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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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에 이정표 세운 모네의 수련

[김재준의 다빈치스쿨] 색상과 빛이 이끄는 몰입적 경험으로 관객 이끌어

  • 김재준 국민대 국제통상학과 교수

    입력2024-08-29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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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외를 갈 때마다 가장 방문하고 싶은 곳이 있기 마련이다. 오랑주리 미술관은 최근 프랑스 파리 여행에서 첫 번째로 들른 장소였다. 그곳에 간 목적은 단 하나로, 클로드 모네의 ‘수련(Water Lilies)’ 연작을 보기 위해서였다.

    모네가 전달하는 색채의 바다

    프랑스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이 소장한 클로드 모네의 ‘수련-구름’. [위키피디아]

    프랑스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이 소장한 클로드 모네의 ‘수련-구름’. [위키피디아]

    모네는 말년에 파리 근교 지베르니(쥐베흐니)에 일본풍 정원을 지었다. 그가 일본식 다리를 놓은 연못에 수련을 키우면서 그림을 그린 이야기는 유명하다. 19세기 중후반 유럽인이 일본풍에 열광했다면 지금은 한류가 비슷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전시실을 천천히 이동하면서 모네의 그림이 전달하는 색채 바다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단순히 예술 작품을 보는 것을 넘어 종교적 체험에 가까웠다. 이는 서양미술사를 다시 공부하는 계기가 됐다.

    모네가 말년에 그린 수련 시리즈는 미술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색면 추상화, 추상표현주의는 물론, 이브 클랭의 단색 회화와 같이 다음 세대 작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연못의 고요하고 반사되는 표면을 묘사한 수련 연작은 전통 구도와 중심의 초점을 거부하는 전면적인 접근 방식이 특징이다. 그림은 관객을 색상과 빛이 이끄는 지속적이고 몰입적인 경험으로 이끈다. 모네는 깊이감을 얻고자 다양한 색조를 겹겹이 쌓았는데, 이는 캔버스의 표면을 초월하는 감각적 경험을 불러일으킨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오랑주리 미술관을 방문한 주인공은 “모네야말로 진정한 추상표현주의의 선구자”라고 말한다. 실제로 미국 추상표현주의는 모네의 전면적 구성 기법과 비관계적 회화를 활용했다. 특정 부분을 강조하지 않고 캔버스 전체를 색으로 덮는 등 모네의 아이디어를 더욱 발전시키기도 했다. 마크 로스코는 넓은 색면(色面)을 활용해 사색과 정서적 공명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이 개념은 모네의 수련에서 발견되는 명상적 특성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잭슨 폴록과 빌럼 데 쿠닝 역시 역동적인 붓놀림을 통해 그린다는 행위를 강조하는 식으로 모네의 접근 방식을 확장했다. 모네의 획이 부드럽고 응집력 있는 전체로 통합된 반면, 폴록은 물감을 캔버스에 떨어뜨리고 붓는 등 에너지와 즉각성을 도입했다. 이런 둘의 차이에도 캔버스 전체를 하나의 장으로 다룬다는 근본 원리는 모네의 수련이 물려준 유산이다.

    이브 클랭의 단색 회화, 특히 ‘IKB(International Klein Blue)’ 시리즈는 채도가 높은 단일 색상만 사용한다. 생생한 강렬함을 유지하고자 개발된 클랭의 ‘블루’는 화면을 완전히 덮는다. 모네가 수련에서 보여준 몰입감 넘치는 색상 특성에 대한 탐구가 클랭이 단색 회화, 즉 모노크롬 그림에 접근하는 방식의 토대를 마련해준 것으로 보인다. 모네는 캔버스의 물질성을 해소하고 그림 속에 있는 듯한 느낌을 불러일으키고자 복잡한 색상의 상호작용을 활용했다. 클랭은 단일 색상을 사용하면서도 유사한 효과를 달성했고, 이 개념을 가장 순수한 형태로 승화했다. 클랭의 작업은 색상 자체가 정서적·철학적 참여의 주요 매체가 된다는 점에서 모네가 개척한 경로의 연장이자 급진적인 단순화라고 볼 수 있다.

    서양에서 모노크롬 회화는 표현주의 미술과의 과감한 결별을 통해 정신적 해방을 추구하는 형식 가운데 하나였다. 클랭 같은 예술가들은 전통 회화의 한계를 뛰어넘는 수단으로 단색 표현을 사용했다. 클랭은 색이 ‘선의 감옥’에서 해방돼 그 자체로 순수한 형태로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모노크롬은 단순한 시각적 경험이 아닌, 보이지 않는 진리를 드러내는 매체, 즉 작가와 보이지 않는 세계 사이의 소통을 위한 통로였다.

    물감 쌓아올린 韓 화가들

    모네의 ‘수련’을 감상한 뒤 2019년 필자가 작업한 미술품 ‘무제’에 ‘새로운 수련(New Water Lilies)’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로 결정했다. [김재준 제공]

    모네의 ‘수련’을 감상한 뒤 2019년 필자가 작업한 미술품 ‘무제’에 ‘새로운 수련(New Water Lilies)’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로 결정했다. [김재준 제공]

    1970년대 등장한 한국 단색화는 전혀 다른 문화적·역사적 틀에서 발전했다. 서양 현대미술이 마주한 ‘막다른 골목’에서 완전히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 한 것이다. 단색화를 그린 화가들은 전통 재료와 기법을 사용해 캔버스 표면에 물감을 반복적으로 쌓아 올렸다. 이 과정은 단순한 기계적인 반복이 아닌, 순간의 우연성에 따라 미묘하게 변화하는 수행적 행위였다. 대표 화가로는 박서보, 정상화, 하종현, 윤형근, 김기린 등이 있다. 단색화의 물질성과 수행성에 대한 강조는 서양 모노크롬의 정신적 추상성과 현저히 대비된다. 그 결과 전통 장인의 세심한 수작업을 연상케 하는 보수적 추상화의 독특한 형태가 탄생했다.

    미술 전시회를 가질 때마다 미술사를 의식적으로 생각하곤 했다. 한국에서는 단색화 다음의 미술사조가 무엇일까. 오랑주리 미술관에서 “다시 모네의 수련으로 돌아가자”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미술사를 써보자는 구상이다. 가령 포스트 포스트모더니즘과 같이 ‘포스트 포스트인상주의’는 어떨까.

    ‘미술사로 유희하기’와 비슷한데, 이미 비슷한 작업을 했었다. 5년 전 열정적으로 다작을 한 적이 있다. 두 달 사이 200개를 그렸고 그 후로도 100개를 더 그렸다. 당시 목표는 ‘원하는 색’ 만들기였다. 작은 캔버스에 타원이나 사각형을 그린 뒤 그 안에서 색을 만들었다. 색을 칠하거나 물감을 반복적으로 쌓았고, 물과 보드카를 섞어 색이 숙성되기를 기다리기도 했다. 독일 물에 프랑스 소금까지 써가며 실험했다. 물질성과 수행성을 거부하면서 색채를 통한 정신적 해방을 추구했다. 당시 왜 이렇게 몰두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관련 작품들에 제목을 붙일 수도 없어 지금까지 ‘무제(Untitled)’로 통했다. 모네의 수련을 감상한 뒤 비로소 이 작품에 제목이 생겼다. 바로 ‘새로운 수련(New Water Lilies)’이다.

    김재준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민대 경상대학장, 국민대 도서관장과 박물관장, 한국예술경영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국민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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