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전망대에서 바라본 임진강.
경기 연천 일대를 둘러본 네 번째 휴전선 기행은 비와의 전투였다. 그동안 용케 피하다가 된통 걸린 셈이다. 촬영을 제대로 못 하는가 하면, 철책로를 걷다가 중단하는 사태까지 빚어졌다.
# 통일의 열쇠…감시카메라 도입
7월 22일 오전 호우주의보가 내려진 가운데 육군 5사단을 방문했다. 5사단의 별칭은 열쇠부대. ‘통일의 문을 여는 열쇠’라는 뜻이다. 1948년 대한민국 건국과 함께 창설한 5여단이 모체다. 6·25전쟁 중 가평·춘천 탈환 전투, 피의 능선 전투, 가칠봉 전투, 351고지 전투 등에서 혁혁한 전과를 거뒀다.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단장(1955년 7월~57년 3월)을 지내고 대장 전역식(1963년 8월)을 한 부대로도 유명하다. 휴전선을 지키는 전방부대 중 처음으로 과학화 시스템을 도입한 5사단은 현재 감시카메라 120여 대를 갖추고 있다.
사단장 주창환 소장과 만난 후 열쇠전망대로 향했다. 사단 공보장교 황재환 중위가 안내를 맡았는데, 도중에 예하 ·#52059;·#52059;연대 1대대 정훈장교가 합류했다. 오후 2시쯤 민간인출입통제선(민통선) 검문소를 통과해 열쇠전망대에 올랐다. 다행히 비가 멎었다.
입구 정면에 티본(T-Bone)능선 전투 기념비가 있다. 1952년 7월 티본능선 옆 에리고지에서 미군 넬리 중위가 이끄는 소대가 중공군 1개 중대와 조우해 접전 끝에 승리했다. 이때 전사한 부대원 8명을 애도하는 글이 기념비에 적혀 있다. 그 오른쪽에 있는 충현탑도 미군의 공적을 기리는 기념물이다. 그들은 낯선 이국땅에서 죽어가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전망대 내부는 토굴 모양이다. 전투 관련 자료와 기념물 등을 전시해놓았는데 출구 쪽에 있는 ‘통일의 나무’가 눈길을 끈다. 방문객들이 나뭇잎 모양의 종이에 통일에 대한 염원을 적어 천장에 매달아놓은 것이다. 그중 이런 글이 눈에 띄었다.
‘통일을 기원합니다! 아들! GOP(일반 전방초소) 잘 지키는 씩씩한 군인의 아들이 되길….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자. 2013. 7. 6 엄마.’
빗줄기는 가늘어졌지만 시계가 흐려 사진을 찍는 데는 여전히 어려움이 많았다. 비무장지대의 별명 중 하나가 ‘천의 얼굴’이다. 그만큼 다양한 모습이라는 얘기다. 다른 지역도 그렇지만 이곳 비무장지대 모양도 독특하다. 강원 인제, 양구 등 동부전선의 험한 지형과 평야지대인 중부전선 철원의 지형이 반씩 섞인 모양이다. 가운데 평탄한 곳에는 수풀이 우거졌고 좌우측으로 굴곡이 심한 곡선형 철책을 따라 아군 초소가 늘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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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보다 줄어든 비무장지대
초소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병사들이 총기 점검을 하고 있다.
그간 휴전선 탐방을 하면서 아군 GP(경계초소)들을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생생하게 본 적이 없다. 전망대 왼쪽에 작은 교회가 있다. GOP부대 장병이 예배 보는 곳인데, 철책(남방한계선)에서 가장 가까운 교회라고 한다. 비가 그치면서 비무장지대 작은 봉우리 사이로 안개가 몽실몽실 솟아난다.
전망대에서 내려와 인근 한강소초에 들렀다. 거짓말같이 햇살이 쏟아진다. 변덕스러운 날씨긴 해도 햇살은 반가운 법. 장마철처럼 우중충한 남북관계에도 햇살이 들기를 소망한다.
경계근무를 마치고 복귀한 초병들이 총기 점검을 하는 걸 지켜본 후 철책 지대로 이동했다. 소초장 임준호 중위가 앞장섰다. 철책을 따라 한강수로라는 큰 냇물이 있는데, 황토색 물이 콸콸 흐른다. 호우 발생 시 수문을 열고 닫는 것도 이 소초의 주요 임무다. 수문 주변으로 과거 북한군이 4차례 침투한 사례가 있다고 한다.
