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03

2003.10.02

‘스크린 뷔페’ 영화세상 바꿨다

국내 상륙 6년 만에 ‘극장+쇼핑몰’ 복합공간으로 정착 … 영화산업 확대 ‘긍정’속 상업적 편식 ‘비판’

  • 김민경 기자 holden@donga.com

    입력2003-09-25 11: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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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크린 뷔페’ 영화세상 바꿨다

    삼성동 코엑스몰에 위치한 메가박스 내외부. 관객들은 일단 멀티플렉스에 와서 다양한 영화 중에 보고 싶은 작품을 고른다.

    2000년 5월31일 멀티플렉스 CGV가 부산 서면에서 문을 연 날, 서용석 점장의 마음은 성적표를 앞에 둔 수험생만큼이나 긴장됐다. CGV 서면12가 부산 최초, 최대 규모의 멀티플렉스인 데다 서울 CGV 강변11로 영화업에 뛰어든 CJ그룹으로서는 본격적인 지방 진출을 처음 시험하는 무대였기 때문이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입장하는 손님들의 반응을 초조하게 지켜보던 서점장은 곧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첫번째 가족 관람객의 모습이 CGV의 성공을 확신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남자 아이는 극장에서는 처음 본 푹신한 카펫에 머리를 대고 굴렀고, 엄마는 바로 휴대전화 버튼을 눌러댔다.

    “우와, 이기 극장 디게 잘해놨네, 니도 빨리 와본나!”

    당시 부산을 비롯한 지방 극장의 수준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지글대는’ 음향과 영사 상태는 말할 것도 없고 등산로를 방불케 하는 객석의 경사도, 다리를 뻗기 어려운 좌석 공간과 더러운 시트가 관객이 ‘극장’이란 곳에서 감내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관객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워댔다. 쥐가 나와도 소리 한번 지르고 말았다. 극장주로서는 건물과 영사기만 있으면 땅값이 오르는 것을 보며 영화를 독점적으로 받아 틀기만 하면 됐으니 시설이나 서비스에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관객 없으면 하루 만에 간판 내리기도



    그러나 CJ가 호주 극장체인 빌리지로드쇼와 합작으로 쇼핑몰과 결합한 복합 엔터테인먼트 공간으로서 CGV를 처음 선보인 지 6년이 채 안 되어 멀티플렉스는 극장과 영화산업, 그리고 사람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멀티플렉스가 처음 등장했을 당시 영화 담당 기자들의 전망은 대개 두 가지였다.

    첫번째는 스크린 수가 늘어나 예술영화 등 보다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이 극장에서 상영될 것이라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멀티플렉스 사업은 CJ가 시작했으나 초기 투자비가 엄청나 결국 삼성, 대우, 현대 등 대기업들의 무대가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예상은 대개 빗나갔다. 물론 우리나라 사람들의 연평균 영화관람 횟수가 1996년 0.9회에서 2002년 2.2회로 늘어났고, 한국영화 점유율이 절반을 넘어서는 등 멀티플렉스가 전체 영화 시장과 한국영화 산업의 규모를 키웠다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단 한 명의 관객이라도 자리가 없어 돌아가지 않게 한다’는 게 멀티플렉스의 운영수칙 1조다 보니, 점유율이 낮은 영화는 단 하루 만에 밀려나는 사태가 드물지 않게 생겨났다. 스크린 수 1000개를 육박하지만 예술영화는 고려의 대상도 되지 않는다.

    “어떤 영화를 상영할 것인지는 본사에서 결정하지만, 그 영화를 200석 관에 걸 것인지 300석관에 걸 것인지, 얼마 동안 상영할지는 ‘사이트’(지역마다 위치한 개별적 멀티플렉스를 이른다) 점장 권한입니다. 권한은 곧 책임이죠. 월 6000만원에 이르는 아르바이트생 인건비 생각하고 회사 내의 경쟁을 의식하면, 텅 빈 객석을 두고 볼 수 있나요? 안됐지만 하루 만에라도 영화를 내릴 수밖에 없지요.”(모 멀티플렉스 점장)

    ‘스크린 뷔페’ 영화세상 바꿨다

    멀티플렉스 영화관의 로비.

    그러다 보니 1년 전부터 한 관을 1, 3, 5회와 2, 4회로 나누거나 주말, 주중으로 나누는 교차상영 방식도 생겨났다. ‘예약 문화’가 꽃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영화사로서는 개봉 첫 주말의 관객수가 너무나 중요해졌다. 개봉을 위해 최소 100개 스크린을 확보하는 이른바 ‘와이드 릴리스’ 방식이 도입된 것이다. ‘매트릭스2’ ‘조폭마누라2’처럼 전국 1000여개 스크린 중 무려 230여개를 차지한 영화도 등장했다.

