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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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저 물고 태어나는 ‘웬델 家’

3세기 넘게 프랑스 명문가로 자리매김…후손들 부와 명예 보장 ‘부러움 반 시샘 반’

  • 파리=백연주 통신원 byj513@naver.com

    입력2011-01-28 1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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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파리 서부 중심가의 500㎡ 면적, 시가 40억 원의 한 호화 아파트에는 장 모리스(58)라는 문학기자가 살고 있다. 현관문을 열고 집에 발을 들이면 그의 여덟 살 때 모습을 담은 거대한 초상화가 벽 전체를 차지하고 있다. 월 급여로 250여만 원을 받는 문학기자가 어떻게 이런 ‘대저택’을 구입할 수 있었던 것일까. 답은 그의 출신 가문에 있다. 그는 프랑스 역사 이래 유일무이한 최대 기업 ‘웬델’을 소유한 웬델 가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로렌 지방의 한 성에서 태어난 그는 유년시절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성 입구에는 경호원들이 24시간 대기했고 입구에서 성까지 가려면 수십 명의 정원사가 관리하는 웬델 소유의 숲을 지나야 했다. 성 안은 살림을 도와주는 가정부, 집사, 요리사 등으로 붐볐다.”

    웬델 가의 부와 명예는 후손들의 삶을 보장해준다. 장 모리스의 삶도 마찬가지다. 초호화 아파트도 가문에서 그에게 준 선물 중 하나일 뿐이다. 웬델 가에서 태어나면 출생과 동시에 가문의 자녀임을 확인해주는 증명서를 발급받는다. 이 증명서에는 웬델 기업 주식 일부의 소유권도 적혀 있다. 웬델 가 후손은 특별한 활동 없이 매달 1000만 원가량의 주식 수입을 올린다. 이뿐 아니다. 장 모리스는 20년간 일한 기자 생활을 접고 직접 출판사를 열기 위해 집값 비싸기로 소문난 파리 오데옹 오페라 근처에 사무실을 구입했다.

    출생과 동시에 매달 1000만 원 수입

    웬델 가는 개인 사업을 하려는 후손에게는 약 1억 원의 투자금을 추가로 지원해준다. 이런 혜택을 받는 후손만 950여 명이다. 이브 게나르 전 헌법재판소 소장, 프랑수아즈 파나피유 전 시라크 대통령 비서관 등이 웬델 가 사람이다. 경제 권력과 함께 유명인사를 배출하며 프랑스 사회를 장악한 이 가문의 정체는 무엇일까?



    1704년 로렌 지방의 장 마르탱 웬델(Jean Martin Wendel)은 작은 대장간을 운영하던 평범한 남자였다. 프랑스 황실은 실력이 뛰어난 웬델 대장간에 국가에서 필요한 주요 시설과 장비의 제작을 맡겼다. 웬델 가문은 그 노고를 인정받아 1727년 귀족 작위을 받았다. 대장간은 어느새 제철소 규모로 커졌다. 웬델 가문은 루이 15세부터 나폴레옹 때까지 주요 무기 제작을 담당했다. 철도의 탄생은 웬델 가에 천문학적인 수입을 안겼다. 이를 기회로 웬델 가는 프랑스 최대 재벌 기업으로 도약한 것이다. 로렌 지방 역사학자 다비드 도치는 “웬델 가의 위업이 여전히 로렌 지방에 남아 있다. 1850년 대량 주문을 받은 웬델 가는 수만 명의 노동자를 고용했다”고 말했다.

    수만 명의 노동자가 삶의 터전으로 지은 집이 2만4000가구로 늘어나면서 하나의 도시를 형성했다. 웬델 가는 병원, 학교 등 공공기관도 건설했다. 마을 한가운데 만들어진 성당 내부에는 ‘WD’라는 웬델 가의 상징이 중앙 벽에 새겨져 있고 벽이나 유리에는 웬델 가 선조들의 자화상이 그려져 있다. 이는 당시 웬델 가의 권력이 종교 이상으로 막강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도치 박사는 웬델 가의 권력이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했다.

