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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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펑 쏟아진 포탄 해병대도 죽고 민간인도 죽고 숨 막히는 공포만 남았다

연평도 현지 르포 / 주민들 육지로 탈출 국민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변해

  • 연평도=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입력2010-11-26 17: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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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펑펑 쏟아진 포탄 해병대도 죽고 민간인도 죽고 숨 막히는 공포만 남았다
    전쟁이었다. 하늘에선 포탄이 수십 발 떨어졌고, 정든 집은 처참하게 무너졌다. 두 차례에 걸친 북한의 무차별 공습에 20대 초반 해병대원 2명의 몸은 산산조각이 났고, 해병부대 공사장에서 일하던 60대 인부 2명도 눈 깜짝할 사이에 검붉은 주검이 됐다. 늑골이 부러지고 고막이 파열되는 등 부상을 당한 민간인 6명은 병원에 입원했다. 가옥과 시설물, 저 멀리 언덕배기에서는 화염이 솟구쳤다.

    11월 23일 오후 2시 34분. 북한은 연평도에서 북쪽으로 10km 떨어진 무도 해안포 기지에서, 연평도 K-9 자주포 부대 방향으로 해안포 100여 발을 발사했다. 기습이었다. 이날 오전 북한이 “호국훈련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팩스를 보내긴 했지만, 일상적으로 있어온 일이라 누구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포탄은 연평도 인근 해상과 내륙지역에 촘촘히 박혔다. 우리 공군은 곧 서해 5도 지역에 전투기를 출격시켰고, 자주포 부대도 80여 발을 발사하며 대응사격했다.

    한순간에 전쟁터 모든 것 앗아가

    상황은 긴급하게 돌아갔다. 군은 2시 50분 ‘진돗개 하나’를 발령했고, 합동참모본부는 한미연합사령부와 협의해 대북감시태세 워치콘을 3단계에서 2단계로 격상했다. 하지만 북한은 오후 3시 10분 또 한 번 포격을 시작했다. 30여 분간 70여 발을 쏟아부은 두 번째 포격은 민간인 주거지를 향했다. 6·25전쟁 이후 북한이 우리 영토의 민간인 주거지를 대규모로 포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기자는 11월 25일 ‘전장’이나 다름없던 연평도 현지를 취재했다. 23일 공습 당일의 상황은 연평도 주민들의 증언을 토대로 재구성했다.



    11월 23일 화요일 오후, 평소와 같이 편안한 날이었다. 동네 아저씨들은 바닷가에서 굴을 땄고, 산에서 공공근로를 했다. 아주머니들은 옹기종기 모여 김장을 했다. 하지만 2시 30분경 쏟아지는 포탄 세례에 주민들은 혼비백산했다. 정든 고향은 순식간에 지옥이 됐다.

    “탕! 탕! 타당!”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이규남(56) 씨는 평소보다 시끄러운 군의 사격훈련 소리에 신경이 거슬렸다. “오늘 따라 군대 아이들이 오발탄을 많이 내는구먼.” 바깥 상황이 궁금해 집 밖으로 나온 순간, 익숙했던 마을은 사라지고 없었다. 하늘에선 포탄이 떨어졌고, 집들은 하나씩 내려앉았다. 집 안에 있으면 죽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달렸다. 포격에 창고가 폭파되면서 날아온 나무토막이 손과 가슴, 머리를 마구 때렸다. 숨이 가쁘고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애지중지 키우던 닭과 개도 내버려둔 채 살기 위해 달렸다.

    이씨의 이웃집에 사는 조순옥(78) 씨는 바닷가에서 굴을 따고 돌아와 마당에서 뒷정리를 하다 포탄이 터지는 소리를 들었다. 실제 상황이었다. 심장이 뛰고 무릎이 후들거려 그냥 쓰러졌다. 바로 옆에서 포탄이 터지는 것 같았다. 어렴풋이 경찰이 자신의 팔을 잡아끌어준 기억만 있다. 마을 사람이 즐겨 찾던 ‘대성상회’는 건물 한가운데 포탄을 맞아 완전히 부서졌다.

    인천에 사는 박명훈(43) 씨는 그날 하루만 생각하면 몸서리가 친다. 연평도 해병부대 막사 공사를 하던 중에 멀리서 포탄 터지는 소리가 났다. ‘이게 뭐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자신의 등 뒤에 포탄이 떨어졌다. 상상 이상의 폭음에 귀가 떨어져나가는 것 같았다. 박씨의 양쪽 고막은 그 자리에서 파열됐다.

    펑펑 쏟아진 포탄 해병대도 죽고 민간인도 죽고 숨 막히는 공포만 남았다

    포탄을 맞은 민가에는 세간살이 흔적마저 사라졌다.

