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식품 새벽배송을 알리는 쿠팡 홈페이지 화면. [사진 제공 · 쿠팡]
있다. 로켓배송도 된다. ‘내일 도착 보장’이란 문구가 구세주처럼 느껴졌다. 밤 11시 20분 주문을 마쳤다. 그다음 날 출근길에 쿠팡 애플리케이션(앱)을 열어보니 ‘개구쟁이 스머프 사다리게임’은 모두가 잠든 시간에 고속도로를 달렸다. 새벽 0시 23분 대구를 출발해 3시 54분 경기 덕평에 도착, 그리고 21분 후인 4시 15분 서울로 향했다. 이 보드게임은 오전 10시 서울 송파물류센터로 들어왔고, 정오 무렵 물류센터를 나와 오후 3시 15분 우리 집에 도착했다. 주문한 지 16시간 만에 대구에서 서울로 이동을 완료한 것이다.
신선식품의 ‘온 디멘드’
[지호영 기자]
2010년 초반 우후죽순으로 난립했던 소셜커머스 가운데 현재 생존 중인 업체는 쿠팡, 티몬, 위메프 3사뿐인데, 그중에서도 쿠팡의 존재감이 두드러진다. 쿠팡은 2018년 매출이 5조 원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되는 반면, 티몬과 위메프의 매출은 각각 5000억 원이 되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최근 일본 소프트뱅크가 세운 비전펀드가 쿠팡에 20억 달러(약 2조2500억 원)를 투자하면서 쿠팡의 기업 가치는 5조 원에서 10조 원으로 뛰어올랐다. 국내 유통 대기업 이마트·신세계와 롯데쇼핑의 시가총액은 각각 8조 원, 6조 원이다. 미국 경제매체 ‘비즈니스 인사이더’는 최근 김범석 쿠팡 대표를 인터뷰하면서 쿠팡을 ‘한국의 아마존(the Amazon of South Korea)’이라고 소개했다.
쿠팡은 새해에 신선식품 새벽배송인 ‘로켓프레시’ 서비스를 제주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할 예정이다. [사진 제공 · 쿠팡]
앞으로는 모든 쇼핑을 온라인(주로 모바일)으로 대체하고도 불편 없이 살 수 있을까. 최근 3주간 되도록 대형마트나 동네슈퍼에 가지 않고 쿠팡의 로켓배송 및 새벽배송으로 4인 가족 살림을 꾸려봤다. 소감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①워킹맘의 명민한 비서다 ②안되는 게 거의 없지만, 다 되는 건 아니다 ③품질 면에선 마켓컬리보다 한 수 아래다 ④쌓이는 ‘택배쓰레기’가 마음에 걸린다.
특히 신선식품이나 간편가정식(Home Meal Replacement) 위주로 온라인 쇼핑이 급성장하는 것은 1인 가구, 그리고 맞벌이 가구에 힘입은 바 크다. 김난도 서울대 교수팀은 ‘트렌드 코리아 2019’에서 새해 트렌드 중 하나로 ‘밥 잘 사주는 예쁜 엄마’, 즉 집안일을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비) 있게 처리하고 남은 시간은 자기계발에 투자하는 ‘밀레니얼 가족’의 여성을 꼽았다. 퇴근길, 혹은 아이들이 잠들어 한숨 돌리는 한밤중에 식재료를 스마트폰으로 주문하고 다음 날 아침 배송 받는 것은 정말 가성비 높은 일이다. 마트에 다녀오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을뿐더러, 무거운 짐을 들 필요도 없으니까. 한밤에 내일 아침 아이들이 먹을 우유와 달걀이 떨어졌다는 것을 알게 돼도 근처 편의점으로 뛰어가지 않아도 된다. 쿠팡은 ‘로켓와우’라는 멤버십(월 2900원)에 가입한 고객에 한해 새벽배송을 해주는데, 구매금액에 제한을 두지 않기 때문에 우유 1팩을 사더라도 무료로 새벽배송을 받을 수 있다.
자연히 주말에 일주일치 장을 보려고 사람 많고 복잡한 대형마트에 가지 않으니 시간이 한결 여유롭다. 아이들의 소비 형태도 달라졌다. 작은아이에게 약속한 장난감을 사주기로 한 주말, “내일 장난감할인점에 가자”고 했더니 “내일 낮이면 택배아저씨가 올 테니, 지금 쿠팡으로 주문해달라”고 한다. 부모로서도 장난감할인점에서 ‘다른 것도 사달라’고 떼쓰는 상황을 예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온라인 쇼핑이 더 낫다.
온라인 커머스를 연구하는 전성민 가천대 경영대학 교수는 “신선식품 온라인 주문이 증가하는 것은 한국뿐 아니라 미국, 중국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라며 “이제 신선식품 영역에서도 콘텐츠시장처럼 ‘온 디멘드(On Demand)’ 트렌드가 등장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영화, 드라마, 예능프로그램 등을 원하는 것만 골라 IPTV에서 빌려 보는 것처럼, 신선식품도 대형마트에서 왕창 장을 봐 냉장고에 보관하는 것에서 벗어나 그때그때 필요한 것만 온라인으로 주문해 배송 받는 소비 패턴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3주간 쿠팡에서 주문한 물건은 이렇다. 우유, 달걀, 두부, 바나나, 방울토마토, 닭고기, 새송이버섯, 아보카도, 북어해장국, 고무장갑, 렌즈세척액, 두루마리 휴지, 바디로션, 바디워시…. 매일 소비하는 우유는 이마트와 가격이 같고(서울우유 1급A 1000㎖, 2570원), 달걀은 케이스 안에 에어캡을 한 장 깔아 파손을 방지해 만족스러웠다. 고무장갑처럼 2~3일 후 온다 해도 치명적으로 불편하지 않은 것까지 주문 이튿날 배달해주니 황송한 기분도 들었다.
