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11

2015.11.02

‘명퇴’할래? ‘찍퇴’할래?

조용히 불어닥친 구조조정 태풍…해고 요건 완화되기 전 “위로금이라도 받자”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15-11-02 10: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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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퇴’할래? ‘찍퇴’할래?
    “임금피크제 적용자를 대상으로 매년 희망퇴직 신청을 받을 텐데, 내년 조건이 올해보다 나빠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위아래 눈치 보면서 1년을 버티느니 바로 정리하자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지난봄 평생 몸담았던 KB국민은행을 떠난 한 희망퇴직자의 말이다. 올해 만 55세인 그는 임금피크제 적용 대상이었다. 연봉을 낮춰 더 일하는 것과 위로금을 받고 회사를 떠나는 것 가운데 후자를 택했다. 서울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에서 만난 그는 “28개월 치 월급을 위로금으로 받았지만 금리가 낮아 불안하다. 주위에서 사업은 절대 안 된다고 해서 재취업을 알아보고 있다”고 밝혔다. KB국민은행에 따르면 이번 희망퇴직으로 1000명 이상이 은행을 떠났다. 이들에게는 직급과 연차에 따라 28~36개월 치 월급이 위로금으로 지급됐다.

    반면 한 중소기업에서 경영관리실장으로 일하다 최근 권고사직을 당한 김오훈(가명) 씨가 받은 건 3개월 치 월급이 전부다. 역시 일자리를 구하고 있는 그는 “회사 사정을 뻔히 아는 마당에 버틸 수 없었다”며 “여기저기 열심히 이력서를 넣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아직은 막막한 상태다. 곳곳에서 김씨의 경쟁자가 쏟아져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경제계에서는 금융권을 중심으로 ‘조용한 구조조정’이 확산하고 있다. 통계청이 최근 발표한 ‘고용동향’에 따르면 지난해 7월 89만4000명이던 금융 및 보험업 취업자 수가 올해 10월 81만7000명으로 줄었다. 15개월 만에 7만7000명이 직장을 떠난 셈이다.

    기업 경영성적 분석 웹사이트 ‘CEO스코어’도 6월 말 현재 우리나라 주요 증권사 22곳의 총 직원 수가 3만1386명으로 2년 전보다 11.0%(3887명) 줄었다는 자료를 냈다. 2013년 말부터 이어진 증권업계 전반의 구조조정을 통해 삼성증권(977명), 유안타증권(886명), 한화투자증권(647명), 대신증권(556명) 등 상당수 증권사가 직원 수를 500명 이상 줄였다. 이들이 사회로 쏟아져 나오면서 고용시장에는 1990년대 말 외환위기 때 못지않은 위기감이 감돌고 있다.



    찬바람 부는 세상으로 내몰린 중년

    현재 이 위기의 한가운데 있는 사람은 주로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의 중·장년들로 분석된다. 통계청이 최근 발표한 ‘경제활동인구조사 청년층 및 고령층 부가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노동자가 가장 오래 근무한 일자리에서 퇴직하는 평균연령은 49세(남성 52세, 여성 47세)였다. 직장을 그만둔 이유는 ‘사업 부진·조업 중단·휴폐업’(34.1%)이 가장 많았고, 남자의 경우 ‘권고사직·명예퇴직·정리해고’가 16.9%로 뒤를 이었다.

    이들 앞에 펼쳐진 것은 찬바람 부는 세상이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13년 재취업한 장년층 가운데 절반(45.6%)이 임시직 아니면 일용직 일자리를 얻었다. 급여도 월평균 184만 원으로, 20년 이상 장기근속자 평균임금 593만 원의 31%에 불과했다.

    게다가 퇴사자 중 상당수는 이런 일자리마저 구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KB국민은행에서 30년간 일하다 2010년 희망퇴직한 이만호 씨는 지난해 다시 KB국민은행에 고용됐다. 한때 서울 강남지역 지점장으로 연봉 1억6000만 원을 받던 그가 다시 뽑힌 일자리는 본사 시설과 보일러기능사. 월급이 150만 원도 채 되지 않는 자리다. 그러나 이 일을 하려고 이씨는 각종 직업훈련학원을 다니며 자격증 7개를 땄다. ‘눈높이를 낮추고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마음으로 기술을 배웠다’는 그의 사연은 지난해 전국경제인연합회 중소기업협력센터가 주최한 ‘중·장년 재취업 성공수기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작으로 뽑혔다.