    하지만 그는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박씨가 일하던 공사장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인 한전발전소 주변 군부대 숙소 근처에 포탄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포탄이 터진 바로 그 자리에서 일하던 김치백(61) 씨와 배복철(60) 씨가 몸이 갈기갈기 찢어진 채 숨을 거뒀다. 하지만 누구도 싸늘한 주검이 된 이들을 챙기지 못했다(시신은 다음 날인 24일 발견됐다).

    같은 시각 서정우(21) 하사(당시 병장)는 부두에서 배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던 말년 휴가를 나가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멀리서 들리는 포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부대에서 “곧장 복귀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부대원 2명과 함께 돌아가던 길, 하늘에서 포탄이 쏟아졌다. 방공호를 300m 앞두고 커다란 파편이 서 하사의 건장한 몸 위로 떨어졌다. 다리와 발목이 잘려나간 채 그는 이 세상과 등졌다. 제대를 4개월 앞두고 있었다.

    대피소에 방공호에서 뜬눈으로 밤새워

    펑펑 쏟아진 포탄 해병대도 죽고 민간인도 죽고 숨 막히는 공포만 남았다
    해병대에 입대한 지 고작 3개월 된 문광욱 일병(당시 이병)은 바로 그 시간 통합생활관 옆 대피소에서 분산 훈련을 하고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파편이 그의 가슴을 관통했다. “빨리 군대를 다녀오겠다”며 대학 1학년도 마치지 않고 입대한 그는 불과 19세였다.

    북의 무차별 포격이 이뤄진 오후 2시 34분은 부지런한 섬사람들에게는 한창 바쁜 시간이었다. 연평도 주민들은 “그나마 썰물 때라 바닷가에서 굴을 따거나 산에서 공공근로를 하는 사람이 많아 인명 피해가 적었다”고 했다. 하지만 20여 분간 이뤄진 1차 포격은 주민들에게는 서너 시간과 같았다.

    우리 군은 북한의 포격이 있은 지 13분 만에 K-9 자주포 80여 발로 대응사격을 했다. ‘진돗개 하나’가 발령된 서해 5도 지역은 긴장감이 최고조에 올랐다. 그사이 주민들도 숨을 죽이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포탄 소리가 멈추자 밖으로 나가 가족의 안전을 확인하는 주민들도 있었다. 집 근처에 몸을 숨겼던 83세 정모 할머니는 그제야 안전한 곳을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 할머니는 “다리가 불편하고 빨리 움직이질 못해 그냥 가만히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3시 10분 북의 포격이 재개됐다. 주민들은 19개 대피소와 방공호에 숨어 공포에 떨었다. 여기저기서 가옥과 시설물이 무너졌고, 뒷산 언덕배기는 산불이 난 듯 화염에 휩싸였다. 30여 분간의 2차 포격이 끝난 뒤 더는 공습이 없었다.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했다. 연평도는 전기와 통신이 끊겼다. 주민들은 피난 행렬에 올랐다. 연평도에는 1분, 1초도 더 있을 수 없었기 때문. 김태억(61) 씨는 운 좋게 어선 한 채에 올라탔다. 산에서 풀을 베다 뛰어나온 옷차림 그대로였다. 김씨와 함께 배를 탄 사람은 17명이었다.

    연평도를 빠져나가지 못한 사람들은 대피소와 방공호 등에서 뜬눈으로 밤을 보냈다. 난방이 되지 않아 추위와 싸워야 했고, 코를 찌르는 화염 냄새는 가뜩이나 불안한 이들을 더욱 무섭게 했다. 세 딸의 엄마인 임정은(36) 씨는 언덕에서 무궁화를 심다가 포탄이 터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젖먹이 막내딸을 들쳐업고, 첫째와 둘째가 다니는 초등학교와 부설 유치원으로 달려갔다. 두 딸의 손을 잡아 무작정 대피소로 뛰었다. 딸 손보미 양은 “포탄이 떨어지는 순간 학교가 뒤흔들리더니 뒷산에서 연기가 솟아올랐다”며 폭격 당시의 순간을 생생히 기억했다. 군무원인 임씨의 남편은 연평도 곳곳을 누비며 화재 진압을 하고 주민들을 챙기느라, 정작 아내와 세 딸을 돌보지 못했다.

    연평도 밖 사람들도 연락이 두절된 가족과 친지, 친구들을 걱정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딸과 사위, 손자가 연평도에 있는 박용자(59) 씨는 그곳에 포탄이 떨어졌다는 소식에 너무 놀라 골반이 뒤틀렸다. “포탄이 떨어져 대피한다”는 전화를 한 후 한참 동안 딸과 연락이 되지 않았기 때문. 딸을 중매 섰던 박씨의 여동생은 “내가 조카를 연평도로 몰아넣었다”며 밤새 자책했다. 언뜻 기우처럼 보였지만, 그들의 마음은 절절했다.

