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화성시 한 미곡처리장에서 관계자가 저온저장고에 쌓인 벼를 살펴보고 있다. [뉴시스]
초과 생산된 쌀을 정부가 의무적으로 매수한다는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놓고 여야가 격돌하고 있다. 매년 소비량보다 많이 생산되는 쌀을 어떻게 처리할지, 국내 농업 구조를 어떤 방식으로 개선할지를 둘러싼 해묵은 난제가 이번 정기국회에서 이슈로 부상한 것이다. 정부가 혈세로 쌀을 대량으로 사들여 시장에서 격리하는 인위적 개입이 의무화되면 자칫 쌀 시장이 더 왜곡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윤 대통령 “돈을 농촌 개발에 써야 하는데…”
더불어민주당(민주당)은 10월 19일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농식품위) 전체회의에서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의결했다. 12일 안건조정위원회에서 개정안을 사실상 단독 처리해 전체회의로 넘긴 지 일주일 만이다. 향후 개정안은 법제사법위원회(법사위)를 거쳐 본회의에서 통과되면 효력이 발생한다. 양곡관리법 개정에 반대하는 국민의힘 김도읍 의원이 법사위원장을 맡고 있어 본회의 상정에 난항이 예상되나, 거야(巨野) 민주당의 강행 처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끝내 국회에서 개정안이 통과될 경우 윤석열 대통령이 법률안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이번 개정안에 대해 윤 대통령은 10월 20일 대통령실 출근길에 기자들과 만나 “법으로 (과잉 생산된 쌀) 매입을 의무화하면 과잉공급 물량을 결국 폐기해야 한다. 농업 재정의 낭비가 심각하다. 그런 돈을 농촌 개발에 써야 하는데 이것(양곡관리법 개정안)이 농민에게 별로 도움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윤 대통령은 “국회에서 좀 더 심도 있는 논의를 해주길 당부한다”고 덧붙였다.민주당이 강행 추진하는 양곡관리법 개정안의 주요 내용은 과잉생산된 쌀을 정부가 매입하는 ‘시장격리 제도 의무화’와 논에 벼가 아닌 작물 재배를 유도하는 ‘타(他)작물 재배 지원’이다. “기후위기로 인한 농업 문제는 아주 심각한 국제적 안보전략 문제가 될 수 있다”(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10월 12일 최고위원회 발언)는 문제의식에 따른 ‘쌀값 안정화’가 민주당의 개정 취지다. 반면 여당과 주무부처인 농림축산식품부(농식품부)는 시장격리가 의무화되면 “쌀 과잉공급을 심화하고 재정 부담을 가중해 미래 농업 발전을 저해할 수 있다”(국민의힘 박정하 수석대변인의 9월 29일 브리핑), “시장이 왜곡될 가능성이 있다”(정황근 농식품부 장관의 10월 4일 국회 국정감사 발언)며 반대하고 있다. 다만 여당도 작물 다양화를 통한 쌀 재배 면적의 점진적 감축 필요성에 공감했고(10월 18일 양곡관리법 관련 당정협의회), 농식품부는 비슷한 취지의 ‘전략작물직불제도’를 확대 추진할 방침이다. 결국 논란의 핵심은 시장격리 의무화인 것이다.
현행 양곡관리법에 따라 정부는 이미 과잉생산된 쌀을 시장에서 격리하고 있다. 쌀이 예상 수요량의 3% 이상 더 생산되거나 쌀값이 5% 넘게 떨어지면 정부 판단에 따라 시장격리 조치가 이뤄진다. 이번 개정안은 정부의 쌀 시장격리를 의무조항으로 둬 사실상 상시화하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정부가 이미 쌀 시장격리에 막대한 비용을 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농식품부가 국민의힘 정희용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2005~2021년 9번에 걸쳐 쌀 298만2000t을 시장에서 격리하는 데 4조6780억 원 예산이 쓰였다. 시장격리를 위해 매입된 쌀은 보관, 가공 등 모든 단계에서 추가 비용을 유발한다. 일부가 주정(酒精)용으로 팔리지만 판매 수입보다 손실이 더 큰 실정이다. 국내 주류업계가 주정 생산에 주로 쓰는 외국산 고구마, 타피오카 등 원료에 비해 쌀의 가격 경쟁력도 낮다.