이 일대에서 가장 가파르다는 철책 계단이 나타났다. 고작 5분 걸었는데 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초소 근무 중인 정우성 일병은 “더운 것보다 추운 게 낫다”고 했다. 1월 전입했다는 그는 GOP 근무에 대해 “괜찮은 것 같다. 할 만하다”며 당찬 모습을 보였다.
“기왕 군생활 하는 거 최전방을 경험해보고 싶었다. 애초 GP 근무를 자원하려 했는데 가족 반대가 심해 뜻을 접었다.”
“한 민족끼리 서로 총을 겨누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는 “여기선 적일 뿐”이라고 대답했다.
한 시간쯤 철책을 걸은 후 28사단 공보장교 박정훈 중위가 기다리는 대광리역으로 이동했다. 약속시각인 오후 4시가 조금 지났다.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도로 왼쪽으로 임진강 물결이 사납게 넘실거린다. 도로 좌우측 곳곳에 ‘미확인 지뢰지대’라고 쓰인 팻말이 박혀 있다. 접경지역에 널린 지뢰는 한반도가 여전히 전쟁 중임을 뜻하는 중요한 물증이다.
오후 5시 태풍전망대에 도착했다. 다행히 비가 그쳤다. 이 지역은 신라가 당나라 20만 대군을 격파했던 곳으로, 6·25전쟁 중에는 남북한군의 중요 이동로였다. 북한군 4사단이 이곳으로 내려와 서울에 진출했고, 뒷날 국군 1사단이 이곳을 경유해 평양에 입성했다.
전망대 전방에서 S자 형태로 북에서 남으로 굽이굽이 흐르는 강이 임진강이다. 임진강은 전망대 서쪽으로 2km 떨어진 필승교에서 남한 영토로 영입된 후 연천군 전곡면 도감포에서 한탄강과 합류해 서해로 빠져나간다.
# 임진강에서 고기 잡는 북한군
정면에 능선과 능선 사이로 황토색 길이 보이는데, 실제로는 북한군의 추진철책이다. 임진강의 일부 구간이 군사분계선 구실을 하기 때문에 이곳 휴전선 모양은 매우 특이하다. 좌우측으로 조금씩 굽어지고 휘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한쪽으로 휜 사선형이다. 전망대에서 보면 오른쪽으로 아군 철책이 임진강을 끼고 북쪽 깊숙이 올라가 있다.
전방 비무장지대에는 격전지로 꼽히는 베티고지와 노리고지가 있다. 베티고지는 정전협정 체결 직전인 1953년 7월 15~16일 국군 1사단 예하 소대 병력이 중공군 연대 병력과 19차례 싸워 끝내 승리한 격전지다.
베티고지의 오른쪽에 있는 노리고지 역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1952년 2월 국군 1사단과 중공군 40사단이 사흘간 교전을 벌인 끝에 아군 700여 명과 적군 2700여 명이 전사했다. 그들의 피가 임진강을 붉게 물들였다고 해서 피의 능선이라고도 한다. 원래 이름은 노루고지다. 노루가 누운 형상이라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그런데 미군이 ‘노루’ 발음을 잘 못 해 ‘노리’라고 한 것이 굳어져 노리고지로 바뀌었다고 한다.
베티고지 왼쪽으로는 정상에 서면 동두천까지 보인다는 마량산이 있다. 6·25전쟁 때 호주군이 싸웠던 곳인데, 당시 호주군을 이끌던 장교가 뒷날 호주 육군참모총장에 올랐다고 한다.
전망대에서 내려와 임진강과 마주한 철책로를 걸었다. 고가초소에서 근무 중인 초병은 “북한군은 종종 임진강에서 고기를 잡는다”며 “북한군 병사가 군사분계선 50m 지점까지 다가왔을 때는 정말 긴장했다”고 말했다. “전방에 온 후 대적관이 많이 바뀌었다”는 그는 “여자친구가 걱정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만큼 검증된 남자라고 좋아한다”고 응수해 취재진을 웃게 했다.