    김모 씨는 출산을 앞둔 아내를 홀로 연평도에 남겨두고 와 발만 동동 굴렀다. 휴식차 아내와 함께 연평도에 갔다가, 김씨만 일이 있어 일요일에 내륙으로 나온 것. 그는 한가로이 손을 흔들며 배웅하던 아내가 포탄 수십 발이 떨어진 연평도에 갇혔다는 사실에 가슴을 쳤다.

    떠나온 사람들 “이주대책 세워달라”

    북의 대규모 공습이 있은 지 하루가 지난 24일 오전부터 연평도 주민들은 어선과 해경정 등에 나눠 타고 인천으로 들어왔다. 800명 가까운 사람이 고향을 등지고 나왔다. 이들은 친인척 집으로 가거나 부두 인근 찜질방으로 향했고, 몇몇은 병원에 입원했다. 가천의대길병원 양혁준 응급의학과 교수는 “외상이 없는 사람도 시간이 지난 뒤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에 시달릴 수 있으니 안정을 취하도록 도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이날 연평도로 들어가는 길은 완전히 차단됐다.

    25일 목요일 오후 12시 30분. 연평도 뱃길이 간신히 열렸다. 인천연안여객터미널은 다시 삶의 터전으로 돌아가려는 연평도 주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뤘고, 표를 구하지 못한 주민들은 거친 말을 내뱉었다. 기자는 만선인 배에 올랐다.

    “아이고, 넌 어디 있다 왔어.” “인천 동생 집에 있었지. 너는?”

    기자 옆에는 연평면사무소 인근에 사는 윤진영(48), 강기임(51) 부부가 앉았다. 옷차림은 포탄이 떨어진 그 시각 그대로였다. 윤씨는 바닷가에서 배를 손보다 떨어지는 포탄을 보고 곧장 집으로 달려왔다. 아내 강씨는 갯벌에 나가 굴을 채취하고 돌아와 집에서 쉬다가 포탄 소리를 들었다. 집 근처 면사무소 뒤로 포탄이 떨어졌지만, 마을 방송에선 “사격 중”이란 말만 반복했다. 인천의 찜질방에서 묵은 부부는 아침을 컵라면으로 때웠다고 했다. 여기저기서 “군인도, 민간인도 죽었다. 우리에게는 보상금 몇 푼이 중요한 게 아니다. 이주 대책을 세워달라”는 요구의 목소리가 들렸다.

    검게 그을린 개들만이 마을 배회

    펑펑 쏟아진 포탄 해병대도 죽고 민간인도 죽고 숨 막히는 공포만 남았다

    커다랗게 구멍이 난 콘크리트 벽이 포탄의 위력을 보여준다.

    오후 3시 20분, 배가 연평도 선착장에 도착했다. 경찰특공대원들과 해병대 군인들이 주민들을 맞았다. 해변에 있는 운동장 외벽에 움푹 팬 포탄의 흔적이 한눈에 들어왔다. 포탄과 화마가 휩쓸고 간 자리엔 앙상한 나무와 폐허나 다름없는 건물들만 을씨년스럽게 남아 있었다. 전쟁영화가 따로 없다. 김정국(63) 씨 부부의 보금자리는 ‘난장판’이 됐다. 김씨는 “바닷바람이 더 들어오지 않게 막아야 한다”며 종이박스를 잘라 깨진 현관 유리에 붙였다. 폭격이 있던 날 부부는 인천에 있는 병원에 있었다. 다행히 포탄을 피했지만, 집은 철저히 부서졌고, 마당에 묶어둔 개는 사라져버렸다.

    폭격이 있던 날, 연평도 주민이 묵었던 연평초등학교 대피소를 찾았다. 플라스틱 깔개 위에 10cm 남짓한 스티로폼이 놓여 있었다. 대피소 입구에 있는 비닐 막은 약한 바람에도 심하게 흔들렸다. 이곳에서 주민들은 군용도포 한 장에 의지해 잠을 자야 했다. 바닥에서는 찬 기운이 그대로 올라왔다. 90세 노부부는 25일 오후 연평도를 겨우 빠져나왔다. 허리가 굽어 잘 움직일 수 없는 까닭에 추운 날씨와 배고픔과 싸울 수밖에 없었다. 소개령이 내려 노부부는 굽은 허리로 힘들게 인천으로 빠져나왔지만 갈 곳이 없어 한참을 인천부두 주차장에서 서성거려야 했다.

