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42

2018.06.13

김작가의 음담악담(音談樂談)

한국 대중음악의 찬란한 영웅서사

강헌의 ‘신해철(In Memory of 申海澈 1968-2014)’

  • 입력2018-06-12 11:4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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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헌. [사진 제공·돌베개]

    Ⓒ강헌. [사진 제공·돌베개]

    음악 하는 사람, 말하는 사람, 그리고 생각하는 사람. 이 세 가지 지표를 모두 충족시킨 사람은 누구일까. 나는 신해철을 꼽는다. ‘그대에게’의 전주가 울려 퍼지자마자 심사위원들 모두 ‘올해 대상은 정해졌다’고 생각했다던 1987년 대학가요제를 사춘기 때 지켜봤고, 넥스트의 앨범을 들으며 ‘드디어 한국에 이런 음악이 나왔다’고 뿌듯해하던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 후 평론가라는 직함을 달고 많은 뮤지션을 만나봤지만 그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인터뷰를 했던, 서울 마포구 공덕동 그의 사무실에서 세 시간만큼 인상 깊었던 때는 없다. 많은 질문을 던질 필요가 없었다. 녹취록은 별 다른 편집 없이도 훌륭한 기사가 됐다. 

    그가 세상에 던졌던 소신 있는 발화는 앞으로 우리가 언제 만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용기이자 지혜였다. 그가 떠난 지 햇수로만 4년이 됐다. 그의 마지막 작업실이 있던 분당 수내동에 신해철 거리가 조성됐고 그의 유고를 모은 책도 나왔다. 강헌이 쓴 ‘신해철(In Memory of 申海澈 1968-2014)’은 남아 있는 자들이, 떠나간 이에게 바치는 가장 사적이고 세밀한 헌사다. 

    1990년대 중·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은 음악평론의 전성기였다. 한국 대중음악에 대한 담론이 꽃처럼 피어나던 시대였다. 초기 독립영화운동을 이끌다 대중음악으로 넘어온 강헌은 많은 음악 글쟁이 사이에서도 최강의 달필가였다. 말 그대로 토해내듯 글을 쓰는 그를 두고 누군가는 ‘음악에 대해 무협지처럼 쓰는 사람’이라고 평했다. 

    나 또한 그의 글을 읽으며 자랐고 이전의 팝 칼럼니스트들과는 다른, 거침없는 언사와 화려한 ‘구라’에 감화되며 꿈 비슷한 것을 키우면서 자랐다. 



    강헌 역시 인터뷰를 통해 신해철을 만났고 막역한 사이가 됐다. 1996년 ‘자유’ 페스티벌을 비롯해 그가 기획하고 실행했던 많은 무대에 신해철을 불러냈다. 2002년 노무현 대선후보 찬조연설 역시 강헌의 제의로 성사된 것이었다. 강헌이 건넨 칼을, 신해철은 누구보다 잘 휘둘렀다. 

    친구를 잃고 4년이 지나 강헌이 내놓은 이번 책의 백미는 첫 장 ‘Stardom’이다. 신해철이 데뷔하기 전부터 대학가요제로 스타덤에 오르고 솔로 활동으로 아이돌이 된 후 넥스트를 결성할 무렵까지 행보를 그린 그 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모든 데뷔는 아름답다. 숱한 방황과 불면의 밤을 거듭했음에도 불구하고 도돌이표처럼 제자리로 돌아오는 자신의 무능함을 매일 확인하면서도, 자기 앞의 모든 질서를 일거에 무너뜨릴 거라는 야망의 칼날을 한순간도 포기하지 않고 가슴 깊이 벼르지 않았는가? 하지만 거의 모든 데뷔는, 기적적인 예외를 제외한다면, 전부 회환과 슬픔으로 얼룩진 무관심 혹은 시장에서의 실패로 마감하는 슬픈 스토리다.” 

    주인공의 찬란한 몰락으로 끝나는 영웅서사의 서문을 방불케 한다. 만약 신해철의 삶을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과잉의 미학’이 신해철이기에 어울린다는 것을 수긍할 수 있으리라. 무엇이 그를 만들었는지를 탐구하는 ‘Attitude’ 편에서는 기독교 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의 글을 인용하며 신해철의 무의식과 세상에 대한 태도를 파고든다. 약 55쪽 분량의 실제 인터뷰와 강헌이 신해철을 모델로 썼다는 희곡 ‘The Hero’의 각본이 뒤를 따른다. 

    책을 덮으면 어쩔 수 없이 옛 기억들이 떠오른다. 신해철이 날아오르고 세상을 포효하던 시절, 우리는 어떻게 그리도 뜨거울 수 있었는지 새삼 놀라게 된다. 음악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존재했기 때문일까. 그 믿음에 경도돼 음악을 만들고 글을 쓰던 이들이 있었다. ‘신해철’은 그랬던 한 시대에 대한, 임상기록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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