유난히 날벌레가 많았다. 알고 보니 말라리아 위험 지역이다. 이곳에 근무하는 장병은 모두 정기적으로 예방약을 복용한다.
철책길을 걷는데 다시 비가 내린다. 며칠간의 폭우로 땅이 움푹 패여 철조망 틈이 벌어진 곳도 있다. 토사가 흘러내려 위험한 지점에서는 교통호 길로 옮겨 걸었다. 지난주엔 토사로 일부 구간에서 철책 자체가 무너졌다니, 얼마나 큰 비가 내렸는지 짐작할 만하다.
이곳 초소들은 번개를 자주 맞는다고 해서 번개초소라고도 부른다. 과거에 철책선 안쪽 클레이모어(군용 대인지뢰)가 번개를 맞아 폭발하는 사고가 더러 일어났는데, 무너진 철책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종종 교전이 발생했다고 한다.
한 시간쯤 걸으면서 임진강 방향이 꺾이는 지점을 보려던 계획을 취소해야 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폭우가 쏟아졌기 때문이다. 공보장교가 서둘러 인근 소초로 안내했다.
이곳 병사들은 화기소대 소속이다. 이들 임무는 초소 경계근무가 아니라 박격포 진지에 들어가는 것이다. 병사 대여섯 명과 얘기를 나눴다. “낙(樂)이 뭐냐”는 질문에 한 병사가 “시간 가는 것”이라고 답하자 다른 병사가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그게 아니지” 하면서 “사랑하는 동기와 함께 있는 것”이라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다정한 모습으로 TV를 보는 화기대대 소속 병사들.(왼쪽) 안개에 싸인 백마고지.(오른쪽)
844명의 이름이 적힌 백마고지 전투 전사자비.
병사들의 밝은 모습에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폭우가 아니었다면 이들을 못 만났을 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니 폭우가 그다지 원망스럽지 않다. 취재를 방해하는 것 같지만 도와주는 면도 있으니.
오후 6시 반 소초로 올라온 차를 타고 하산했다. 도로에 황톳물이 냇물처럼 졸졸 흐른다. 운전병이 침수된 구간을 피해가며 조심조심 운전했다. 7시쯤 민통선 인근 마을로 들어갔다. 취재진을 보고 개가 짖는 바람에 고즈넉한 동네가 잠시 시끄러워졌다.
다음 날 오전 9시 숙소를 나섰다. 연대 정훈과장 이재우 대위의 안내로 6·25전쟁 최대 격전지로 꼽히는 백마고지로 향했다. 3번 국도 왼쪽으로 차탄천이 흐르고 오른쪽으로는 경원선 철로가 뻗어 있다. 멀리 고대산(832m)에서 안개가 피어오른다. 등산이 허용되는 산 가운데 휴전선에 가장 가까운 고대산은 연천과 철원의 경계를 이룬다.
# 24번이나 주인이 바뀐 백마고지
열쇠전망대 1층에 있는 ‘통일의 나무’(위). 경원선 종점 백마고지역.
백마고지 전투가 벌어진 것은 1952년 10월 6~15일. 국군 9사단과 중공군 3개 사단이 열흘간 12차례 전투를 벌이는 동안 고지 주인이 24회나 바뀌었다. 10차 전투에서 강승우 소위를 비롯한 아군 육탄 3용사는 산 정상에 있는 적의 고지로 돌진해 수류탄으로 기관총 진지를 파괴하고 장렬히 산화했다. 양측 사상자가 1만7500여 명(적군 1만4000명, 아군 3500여 명)에 달한다.
백마를 닮아 백마고지라는데, 앞에서 봐서는 잘 모르겠다. 안내장교에 따르면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말 모양이 뚜렷이 나타난다고 한다. 순국용사들의 혼이 서린 듯 안개가 자욱하다. 빗줄기가 가늘어지는가 싶더니 다시 굵어진다. 백마고지 앞마을 풍경은 평화롭기만 하다.
어느 누구의 죽음도 나 자신의 상실이니
나는 인류에 포함된 존재이기 때문이라
그러하니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는지
사람을 보내어 알아보려 하지 말라
종은 바로 그대를 위해 울리는 것이기에
- 존 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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