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동작구 아파트 신축 현장. [뉴스1]
부동산 분양대행업체 관계자 K 씨는 최근 부동산시장 상황에 대해 푸념하듯 이렇게 말했다. 연초부터 수도권 지역에서 준비해온 분양 현장들이 거의 중단될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다. 그의 말대로 최근 부동산시장이 가파른 금리인상과 경기침체 우려로 급랭하면서 각종 관련 지표가 모두 하락세로 돌아섰다.
주택매매가지수, 금융위기 이후 최대치 하락
특히 집값 관련 지표는 문자 그대로 곤두박질치고 있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대표적인 지표인 주택매매가지수의 경우 9월 전국적으로 0.49% 떨어졌다. 월간 단위로는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인 2009년 1월(-0.55%) 이후 13년 8개월 만에 최대치다. 아파트 실거래가 상황은 더 심각하다. 올해 8월 1.88% 떨어지면서 누적 하락률이 -5.16%에 달했다. 같은 기간 종전 최대 기록인 2010년(-1.71%)은 물론 2006년 실거래가지수 조사 이래 연간 최대 하락률 기록(2008년 -4.01%)마저 넘어섰다.이런 상황에서 실수요자를 끌어들일 만한 거의 유일한 재료는 낮은 분양가다. 분양받는 즉시 시세차익을 기대할 수 있는 수준으로 주변 시세보다 낮게 가격을 책정함으로써 실수요자는 물론, 여윳돈 투자자까지 끌어들인다는 전략이다. K 씨는 이런 판단에 따라 시행업체와 분양가 수준을 놓고 줄다리기에 나섰지만 협상은 난항을 거듭하고 있다. 시행업체가 고환율-고물가로 인한 건설자재 가격 상승, 고금리에 따른 사업조달금리 부담 증가 등을 이유로 한 푼이라도 더 받아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기 때문이다.
요즘 주택업계에는 K 씨와 같은 고민에 빠진 이가 적잖다고 한다. 여기에는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꺼지지 않을 것처럼 뜨겁던 분양시장 열기에 대한 미련이 깔려 있다. 실제로 부동산 가격이 날개 없는 추락장세를 보이는 가운데 새 아파트 분양가는 지난달에도 1% 이상 오르는 등 나 홀로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에 따르면 9월 말 기준 전국 민간아파트 평균 분양가는 전월 대비 1.13% 상승했다. 1년 전과 비교하면 5.90% 올랐다. 특히 전월(1.14%)에 이어 상승세를 이어간 것이 눈에 띈다. 지역별로 보면 광주(-1.72%)와 대구(-0.09%), 충남(-0.02%)을 제외한 나머지 시도가 모두 올랐다. 특히 경북(4.40%), 전남(4.33%), 대전(3.82%), 서울(2.78%), 경기(2.59%) 등은 전월 대비 2% 이상 상승했다.
전용면적별 분양가 상승세도 두드러진다. 소형(60㎡ 이하) 아파트가 1.66%, 중소형(60㎡ 초과~85㎡ 이하)이 1.17%, 대형(102㎡ 초과)이 0.55% 각각 올랐다. 다만 중대형(85㎡ 초과~102㎡ 이하) 아파트는 3.29% 떨어졌다. 그러나 1년 전과 비교하면 소형(8.09%), 중소형(6.98%), 중대형(19.4%), 대형(14.26%) 등이 모두 크게 상승했다.
분양가가 크게 오르면서 핵심 원재료인 땅값이 분양가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낮아졌다. 이는 업체들이 챙겨가는 이익이 그만큼 커졌다는 것을 시사한다. HUG가 지난달부터 통계청 승인을 받아 공개하는 ‘분양가 중 대지비 비율’(‘대지비 비율’)을 보면 2018~2020년 전국은 36%였지만 2021년 28%로 떨어졌고, 올해(1~9월 기준)도 33%에 머물렀다. 서울의 경우 땅값이 분양가의 60% 정도에 육박했다 2021년 48%로 떨어졌고, 올해는 45%로 더 내려앉았다.