    이에 대해 헤드헌터 신유정 씨는 “요즘 재취업시장에서 40, 50대가 정규직 일자리를 구하는 게 그만큼 어렵다. 스펙 좋은 중·장년층의 능력과 경험을 활용할 만한 일자리가 매우 부족하기 때문”이라며 “특히 안정적인 기업에서 오래 근무한 부장급 간부의 경우 원하는 회사가 더 적다. 현실 적응력이 떨어진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런 현실에서 상당수 퇴직자(26.7%)는 자영업자의 길을 택한다. 국세청의 전국 사업자 통계 분석 결과를 보면 8월 말 현재 개인사업자 수는 582만9000명으로 2009년 말(487만4000명)보다 95만5000명(19.6%) 늘었다. 이들 10명 중 3명은 50대(32.1%)고, 40대(28.5%)와 60대(16.1%)가 뒤를 잇는다. 문제는 창업을 선택한 이들 역시 안정적인 생활을 하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국세청에 따르면 매년 평균 96만 명이 신규 사업자로 신고하고 약 80만 명이 폐업한다. 회사에는 감원 태풍이 불고, 재취업은 요원하며, 창업 미래도 막막한 셈이다.

    ‘명퇴’할래? ‘찍퇴’할래?

    10월 23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2015 리스타트 잡페어—다시 일하는 기쁨!’의 둘째 날 행사에서 부스를 찾은 구직자들이 취업 상담을 하고 있다(아래). 서울 노원구 서울북부고용센터 실업급여 신청 설명회장에 앉아 있는 중·장년층 남성들.

    30대 70% “명퇴하고 싶어요”

    전문가들은 내년부터 시행되는 정년 60세 연장법도 이런 사태를 심화하는 한 원인이 됐다고 지적한다. 300명 이상 사업장의 정년이 60세로 연장되는 것을 앞두고 상당수 기업이 인건비 부담을 줄이고자 아직 정년에 이르지 않은 근로자들을 미리 ‘정리’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실제로 지난해 8000명 이상을 퇴사시킨 KT를 비롯해 SK텔레콤,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삼성물산 등 많은 기업이 이미 대규모 감원을 했거나, 현재 진행 중이다. 인터넷 취업포털 ‘사람인’이 8월 대기업 등 253개사를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도 응답 기업 5곳 가운데 1곳(20.2%)이 인력 구조조정 계획을 갖고 있다고 답했다. 시기로는 올해 하반기를 꼽은 기업이 전체의 72.5%였고, 나머지의 대부분(20.2%)은 2016년 상반기 구조조정을 예고했다.

    기업의 인력 감축이 기정사실화된 상황에서 직장인들은 최선의 해법을 찾고자 골몰하고 있다. 정년에 이르기 전 미리 사측과 합의해 일정액의 보상금을 받고 퇴직하는 희망퇴직(명예퇴직)도 한 가지 옵션으로 여겨지는 분위기다. 직장인 10명 중 6명이 희망퇴직 기회가 주어지면 신청할 의향이 있다고 응답한 조사 결과도 있다. ‘사람인’이 6월 직장인 1859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다. 희망퇴직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한 비율은 30대가 66.8%로 가장 높았고 20대 64.4%, 40대 61.6% 수준이었다.

    ‘명퇴’할래? ‘찍퇴’할래?

    9월 14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최 부총리는 이날 연내에 일반해고 지침 마련 작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희망퇴직이 널리 시행된 1990년대 말 외환위기 당시만 해도 기업의 명예퇴직 제안은 노동자에게 충격적인 사건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평생직장 분위기가 퇴조하면서 최근에는 ‘어차피 오래 다니지 못할 회사라면 보상금을 주는 명예퇴직을 기회로 활용하는 게 좋다’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앞선 조사에서 응답자들이 희망퇴직을 신청할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할 것으로 꼽은 조건이 ‘위로금 규모’(65.2%)인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3월 SK텔레콤이 ‘특별퇴직’이라는 이름으로 실시한 희망퇴직 과정에서도 이런 현상이 드러났다. 당시 SK텔레콤은 근속기간 15년 이상인 사원에게 나이와 관계없이 퇴직 기회를 주고, 보상금으로 80개월 치 월급을 지급했다. 이때 직장을 떠나기로 마음먹은 직원은 300명 이상이며, 특히 과장급 사원이 대거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명예퇴직 조건으로 최대 60개월 치 급여를 내건 한국씨티은행도 직원의 약 15%가 명예퇴직을 신청했으며 이 중 절반 이상이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 젊은 인력인 것으로 전해졌다.

