연기를 펼치며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하성이 성인이 돼 첫 출전한 국제대회에서 금메달을 딸 수 있었던 것은 남다른 성실함과 겸손한 인성이 뒷받침된 덕분이었다.
# 우상을 넘어선 17세 소년 김청용
남자 10m 공기권총 개인전과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딴 한국의 김청용.
김청용의 롤모델이자 우상은 바로 한국 사격의 간판 진종오. 진종오는 자신의 개인전 금메달이 김청용에게 넘어간 뒤 “새로운 영웅의 탄생을 축하해달라”며 “청용이는 충분히 자격이 있다”고 진심 어린 축하의 말을 건넸다.
사격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 개인택시 운전을 하던 아버지가 의료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등지면서 그는 하늘이 무너지는 큰 슬픔을 겪었다. 어렸을 때부터 가정형편이 넉넉지 않았고, 아버지 사고 이후 어머니가 진상규명에 매달리면서 누나가 생계를 책임졌다. 물질적으로 힘겨운 상황에서도 그는 항상 밝고 긍정적이었다. 어릴 때부터 노점상을 하던 어머니의 잔심부름을 마다하지 않던 착한 심성도 갖고 있었다.
김청용은 “사대에 서서 ‘아버지, 최선을 다할게요’라고 마음속으로 항상 되뇐다”고 했다. 그가 누구보다 강한 집중력과 열정으로 과녁에 몰두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을 위해 희생한 어머니와 누나가 있어서다. 김청용은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욕심이 있다. 어머니와 누나를 호강하게 해주고 싶다는 바람 때문이다. 가족을 위해 과녁을 겨누는 그는 향후 10년간 한국 사격을 이끌어갈 유망주라는 값진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고교 2년생 김청용은 그래서 오늘보다 내일이 더 기대되는 샛별이다.
# 중국 수영 떠오르는 여제 예스원
중국 수영 간판스타는 이번 대회를 기점으로 쑨양에서 ‘떠오르는 여제’ 예스원(18)으로 넘어가는 분위기다. ‘샤오예즈’(작은 잎)란 별명에서 나타나듯 귀여운 외모로도 사랑받는 그는 4년 전 광저우아시아경기대회에서 14세 나이로 개인혼영 200m와 400m를 휩쓸며 천재성을 과시한 뒤 2012 런던올림픽 여자수영 개인혼영에서 2관왕에 오르는 등 일찌감치 명성을 떨쳤다. 개인혼영 400m에서 4분28초43 세계기록을 갖고 있고, 개인혼영 200m에선 2분7초57 올림픽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이번 대회에서도 계영 400m에서 산뜻하게 첫 금메달을 따낸 예스원은 개인혼형 400m에서도 금메달을 추가하며 다관왕에 속도를 내고 있다. 중국 명문 칭화대에서 법학을 전공해 ‘공부하는 수영선수’인 예스원은 런던올림픽 때 워낙 기록이 탁월해 ‘도핑 의혹’까지 제기되며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유치원에 다니던 6세 때 또래에 비해 유달리 체격조건이 좋고 특히 손발이 컸던 그는 주변의 권유로 수영을 시작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고, 광저우대회를 통해 마침내 국제무대에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이번 인천대회는 18세 그가 월드클래스임을 다시 한 번 증명하는 무대가 되고 있다.
# 강력한 MVP 후보 하기노
한국의 마린보이 박태환과 중국 쑨양의 자존심 대결 1라운드로 관심을 끌었던 남자수영 자유형 200m. 이번 대회를 빛낼 하이라이트로 꼽혔던 세기의 자존심 대결 승자는 박태환도, 쑨양도 아니었다.
일본이 자랑하는 ‘신성’ 하기노 고스케(20)였다. 그는 200m 결승에서 1분45초23으로 가장 먼저 터치패드를 찍어 한국과 중국 수영팬들에게는 아쉬움을, 일본 팬들에게는 환희를 선물했다. 자유형 200m 기세를 이은 그는 개인혼형 200m와 400m에서 금메달을 추가하는 등 9월 25일까지 홀로 금메달 4개를 차지하며 아시아 수영계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하기노는 8월 호주 골드코스트에서 열린 팬퍼시픽선수권대회 개인혼영 200m에서 ‘수영 황제’ 마이클 펠프스(미국)를 제치는 등 이미 세계 정상급 선수로 평가받고 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점은 수영선수로는 드물게 ‘만능 플레이어’라는 점. 자유형은 물론 혼영, 배영 등 각 종목에서 모두 탁월한 능력을 자랑한다. 혼영 전문으로 선수 생활을 시작한 그는 타고난 체력과 신체조건으로 각 종목을 석권해나가고 있다.
박태환 하나만 바라보는 한국 수영과 달리 일본의 수영 선수층은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두텁다. 하기노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2012 일본수영선수권 때. 당시 고교생이던 그는 남자 개인혼영 400m에서 일본신기록으로 우승하며 런던올림픽 출전 티켓을 따냈다. 일본에서 고교생이 올림픽에 나선 것은 2000 시드니올림픽 당시 기타지마 고스케 이후 12년 만이었다. 런던올림픽 남자 개인혼영 400m 결승에서 하기노는 자신의 영웅이던 펠프스를 따돌리고 이 종목 역사상 일본에 첫 동메달을 안기며 일약 국민적 스타로 떠올랐다. 이후 자유형에도 도전한 하기노는 2013 일본수영선수권에서 개인혼영 200m와 400m, 자유형 200m와 400m, 배영 100m에서 금메달을 휩쓸며 일본수영선수권 첫 5관왕이라는 신기원도 이뤘다.
지난해 세계수영선수권대회에서 자유형 400m와 개인혼영 200m에서 은메달을 땄던 그에게 이번 인천대회 금메달은 국제대회에서 수확한 첫 금메달이다. 일본 언론은 그의 금메달 소식을 연일 대서특필하며 ‘신성’의 활약에 환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