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미국대사로 내정된 마크 리퍼트 국방부 장관 비서실장(앞줄 오른쪽)이 6월 17일 워싱턴에서 열린 상원 인준청문회에서 의원들의 질문에 답변을 준비하고 있다.
“우리는 중국이 드리우는 도전을 상당히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다. 중국이 진행 중인 군사 행동에 투명성이 부족하다는 점이나 해상 활동의 증가도 염려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중략) 아베 신조 총리의 안보 정책에 전반적으로 만족하고 있다. 특히 한미일 세 나라는 북한과 마주해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 미래지향적 한일관계를 만들어가는 일은 우리의 주요 관심사다.”
2013년 5월 29일 일본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리퍼트 지명자가 남긴 이 말은 역대 최연소 대사를 한국에 보내며 워싱턴이 그리는 그림이 무엇인지 명확히 보여준다. 6월 17일(현지시간) 상원 인준청문회에서 “제재와 군사훈련을 통해 북한 정권을 견제하고 미국이 그들의 행태를 지켜보고 있다는 강력한 신호를 보내야 한다”며 조기경보 레이더를 일본에 추가 배치하는 등 강력한 미사일방어(MD) 체제 구축 의지를 역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중국의 야심과 북한의 위협을 견제하기 위해 한국의 협조를 이끌어내는 것이 그의 임무라는 뜻이다.
튀는 행보와 강한 캐릭터
4월 말 리퍼트 실장의 대사 지명 소식이 전해지자 우리 측 당국자들의 반응은 크게 둘로 갈렸다.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의 딸인 캐럴라인 케네디 주일대사나 민주당 실력자였던 맥스 보커스 주중대사와 격 차이가 크다는 우려와, 북한 도발 같은 위기상황에서 언제든 ‘백악관의 귀’를 잡아챌 수 있는 인물의 부임은 반길 일이라는 기대가 함께 나온 것.
최고 실력자들과 두터운 친분을 유지해온 리퍼트 지명자는 강한 캐릭터로도 정평이 나 있다는 게 워싱턴 인사들의 설명이다. 2009년 10월 백악관 근무 8개월 만에 NSC 부보좌관을 사직하고 아프가니스탄 복무를 자원하게 된 것도 해병대 4성 장군 출신이던 상관 짐 존스 국가안보보좌관과의 불화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로버트 게이츠 전 국방부 장관의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리퍼트 지명자는 대통령과의 친분을 무기로 존스 보좌관의 역할을 제한하는가 하면, 중동 병력 증파 문제를 두고 빚어진 이견을 언론에 흘리는 등 ‘튀는 행보’로 악명을 쌓았다. 그의 지명 소식을 두고 공화당 일각에서 부정적 견해가 흘러나온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작 리퍼트 실장의 대사 지명이 갖는 ‘진짜 의미’는 그 후 쌓아온 경력에서 훨씬 명확히 드러난다. 2012년 4월 전장에서 돌아와 국방부 아시아·태평양 안보담당 차관보에 임명된 그는 지난해부터 척 헤이글 국방부 장관의 비서실장 임무를 맡고 있다. 이후 리퍼트 지명자가 담당해온 업무는 한미일 군사협력 체제 구축과 이 지역에서 미국의 MD 체제를 조속히 완성하는 작업. 4월 17일부터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일 3국 안보토의(DTT)에 미국 측 수석대표로 참석해 회의를 주재하기도 했다. 이 회의에 관여했던 한 인사는 “세 나라 군사협력을 3각 동맹 수준으로 끌어 올려야 한다는 신념이 엿보였다”면서 “단순한 실행자가 아니라 이러한 개념을 직접 설계해 강력히 밀어붙이는 사실상의 당사자”라고 평가했다.
이러한 그의 위상은 미국의 대(對)한반도 정책이 외교나 국제정치보다 군사 분야에 강하게 경도되고 있는 흐름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봉영식 아산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오바마 행정부의 최근 외교안보정책 흐름은 ‘중동은 국무부, 아시아는 국방부’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고 정리했다. 이란과 시리아 등 중동 문제에 대해서는 존 케리 장관을 중심으로 하는 국무부가 주축을 맡지만 아시아, 특히 동북아 문제는 국방부에 사실상 ‘위임’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 국무부 경력이 전혀 없는 국방부 장관 비서실장에게 한국 같은 주요국 대사를 내주는 것은 이러한 배경 없이 설명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1980년대 주한미국대사가 제임스 릴리와 도널드 그레그 등 중앙정보국(CIA) 출신 인물들로 임명된 것과도 흡사하다. 당시 워싱턴이 서울을 ‘어디로 튈지 모르는, 따라서 정보가 중요한 상대’로 봤기 때문에 CIA 출신의 대사를 보냈다면, 오바마 행정부가 한국을 보는 관점은 군사와 안보 이슈가 핵심이기 때문에 리퍼트 실장을 대사로 지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미국의 이러한 접근법 때문에 중국과의 군사적 긴장이 빠른 속도로 고조되고 있다는 사실. 4월 이후 백악관과 의회, 합동참모본부, 태평양사령부, 주한미군사령부까지 사실상 모든 주체가 나서서 한국의 MD 체제 협력을 강하게 주문하고 있는 것이 대표적이다. 핫이슈로 떠오른 THAAD(고고도미사일방어) 체제의 한국 내 배치 문제에 대해 중국 외교부는 “한반도에 미사일방어를 배치하는 것은 지역 안정과 전략적 균형에 이롭지 않다”며 반발한 바 있다.