    연평도가 ‘전장’이었음을 보여주는 흔적은 여기저기에 있었다. 포탄이 한가운데 떨어져 지붕이 아래로 흘러내리고 부서진 벽돌 잔해만 남은 건물, 고열 탓에 알루미늄 섀시로 된 현관문이 녹아버린 집, 이불과 옷가지가 실린 채 버려진 차량…. 대부분 가옥은 을씨년스럽게 텅 비어 있었고, 검게 그을린 개들만 마음껏 돌아다녔다.

    복구 작업도 한창이었다. 전기설비 복구는 90%가량 완성됐다. 재난구호협회는 연평초교 운동장에 임시수용시설을 짓고 있었다. 11월 29일 완공될 예정이다. 연평도 주민들은 한결같이 “더는 연평도에서 살 수 없다”고 했다. 정든 집과 마을, 삶의 터전인 바다가 있던, 대한민국 영토 연평도는 이제 국민이 살 수 없는 공포의 공간으로 변해버렸다.

    국군수도병원 합동분향소

    “멀쩡한 내 아들 어디로 데려갔나요”


    펑펑 쏟아진 포탄 해병대도 죽고 민간인도 죽고 숨 막히는 공포만 남았다

    눈물 흘리는 서 하사 부모(왼쪽)와 합동분향소 현장.

    11월 24일 경기 분당구 율동 국군수도병원에 차려진 고(故) 서정우 하사와 문광욱 일병의 합동 분향소. 갑작스럽게 소중한 가족, 친구, 동료의 죽음을 접한 사람들이 놀랄 겨를도 없이 마지막 길을 배웅하러 달려왔다. 두 청년의 영정 사진 앞에 새하얀 국화가 차곡차곡 포개졌다. 어제 군의 전화를 받고 급하게 달려온 가족들은 실감나지 않는 듯 넋이 빠진 모습이었다.

    “네, 용케 안 쓰러지고 이렇게 살아 있네요.”

    서 하사의 어머니 김오복 씨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단국대 법학과 1학년을 마치고 2009년 해병대에 자원입대한 서 하사는 한 달 뒤 제대하면 복학해서 편입을 준비하려던 욕심 많고 밝은 아들이었다. 해병대에 따르면 서 하사는 23일 오후 말년휴가를 받고 부두에서 배를 기다리다 포격이 시작돼 부대로 복귀하는 길에 포탄을 맞아 숨졌다. 사망 과정에서 다리와 발목이 잘려나갔지만 24일 수색 작업에서 발견됐다.

    “엄마 좋으라고 항상 밝게 웃고 보기만 해도 든든하던 내 멀쩡한 아들을 이렇게 데려가면 어떡해.”

    오후 6시 30분경 장례식과는 어울리지 않는 앳된 얼굴들이 분향소에 들어왔다. 갓 스무 살, 문광욱 일병의 친구들이었다. 문 일병은 동료들과 통합막사 밖으로 나와 있다 손바닥 크기 이상의 포탄이 가슴을 관통해 사망했다. 조문 온 한 친구는 “8월에 군대 간다고 해 송별회 해준 게 엊그제 같은데…”라며 말을 못 이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 같은 교회에 다녀 광욱이를 잘 안다”며 “말수는 적지만 성실한 친구다. 집안의 기둥인데 이렇게 가서 어머니는 어떡하느냐”고 말했다. 문 일병의 여동생 주미(14) 양은 “정말 믿음직한 오빠였다”며 눈물을 훔쳤다.

    손님을 맞고 자리를 마련하며 빈소를 지킨 건 전·현직 해군, 해병 전우들이었다. 가수 김흥국, 이정 씨 등 해병 출신 연예인들도 빈소를 방문했다. 김흥국 씨는 “정말 분통 터지는 일 아니냐”며 울먹거리기도 했다. 낮 1시부터 빈소를 지킨 해군 중장 출신 송근호 (재)한국해양전략연구소 소장은 “거시적인 문제야 복잡하지만, 일단 23일 낮 연평도 내의 군사 대응은 잘했다”며 “적의 포탄이 날아오는데 거기서 도망치지 않고 고장 난 포를 고쳐가며 대응하다 자신을 희생한 후배들이 얼마나 기특하고 대단하냐. 정말 우리 병사들이 아주 용감히 잘 싸워줬다”고 말했다. 한편 두 장병의 시신이 모셔진 분향소에는 국회 국방위원장 원유철 의원, 전 국방장관 김장수 의원, 민주당 손학규 대표, 자유선진당 이회창 대표 등 정치권 인사들의 방문도 이어졌다. 두 청년의 장례는 해병대장으로 27일부터 5일간 치러질 예정이다.

    성남 =김유림 기자 r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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