    ‘고양이를 부탁해’와 ‘장화, 홍련’의 제작사인 마술피리의 오기민 대표는 “전통적 극장업자들은 ‘지저분한 돈거래’로 횡포를 부렸다. 뒷거래가 없는 멀티플렉스는 선진적이다. 그 말은 자본의 논리로만 움직인다는 뜻도 된다. ‘장화, 홍련’은 멀티플렉스마다 서로 달라고 했지만 ‘고양이를 부탁해’는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서울 20개관에서 개봉했지만 그나마도 간판을 걸어놓은 채 다른 영화를 틀었다. 하지만 와이드 릴리스가 일반화되다 보니, 멀티플렉스에서 안 받아주면 타격이 너무 크다. 그래서 다음을 생각해 이런 새로운 ‘횡포’에 대해 쉬쉬한다”고 말한다.

    ‘바람난 가족’을 제작한 명필름의 심보경 이사도 “요즘은 대박 아니면 피박이다. 예전엔 중박이란 게 있었다. 와이드 릴리스 때문에 첫 주 1위를 못하면 망한다. 그래서 개봉 직전에 마케팅비를 쏟아 붓는다. 이것이 한국영화 관객이 늘었어도 한국영화의 수익성이 악화된 주원인”이라고 분석했다.

    ‘스크린 뷔페’ 영화세상 바꿨다

    멀티플렉스가 등장한 98년을 기점으로 해 한국의 영화관객 수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또 다른 영화제작자는 “코미디 영화가 붐을 이루고 있는 이유가 CGV가 코미디를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건 주지의 사실”이라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영화평론가 김영진씨는 “세계적으로 극장이 멀티플렉스 일색인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멀티플렉스의 본고장이라는 미국에서도 멀티플렉스는 전체의 30% 정도다. 나머지는 미니플렉스와 단관이다. 이대로 가면 우리나라에선 와이드 릴리스용 ‘팝콘 무비’만이 제작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멀티플렉스라는 새로운 극장 형태가 한국영화의 흐름을 결정하고 있는 셈이다.

    재벌기업이 멀티플렉스업에 진출할 것이라는 두 번째 예상도 어긋났다. 삼성 대우 등 재벌기업들이 영화산업에서 쓴맛을 본 데다 IMF 외환위기까지 겹치는 바람에 일제히 철수했기 때문.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서비스 영업에 강점이 있는 CJ와 롯데(롯데시네마), 오리온(메가박스) 등이다. ‘시스템의 기업’ 삼성이 영화를 만드는 일에 뛰어들었다 충무로의 후진적인 연고 시스템(?) 탓에 고전한 반면 이들은 원래 자신 있는 분야인 영업, 즉 ‘영화상영업’부터 시작해 배급과 제작 쪽으로 진출함으로써 영화산업에 소프트랜딩했다.

    ‘스크린 뷔페’ 영화세상 바꿨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간판이 걸려 있는 80년대의 국도극장, 헐리기 직전의 단성사. 이 극장 역시 멀티플렉스로 개축되었다. 올해 문을 연 멀티플렉스 영화관 CGV상암의 입구(왼쪽부터).

    흥미로운 것은 삼성에서 분가한 CJ가 멀티플렉스라는 ‘푼돈 장사’로 불과 5년 만에 영화산업을 장악했다는 점이다. 이 과정에서 스필버그 감독이 통계자료와 파워포인트를 들고 온 삼성맨이 아니라 패스트푸드점에서 만난 청바지 차림의 이재현 CJ 회장을 파트너로 선택한 일화는 두 기업의 문화적 차이, 더 나아가 영화산업의 특수성을 단적으로 설명해주는 예로 자주 거론된다.

    원래 CJ 제약사업부에서 영업을 하다 부산과 인천CGV를 성공적으로 오픈해 업계 유명인사가 된 서용석 인천CGV 점장(40)은 “멀티플렉스 운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일이 직접 몸으로 뛰어 관객 한 사람 한 사람을 붙잡아야 하는 서비스업임을 잊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멀티플렉스 브랜드들은 원칙적으로 건물을 사지 않고 대형 복합건물을 장기 임대한다.

    그러다 보니 대형 쇼핑몰마다 멀티플렉스 유치 경쟁이 치열하다. 멀티플렉스가 연 100만명 이상의 유동인구를 창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멀티플렉스가 입점한 건물의 분양가와 임대료는 다른 곳에 비해 최소 20~30% 더 비싸다. 그래서 최근 대형 쇼핑몰 분양 광고에는 ‘멀티플렉스 유치 확정’이라는 문구가 빠지지 않는다. 건물주로서는 분양가와 분양률을 높이기 위해 직접 멀티플렉스를 운영하는 것도 불사하겠다는 각오지만, 이미 멀티스크린 ‘포화상태’라는 말이 나오는 상황에서 이처럼 무책임한 생각도 없다.

    전통적인 극장들이 기존의 자리에 새로 지은 멀티스크린관-쇼핑몰과 결합한 멀티플렉스와 구분하기 위해 영화 상영관만을 들인 건물-이 전처럼 재미를 보지 못하는 것도 극장 공간 자체가 관객 100만명을 보장하는 것이 아님을 방증한다.