    최근 현대중공업에서 희망퇴직한 최인선(가명) 씨는 이에 대해 “퇴직을 몇 년 앞둔 50대 이상의 경우 회사를 평생 일터로 여기고 일해온 데다 외환위기 때 직장을 떠난 동료들이 사업 실패 등으로 힘들어하는 모습을 본 ‘트라우마’가 있어 웬만하면 회사에서 정년을 맞고 싶어 한다”며 “버티다 험한 꼴 보고 쫓겨나는 게 싫어 짐을 꾸리는 것뿐”이라고 밝혔다. 앞선 ‘사람인’의 조사에서도 50대 이상 응답자의 경우 희망퇴직에 대해 긍정적으로 답한 비율이 40.9%에 그쳤다.

    해고에 대한 공포

    그러나 기업들은 희망퇴직을 실시하면서 주로 이들을 타깃으로 삼는다. 올해 초 희망퇴직을 실시한 한 대기업의 경우 성과급제도를 도입해 전 사원을 다섯 등급으로 구분한 뒤 하위 2등급에 해당하는 직원들의 임금을 사실상 삭감했다. 중·장년층이 대거 이 그룹에 포함됐다. 이후 희망퇴직 신청을 받으면서 이들에게 “낮은 임금을 감수하는 것보다 위로금을 받고 회사를 떠나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고 권유했다고 한다. ‘희망’퇴직이라는 형식을 취했을 뿐 실상은 권고사직과 다르지 않았다는 얘기다.

    이런 현실에서 상당수 중·장년층 노동자는 ‘명퇴’를 거부했다 ‘찍퇴’(특정인을 찍어 퇴직게 하는 것)를 당해 결국 회사를 떠나게 될 것이라는 열패감에 빠져 있다. 올여름 희망퇴직을 실시한 한 보험사는 부서장들이 찍퇴 대상자와 많게는 10여 차례씩 개인면담을 하며 퇴사를 강요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희망퇴직을 실시한 한 증권사는 접수마감을 하루 앞두고 마케팅조직을 신설해 60여 명을 그쪽으로 보냈다. 사실상 대기발령이었다. 갖은 회유와 설득에도 퇴사를 거부한 직원은 개인용 컴퓨터와 전화기를 회수하고, 연고가 없는 지방으로 파견하거나 특별교육 대상으로 분류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괴롭히는’ 회사도 적잖다. 전국사무금융서비스노동조합에 따르면 한 증권사의 경우 희망퇴직에 끝내 응하지 않은 직원 7명을 정리해고해 현재 소송이 진행 중이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현행 근로기준법이 노동자의 해고를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횡령 등 명백한 징계 사유가 있는 경우에 가능한 ‘징계해고’와 긴급한 경영상의 필요에 따른 ‘정리해고’ 외에는 사실상 해고가 불가능하다. 유일한 방법인 희망퇴직을 실시하려면 막대한 비용이 든다. KT의 경우 지난해 희망퇴직 위로금으로만 1조2000억 원 이상 쓴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정부가 지침을 통해 업무 저성과자나 근무 태만자 등을 해고할 수 있는 기준을 세우겠다고 나서는 이유가 여기 있다.

    전문가들은 이런 시도에 대해 “초법적인 발상”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직장인 사이에서는 “정부가 저렇게 관심을 두는데 결국은 해고가 쉬워지지 않겠느냐”는 불안감이 높아지는 게 현실이다. 한 증권사에서 24개월 치 월급을 위로금으로 받고 퇴직한 뒤 일자리를 구하고 있는 50대 취업 희망자는 “지금까지 기업이 퇴직자에게 돈을 준 건 해고가 어렵기 때문이었는데 요즘 분위기로 보면 머지잖아 큰돈을 주지 않아도 사람을 줄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요즘엔 우리 또래 중에도 희망퇴직을 ‘마지막 기회’처럼 여기는 분위기가 있는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중·장년의 일자리가 점점 더 불안해지는 상황에서, 퇴직을 희망으로 삼아야 하는 고용불안시대의 한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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