    금수저 물고 태어나는 ‘웬델 家’

    웬델 가의 자손 950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장 모리스 남작. 카르나발레 박물관 내부(위부터).

    “노동자를 위해 만든 주택은 줄고 제철소의 고위 간부, 전문 기술자를 위한 집만 지어졌다. 웬델 가는 노동자와 간부의 주택을 멀리 떨어진 곳에 건설해 계층을 구분했다.”

    웬델 가 소유의 학교는 노동자와 간부의 아이를 구분해 가르쳤고, 병원은 노동자 모두의 개인 신상정보를 파악해 건강 상태는 물론 웬델 가에 대한 충성심까지 관리했다. 웬델 가가 만든 도시는 철저한 피라미드식 계층 구분 시스템에 따라 움직였다. 웬델 가는 1925년 제철업에 이어 전자와 화학 분야까지 손을 뻗으며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파리 카르나발레 박물관은 웬델 가의 부와 명예를 잘 보여준다. 박물관의 쾌적한 응접실의 천장은 순백금으로 칠해져 있고 벽면에는 고가의 예술품이 가득했다. 마치 작은 베르사유 궁전 같았다.

    웬델 가 11대손 크리스티앙 시릴은 “현재 박물관으로 써 모두에게 공개했지만 과거에는 증조할아버지인 모리스 웬델 부부가 거주했던 저택이다. 호화로운 응접실은 두 사람이 친구들을 초대해 파티를 열던 피로연장이다”고 말했다.

    모리스 웬델 부부는 예술에 관심이 많아 세계적인 작품을 수집했다. 응접실에는 눈에 띄는 그림 한 점이 있는데 모리스 웬델 부인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유명화가가 전설적인 인물인 사바 여왕의 초상화를 흉내 내 사바 여왕 대신 모리스 웬델 부인의 얼굴을 그린 것이다. 황실에 버금가는 삶을 살았던 그들의 힘을 여실히 보여준다.

    철저한 단속으로 대물림되는 권력

    1871년 웬델 가의 일원인 조세핀은 영원한 권력을 보장하기 위해 가법을 세웠다. 웬델 가문의 직속 후계가 아닌 타인은 기업의 어떤 부분에도 관여할 수 없고 이윤을 거둬들일 수 없게 만들었다. 또 후손들을 유럽 귀족집안 자녀들과 결혼시켜 권력동맹을 맺어나갔다. 17, 18세기 백작, 남작들과 혼인 관계를 이뤘던 웬델 가는 오늘날에도 대기업, 정계 인사들과 사돈을 맺으며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30대 초반에 프랑스 한 통신회사의 중역으로 일하는 파니는 이런 결혼으로 웬델 가의 후손이 됐다. 그는 그리스 전 국무총리의 손녀로 최대 재벌가의 일원이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이렇게 말했다.

    “남들이 어떻게 볼지 모르지만 300년 넘게 한 가문의 부와 명예가 지속된다는 것 자체가 대단하다. 세계를 뒤져보아도 12, 13대까지 꾸준히 이어지는 재벌 명가는 찾기 힘들다.”

    프랑스 경제 전문가들은 웬델 가의 막강 파워가 앞으로도 오래 지속될 것이라 전망한다. 앞서 길을 닦아놓은 선조의 길을 후손들이 큰 실수 없이 따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돈 걱정 없이 수십억 원 하는 아파트를 구입하고, 일하지 않으면서 보통 사람 월급 3배 이상의 수입을 거둬들이는 주식 부자들을 보는 프랑스 국민들은 씁쓸하다. 유례없는 실업률과 물가상승에 시달리는 그들과 대비되기 때문이다.

    대단한 부귀영화에도 출발점은 있다. 화려한 웬델 가도 작은 마을 대장간에서 밤낮으로 일했던 평범한 장 마르탱 웬델 덕에 가능했다. 어쩌면 우리도 수백 년 뒤 후손들에게 권력을 물려줄 찬란한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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