환경보호와 충돌하는 ‘밥 잘 사주는 예쁜 엄마’
품질은 프리미엄을 지향하는 마켓컬리가 한 수 위. ‘삼립식빵’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빵이 냉동상태로 배달되는 듯했다. 달걀, 우유, 버터 없이 식물성으로만 만든다는 어느 브랜드의 빵을 주문했다 꽁꽁 언 상태로 배달돼 아침식사로 바로 먹을 수 없었고, 유통기한이 무려 2019년 9월까지라 찜찜한 기분도 들었다. 아보카도 4개를 샀는데, 그중 3개가 썩은 상태로 온 적도 있었다. 간편가정식도 대부분 냉동식품이라 손이 가는 것이 별로 없었다.
냉동만두, 우유, 달걀, 대파 등 2만3000원어치를 주문했더니 스티로폼 상자 2개, 종이상자 1개, 비닐팩 1개, 아이스팩 2개 등 ‘택배쓰레기’가 발생했다. [지호영 기자]
한국환경공단에 따르면 스티로폼이 속하는 ‘발포수지류’는 하루에 117.1t씩 재활용 가능 자원으로 분리 배출된다고 한다(2016년 기준). 이는 종이류(4602.5t)나 유리병류(1662.8t)에 비해 적은 양이지만 재활용 면에서는 더 불리하다. 2018년 봄 ‘비닐대란’이 났을 때 많은 지역에서 스티로폼도 비닐류와 함께 수거 불가(不可) 대상으로 취급된 바 있다. 폐스티로폼은 녹여서 잉곳(ingot·덩어리)으로 만들어 중국으로 수출, 건축용 합성목재나 액자 몰딩 등을 만드는 데 사용되지만 최근 몇 년 새 잉곳 가격이 떨어져 재활용률이 낮아지고 있다고 한다.
환경부 관계자는 “스티로폼은 되도록 사용하지 않는 게 환경에 좋지만, 대체재가 없다는 것이 고민거리”라고 말했다. 한 온라인 유통업계 관계자는 “쓰레기를 줄이려고 스티로폼 상자 등을 사용하지 않으면 상품이 파손돼 고객 불만이 높아질 수 있어 고객 만족과 환경보호 사이에서 딜레마를 느낀다”고 말했다. 한 물류업계 관계자는 “환경에 덜 해롭거나 친환경적인 택배상자를 개발하려는 시도가 많이 있지만, 아직까지는 기존 종이상자나 스티로폼 상자를 대체하기엔 역부족”이라고 말했다.
신선식품 새벽배송이 진정한 대세로 자리 잡으려면 환경에 대한 소비자의 죄책감도 덜어주는 솔루션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 김난도 교수팀도 새해 트렌드 중 하나로 꼽은 것이 ‘필(必)환경’이다. 환경을 생각하는 소비가 그동안 ‘하면 좋은 것’이었다면, 이제는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선택해야 하는 것’이 됐다는 뜻에서다.
기저귀와 맥주가 같이 있는 이유는?
쿠팡의 인천 물류센터(왼쪽)와 사진작가 안드레아스 구르스키가 촬영한 미국 아마존 물류센터 내부 사진. 쿠팡 물류센터는 최적 피킹(picking) 동선 등을 고려한 상품 배치 등 아마존과 유사한 방식으로 운영된다. [강지남 기자]
쿠팡이든, 쿠팡을 앞지르는 새로운 강자가 등장하든, 혹은 5호16국 시대와 같은 상황이 펼쳐지든 앞으로는 새벽배송, 나아가 당일배송 또는 몇 시간 내 배송이 등장해 우리의 일상생활을 바꿔놓을 것이다. 전성민 교수는 “앞으로는 유통업계가 빠르고 정확하게 신선식품을 배송하는 온라인업체와 놀이터처럼 재미있는 경험을 주는 오프라인업체로 양분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영국 온라인 식료품업체 오카도(Okado)는 컴퓨터가 카메라로 신선식품 선도를 파악해 관리하는 IT를 개발 중이다. 이런 기술이 실제 적용되면 신선식품의 물류비용은 줄고 물류 속도는 빨라진다. 한편 중국 온라인 유통업체 알리바바는 최근 ‘허마셴셩(盒馬鮮生)’이라는 오프라인 매장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허마셴셩은 요리사가 상주해 고객이 직접 구매한 식재료로 요리를 해주고 3km 이내 고객에게는 30분 안에 배송하는 서비스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큰아이가 사촌 형이 가진 ‘카탄의 개척자’라는 보드게임을 사고 싶다고 졸랐다. 오전 7시 50분, 쿠팡에서 검색해보니 이번에는 ‘당일배송’ 문구가 뜬다. 쿠팡은 11월부터 일부 지역, 일부 상품에 한해 ‘오전 9시 이전 주문 시 당일배송’ 서비스를 개시했는데, 그에 해당하는 상품인 것이다. 결제를 마치고 “오늘 오후에 학원 다녀오면 와 있을 것 같다”고 하니, 아이가 “오, 예!” 한다. 빠른 배송의 소비자 유인 효과를 확인한 순간이었다. 임일 교수는 “새벽배송, 당일배송 서비스가 존재하면 소비자는 당장 급한 물건이 아니라도 빠른 배송을 선택하기 마련”이라며 “온라인 유통업계에서 좀 더 빠른 배송은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