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첫째, 대(對)야 선전포고였다. 이는 지지세력에 대한 결집 호소이기도 하다. 둘째, 중도층 설득이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 속에서 어느 편에 서야 할지 고민 중인 중도층을 끌어당기려 했다.
박 대통령이 역사교과서 국정화 이슈를 던진 데는 이유가 있다. 새정치민주연합(새정연) 문재인 대표와 친노(친노무현)계를 종북프레임에 가둘 수 있는 좋은 호재라고 봤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이 의도한 대로 문 대표와 친노무현계는 미끼를 덥석 물었다. 첫 반응이 당의 명운을 걸겠다는 것이었고, 대통령 초청 청와대 5자회동 뒤에 나온 반응은 내년 총선 이슈로 가져가겠다는 다짐이었다. 스스로 퇴로조차 차단한 격이다.
이대로 가면 문 대표와 친노계는 내년 총선에서도 정권심판론을 전면에 내걸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선거 때마다 새정연이 전면에 내걸었지만 연패를 초래했던 바로 그 정권심판론이다. 문 대표와 친노계는 이제야말로 선거심판론이 먹혀들 최적의 시기가 왔다고 자신할 것이다. 그러나 표심이 그 방향으로 흐를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무엇보다 식상하다.
검정교과서는 무죄?
종북 논란 끝에 헌법재판소는 통합진보당에 대해 해산 결정을 내렸다. 그 과정에서 문 대표와 친노계 역시 종북숙주 논란에 휩싸였다. 종북숙주 논란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번에는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이 역사교과서 국정화 당위론으로 종북성향 극복을 지적하고 나섰다. 문 대표와 친노계가 국정화에 반대하면 할수록 종북숙주 의혹이 더 짙어질 수밖에 없는 구도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구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문 대표와 친노계는 거침없이 국정화 반대라는 폭풍 속으로 질주 중이다. 국정화 찬반 여론조사 결과 반대가 더 높게 나오는 것도 이들에게는 고무적일 것이다. 그러나 높은 국정화 반대 여론에도 새정연에 대한 정당 지지율과 대권주자로서 문 대표의 지지율은 답보상태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진 것일까. 왜 새정연과 문 대표는 반사이익을 얻지 못하는 것일까. 민심을 정확하게 읽지 못한 탓이다. 국민여론은 이런 것이 아닐까.
‘국정화에 반대한다. 그렇다고 현행 검정교과서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반면 문 대표는 5자회동 직후에도 다시 현행 검정교과서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언급했다. 검정교과서는 무죄라고 단정적으로 선언해버린 것이다. 한명숙 전 국무총리에 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유죄 판결에 대해서도 무죄로 확신한다고 했던 문 대표다. 상식은 물론 법치주의에도 반하는 이 같은 확신에 국민은 이질감을 느낀다. 박 대통령은 이 틈을 노렸다. 시정연설에서 한편으로는 문 대표와 친노계를 밀어붙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중도층에게 집중 호소를 한 이유다. 시정연설 내용으로 돌아가보자.
“역사교육을 정상화시키는 것은 당연한 과제이자 우리세대의 사명입니다. 역사를 바로잡는 것은 정쟁의 대상이 될 수 없고 돼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중략) 집필되지도 않은 교과서,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두고 더는 왜곡과 혼란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선거 여왕이 던진 ‘국정화’ 미끼 덥석 문 새정연](https://dimg.donga.com/egc/CDB/WEEKLY/Article/20/15/10/30/201510300500004_1.jpg)
박근혜 대통령이 10월 27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내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을 하고 있다(위). 박근혜 대통령이 시정연설을 하는 동안 야당 의원들은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는 의미로 모니터 뒷면에 ‘국정교과서 반대’라고 쓴 종이를 붙여놓았다.
“일부에서 역사교과서 국정화로 역사왜곡이나 미화가 있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지만, 그런 교과서가 나오는 것은 저부터 절대로 좌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부분이 바로 중도층에 대한 설득이다. 혹시 국정교과서가 보수편향 또는 역사왜곡으로 흐르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 대한 화답인 셈이다. ‘대통령이 이렇게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다면 한 번 믿어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반응을 의도한 언급이다.
이율배반 자각 없인 미래 없다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대한 반대 여론이 높아가는 속에서도 박 대통령 지지율은 비교적 안정적이다. 소폭 떨어진 여론조사 결과도 없지 않지만 그렇다고 폭락세로 보기는 어렵다. 문 대표의 지지율이 반등세로 돌아서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이유 때문이다. 이런 현상이 내년 총선까지 이어지는 한 박 대통령은 쉽게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낚싯대를 힘차게 당길 공산이 크다. 풀어줬다 당겼다를 반복하면서 문 대표와 친노계라는 물고기를 뜰채 속으로 유인해나갈 것이다. 문 대표와 친노계가 낚싯바늘을 뺄 기회를 잡을 수 있을까. 지금처럼 정반대 방향으로 질주해서는 기회를 잡기는커녕 힘만 소진할 뿐이다.
새정연이 박 대통령의 시정연설 당시 내건 스티커의 내용은 ‘민생우선’과 ‘국정교과서 반대’ 2가지였다. 이종걸 원내대표의 지적이 새정연의 인식을 잘 보여준다. “박 대통령은 시정연설에서 민생을 외면한 채 국정화가 최고존엄 사업임을 못 박았다.” 그런데 새정연 역시 국회에서 민생을 챙기기보다 거리로 나가 국정교과서 문제에 매달리고 있다. 대법원 판결도 믿지 못하겠다는 정당이 국정화가 헌법에 위배된다는 취지의 헌법소원을 내겠다고 한다. 이런 이율배반에 대한 자각이 없는 한, 문 대표와 친노계가 주도하는 새정연에는 희망이 없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