한일관계 개선에도 적극 나설 듯
미국 하와이 진주만에 정박해 있는 미사일방어(MD)용 해상 기반 X밴드 레이더 SBX-1.
4월 한미정상회담과 5월 아시아안보회의(샹그릴라 대화)를 계기로 급물살을 타고 있는 한미일 군사정보공유 제도화 문제도 관심의 초점으로 떠올랐다. 한국 국방부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일본과의 정보공유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하지만, 2012년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사태의 ‘악몽’이 여전한 상황에서 당국자들 역시 부담을 느끼기는 마찬가지. 한국 측 탐지자산이 확보한 미사일 궤도 정보를 제공받은 일본이나 미국이 요격에 나서는 식의 시나리오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2013년 6월 미 의회 정보조사국(CRS)이 작성한 보고서는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이 3국 MD 체제 구축을 위한 사전조치였다”고 명시한 바 있다. 리퍼트 지명자가 아베 내각의 안보정책에 만족을 표시하며 한일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나선 데 깔려 있는 배경이다.
미국의 MD 체제 관련 압박에 대해 한국 국방부는 “우리가 독자적으로 구축하는 KAMD(한국형 미사일방어) 체제는 미국과 일본이 추진하는 MD와는 별개”라고 강조하고 있다. THAAD 역시 한국은 구매할 뜻이 없고, 다만 미국이 주한미군기지에 이를 배치한다면 반대할 명분이 없다는 것. 6월 18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김관진 국방부 장관은 “기존 패트리어트와 함께 중첩방어가 가능해 북한의 탄도미사일 요격 능력을 향상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며 “THAAD의 제한된 요격 고도를 감안하면 작전범위 자체는 한반도 내로 국한되므로 중국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무기체계 전문가들은 “THAAD에 대한 중국의 격앙된 반응은 요격미사일 자체가 아니라 패키지로 함께 배치되는 AN/ TPY-2 레이더 때문”이라고 말한다. 탐지 범위가 1000km를 훌쩍 넘는 이 레이더는 날아오른 미사일 궤도를 실시간으로 추적할 수 있는 고해상도를 자랑한다. 경기 평택 등 서해 인근 미군기지에 배치될 경우 중국 동북부 일대의 미사일 전력이 미국의 궤도 추적에 고스란히 노출된다는 것.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포함해 자국의 핵전략을 사실상 무력화할 수 있는 레이더 배치를 베이징이 심상하게 받아들일 리 없다는 설명이다. 한 국제정치 전문가의 말이다.
카드가 없는 나라, 한국
5월 31일 싱가포르 샹그릴라 호텔에서 열린 제13차 아시아안보회의에서 김관진 국방부 장관(왼쪽)이 척 헤이글 미국 국방부 장관, 오노데라 이쓰노리 일본 방위상과 악수하고 있다.
대중 포위전략에 한국을 끌어들이려는 미국의 행보와 그에 맞서는 베이징의 몽니가 부딪치면서 동맹의 부담이 배가되는 형국. 그간 박근혜 정부는 ‘하드웨어는 미국과 보조를 맞추면서 소프트웨어 차원에서 중국을 달래는’ 이중전략으로 이에 대응해왔지만 리퍼트의 대사 지명으로 상징되는 강도 높은 동북아정책 군사화 기조가 이를 어렵게 만들고 있는 셈이다. 한 중국 전문가는 “이제는 베이징을 달래려 해도 마땅한 카드가 없다”고 촌평했다.
외교안보 라인 개편 논의로 분주하던 5월 하순, 청와대 일각에서는 ‘중국통’으로 알려진 전직 고위 당국자를 외교부 장관에 기용하는 방안이 거론되고 있다는 소식이 흘러나왔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국가안보실장이나 국가정보원장으로 자리를 옮길 경우, ‘중국과 말이 통하는 인물’을 후임으로 검토 중이라는 이야기였다. 윤 장관 유임과 함께 논의는 물밑으로 가라앉았지만, 최근 상황에 대한 청와대의 고심을 엿보기에는 충분한 소식이었다.
“주한미군이 오늘 당장 싸울 수 있도록 준비하겠다.” 6월 17일 미국 상원 인준청문회장에 나선 리퍼트 지명자의 발언은 대사보다 군 지휘관에 가깝게 들릴 정도였다. 일각에서는 11월 미국 중간선거를 계기로 오바마 행정부에 대한 비판이 고조되면 한반도 정책의 성격도 바뀔지 모른다는 관측을 내놓지만, 공화당이 승리할 경우 ‘중국 포위’라는 기본노선은 한층 강해질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역대 가장 강한 캐릭터를 가졌다는 젊은 주한미국대사가 백악관과 소통하며 서울에서 직접 한국 정부를 압박하는 일이 눈앞에 다가와 있다는 뜻이다. ‘카드가 없는 나라’의 고민 역시 앞으로도 이어질 수밖에 없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