    그런 점에서 최근 영업을 시작한 서울 용산 전자랜드의 ‘랜드시네마8’와 신촌 ‘아트레온’은 CGV와 메가박스가 선점한 브랜드 프리미엄을 개성 있는 극장 설계와 기획으로 극복하려는 멀티플렉스의 사례다. ‘랜드시네마8’는 원래 홈쇼핑과 인터넷쇼핑에 빼앗긴 전자랜드의 고객들을 오프라인으로 끌어내기 위해 기획됐지만 전자랜드 자체가 영화라는 소프트웨어와 워낙 밀접해 삼성, 소니, 반다이 등의 매장과 건축가 양진석씨가 디자인한 상영관이 어우러져 첨단과 미래적 컨셉트를 담아내는 멀티플렉스가 되었다. ‘랜드시네마8’의 김종덕 파트장은 “전자랜드가 전국에 70개 지점을 두고 있는 만큼 이곳을 발판으로 극장 체인망을 열 것”이라고 밝혔다.

    ‘아트레온’은 노출 콘크리트와 자연광을 받아들이는 투명 유리가 어우러진 외관으로 이미 신촌의 명물이 되었다. 1957년 설립된 옛 신영극장 자리에 들어선 ‘아트레온’은 옷가게와 식당 등 소비공간으로 빈틈없이 채워진 다른 멀티플렉스와 달리 지하 4층에서 지상 15층에 이르는 전체 공간이 9개 상영관과 광장, 갤러리, 이벤트룸과 동아리 모임 공간 ‘토즈’ 등 문화적 활동을 위해 배분돼 심리적 여유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신영극장 창업자인 선친으로부터 극장을 물려받아 ‘아트레온’으로 신축한 최호준 회장(58·경기대 교수)은 “신촌에 대학은 많아도 문화가 없다는 걸 늘 아쉬워하다 이런 공간을 구상했다. 우리나라 멀티플렉스들이 모두 라스베이거스 게임룸처럼 생긴 것도 불만이었다. 아쉬운 점은 법적 규정과 지원 문제로 예술영화 전용관을 두지 못했다는 것 이라고.

    이제 선진국형 극장 체인망의 대명사가 된 CGV에서 젊고 실험적인 문화공간 ‘아트레온’까지 대도시에서 멀티플렉스는 어디서든 30분 안에 갈 수 있을 만큼 일상적인 공간이 되었다.

    이미 포화상태가 아니냐고? 멀티플렉스 관계자들은 주저 없이 ‘그렇다’고 말한다. 이미 스크린 수 증가율이 관람객 수 증가율을 앞섰고, 부산 서면은 3대 멀티플렉스 브랜드와 기타 멀티스크린이 몰려 이미 ‘포화상태를 심각하게 넘어선 지역’으로 꼽힌다. 미국에서 멀티플렉스 체인들이 줄줄이 도산한 것도 ‘적신호’다.

    그러나 멀티플렉스 열풍이 잦아들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더 뜨거워지고 있다. 한 멀티플렉스 사이트 개발담당자는 “요즘은 거의 매일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메가박스만이 ‘요지를 다진다’는 방어적 입장일 뿐 CGV는 단기적으로 118개 스크린을 증설할 계획이고, 현재 지방에서만 영업중인 롯데시네마는 내년에 본격적으로 서울에 진출, 구 한일은행 본점이 위치한 명동의 금싸라기 땅에도 멀티플렉스를 지어 2006년까지 200개 스크린을 확보할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플레너스 그룹 제작 배급사인 시네마서비스도 프리머스시네마를 설립하여 2006년까지 99개 스크린에 2만5000석을 확보한다는 계획이다. 프리머스시네마는 전 KFC 사업본부장을 사장으로 영입해 체인 확대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멀티플렉스 브랜드들이 이처럼 ‘사이즈’에 집착하는 것은 앞으로도 매년 30% 이상씩 관객수가 늘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 때문이 아니다. 역설적으로 멀티플렉스가 포화상태에 이르러 결국 단 하나의 체인만이 생존하리라는 비관적 분석 때문이다. 한 사이트 개발팀장은 “미국의 멀티플렉스들이 망한 이유는 비슷한 규모의 업체들끼리 과잉 투자와 입장료 할인 등 제 살 깎아 먹기 경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살아남으려면 먼저 많은 사이트를 선점하여 독점적인 ‘넘버1’이 되어야 한다”고 토로했다. 또 다른 멀티플렉스 브랜드의 관계자도 “이제 누가 더 오래 버티느냐가 문제다. 그런 점에서 현금동원력이 큰 우리가 유리하다는 판단이다”라고 말한다.

    멀티플렉스 전쟁의 결과는 우리의 삶을 또 어떻게 바꿔놓을 것인가. 물론 결과를 예측하기가 쉽지는 않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멀티플렉스의 화려하고 폭신한 카펫을 밟고 그 어두운 환상의 공간으로 들어서는 순간 우리도 피비린내 나는 ‘현실의’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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