열기 뜨겁던 청약경쟁률도 크게 하락
집값 하락이 이어지면서 8월 말 기준 전국 미분양 주택은 3만2722채로 집계됐다. [GETTYIMAGES]
하지만 이제 시장이 바뀌었고, 이런 상황을 더는 기대하기 어려운 분위기다. 무엇보다 청약 경쟁률이 크게 낮아지고 있다. 부동산 정보업체 부동산R114에 따르면 1∼9월 전국 아파트 평균 청약 경쟁률은 8.6 대 1로 조사됐다. 2021년 전체 평균 청약 경쟁률(19.5 대 1)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 기간 평균 당첨 가점도 23점으로 지난해(34점)보다 11점 낮아졌다. 지난해 서울 서초구 반포동 래미안원베일리와 경기 광주시 힐스테이트초월역, 오포자이디오브 등 3개 단지에서 만점인 84점 당첨자가 나온 것과 달리, 올해는 80점 이상 당첨자가 나온 아파트 단지가 한 곳도 없었다.
미분양 아파트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8월 말 기준 전국 미분양 주택은 3만2722채로 집계됐다. 2020년 5월(3만3894채) 이후 26개월 만에 다시 3만 채를 넘어선 지난달(3만1284채)보다 4.6% 더 늘었다. 지역별로 보면 수도권이 5012채로 전월(4529채) 대비 10.7%(483채) 증가했다. 비수도권 지역은 2만7710채로 전월(2만6755채) 대비 3.6%(955채) 늘어났다. 규모별로는 85㎡ 초과가 3065채로 전월(2740채) 대비 11.9%(325채), 85㎡ 이하는 2만9657채로 전월(2만8544채) 대비 3.9%(1113채) 증가했다. 비선호 물량따로 없이 미분양 아파트가 발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도 건설업체들은 오히려 분양 물량을 늘리고 있다. 부동산 플랫폼 직방에 따르면 10월 전국 74개 사업장에서 5만9911채가 분양될 예정이다. 이 가운데 일반분양만 4만7534채에 달한다. 지난해 같은 기간(4만2120채·일반분양 3만1151채) 대비 42% 증가한 물량이다. 그동안 업계는 새 정부의 부동산 규제완화 정책에 대한 기대감과 고금리, 주택 공사비 급등 등 다양한 이슈로 분양 시기를 늦춰왔다. 부동산시장이 빠르게 냉각하자 분위기를 관망하는 움직임도 있었다. 그 결과 ‘봄·가을 분양 성수기’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공급 물량이 적었다. 올해 최다 물량이 풀린 시기는 ‘비수기’로 분류되는 1월(2만5000여 채)과 8월(2만6000여 채)이다. 반면 가을 성수기인 9월의 경우 분양물량이 1만8589채에 그쳤다. 하지만 더는 분양을 늦출 수 없는 상황에 몰렸다. 무엇보다 뛰는 금리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조달자금 상환에 필요한 분양대금이 간절해졌다.
실수요자에겐 기회 문 열려
게다가 서울과 세종, 제주 등 그동안 분양가 상승을 주도한 지역들에서 이미 큰 폭의 분양가 하향 조정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HUG에 따르면 제주의 경우 지난달 분양가격지수가 1년 전에 비해 21.88% 하락했고, 세종(-15.67%)과 서울(-10.50%)도 두 자릿수 하락률을 보였다.넋두리를 쏟아내고 며칠 뒤 다시 만난 K 씨는 “분양가를 낮추기로 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더는 높은 분양가를 고집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점을 시행사 측도 인정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어 분양 성공을 위해 소비자들에게 추가로 어떤 서비스를 제공할지 고민 중이라고 덧붙였다. 얘기를 듣는 내내 그에게는 미안했지만 내 집 마련을 꿈꾸는 실수요자에게 기회의 문이 좀 더 열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재성 기자는…
동아일보 경제부장을 역임한 부동산 전문기자다. 30년간의 기자생활 중 20년을 부동산 및 국토교통 정책을 다루는 국토교통부를 취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