평년작만 돼도 매년 쌀 20만t 초과 생산
한국후계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 등 농민 단체가 8월 29일 서울 용산구 서울역 인근에서 ‘농가경영 불안 해소 대책 촉구’ 시위를 마치고 정부에 항의하는 뜻에서 쌀을 버리고 있다. [뉴시스]
시장격리가 의무화될 경우 재정 부담은 어느 정도일까. 한국농촌경제연구원(KREI)은 ‘쌀 시장격리 의무화의 영향 분석’ 보고서에서 이번 개정안으로 시장격리가 의무화될 경우 2030년 초과 생산되는 쌀은 64만1000t, 시장격리에 필요한 비용은 한 해 1조4000억 원 이상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KREI는 해당 보고서에서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시행되면 쌀 가격 안정화에 따른 벼 재배 농가의 소득 안정성이 제고되는 효과가 있는 반면, 벼 재배 면적 감소폭 축소와 쌀 소비 감소폭 확대 등으로 과잉공급 규모가 점차 증대돼 격리에 소요되는 재정도 지속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고 밝혔다. 쌀 시장격리에 지나치게 많은 재정이 쓰이면 식량안보 확보, 농업 경쟁력 강화 등 다른 정책이 위축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부가 의무적으로 과잉생산된 쌀을 사들이면, 농민 처지에선 재배 면적을 줄일 유인이 적어진다. 밀(0.5%), 옥수수(0.7%), 콩(6.6%)과 같이 자급률이 극히 낮은 작물 재배를 늘리기보다, 정부의 수매로 안정된 가격을 보장받는 쌀농사를 확대하는 게 농가로선 이득이기 때문이다. 밭농업(61.9%)에 비해 높은 논농업(98.6%)의 기계화율 등 다른 변수를 고려하면 시장격리 의무화에 따라 쌀 재배가 늘어날 가능성은 더 커진다. 결과적으로 농업 시장의 수요-공급 불균형이 더 심화되는 것이다. 한국농업경제학회장을 지낸 한두봉 고려대 식품자원경제학과 교수는 “시장의 자체 조절 기능을 정상화하지 않고 정부가 쌀을 사들이는 인위적 공급 조절 정책은 자칫 농민에게 ‘쌀농사를 늘려라’는 잘못된 시그널을 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임정빈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교수는 “벼 외에 다양한 작물을 경작하게끔 유도해 쌀에 편중된 식량자급률을 높여야 한다”면서 “농가가 다양한 작물을 재배해도 쌀과 비슷한 정도의 소득을 거둘 수 있도록 정책을 설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의 잘못된 쌀 수매 정책에 따른 부작용은 해외 사례에서도 확인된다. 태국 정부는 2011년 시장가격보다 최대 50% 높은 값에 농가로부터 쌀을 사들이는 정책을 도입했다. 당시 잉락 친나왓 총리와 여당이 주요 지지 기반인 농촌 표심을 의식해 “농가 소득을 높이겠다”며 추진한 수매 제도였다. 이듬해 태국 쌀 생산량은 20% 이상 증가해 정부의 수매 비용도 덩달아 늘었다. 결국 정책 시행 2년 만에 태국 정부는 4조 원에 가까운 재정 부담을 지게 됐다. 쌀 수매를 둘러싼 비리 사건까지 터져 잉락 총리는 실각했다. 한 농업 전문가는 “당시 태국의 과도한 시장 개입 정책은 쌀 수급을 왜곡하고 정부 재정을 악화했다”면서 “과거 태국이 추진한 쌀 수매 정책과 현재 민주당의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비교하면 각론은 다르나 핵심 포인트는 결국 비슷해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가 일정한 가격에 쌀을 사들인다는 믿음이 자리 잡으면 농가로선 고품질 쌀보다 재배하기 편한 품종의 쌀을 대량 생산할 유인이 커진다”며 “2010년대 초반 태국도 정부의 잘못된 수매 정책으로 쌀 품질이 낮아지면서 수출이 30%가량 줄어든 바 있다”고 덧붙였다.
일각에는 전쟁이나 천재지변 같은 상황에 대비해 국가가 일정량의 쌀을 확보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비상시 안정적 식량 확보를 위한 제도로 2005년 ‘공공비축제도’가 도입돼 이미 시행되고 있다. 올해 정부는 공공비축미로 지난해보다 10만t 많은 45만t을 확보할 방침이다. 공공비축미도 당장 시장에 풀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상당량의 쌀이 추가로 시장에서 격리되는 셈이다. 올해 시장격리 물량과 공공비축미는 모두 90만t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올해 예상되는 쌀 생산량의 23.3%에 달하는 양이다.
이미 올해 쌀 생산량 23% 시장격리 예정
전문가들은 섣부른 시장격리 의무화보다 쌀 수요 증대와 작물 다변화 등 근본 대책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한두봉 교수는 “쌀값 안정을 위해선 시장 기능의 정상화가 필요하다”며 “쌀 공급은 많고 수요는 줄어드는 상황에서 수요를 제고하지 않은 채 당장 시장에서 물량을 뺄 생각만 하는 건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임정빈 교수는 “시장격리 의무화를 둘러싼 논쟁은 사회적 갈등만 유발할 뿐, 근본적인 문제 해결책이 되긴 어렵다고 본다”며 “농업 정책의 궁극적 목표는 기후변화 등 위기 속에서 식량안보를 확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김우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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