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정치를 했지만 1억에 양심 팔 만큼 타락하지 않았다. 내 명예는 끝까지 지킨다. 성완종에 대한 무리한 수사로 그를 자살에 이르게 한 검찰이 또다시 그 잔해 수사를 무리하게 하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 여론에 휘둘리지 않고 실체적 진실을 밝히는 수사를 할 것으로 믿는다.’(5월 9일 홍준표 경남도지사 페이스북)
‘2011년 한나라당 대표 경선 기탁금 1억2000만 원을 비롯한 경선 자금의 출처를 홍 지사에게 추궁했으나 근거를 못 댔다. 재산등록 기록도 봤지만 개인 돈에서 나온 것도 아니다. 따라서 이 돈이 윤모 전 경남기업 부사장이 전달했다는 성완종 회장 돈이 아닐지 의심스럽다.’(5월 10일 검찰 관계자)
5월 8일 홍준표 경남도지사가 고(故)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의 정관계 로비 및 금품 제공 의혹을 수사 중인 검찰 특별수사팀(팀장 문무일 검사장)의 조사를 받고 나온 직후, 홍 지사와 검찰 양측의 대대적인 여론전이 벌어졌다. 5월 9, 10일 주말 내내 ‘1억에 양심을 팔지 않았다’는 홍 지사의 얘기가 여론을 휘어잡는 듯하자 검찰은 10일 오후부터 반격을 시작했다. ‘홍 지사가 검찰 조사에서 자금 출처에 대해 해명하지 못했다’는 얘기를 흘리며 ‘경선 자금 출처 의혹’의 불을 지폈다.
팽팽한 평행선 달린 홍준표 vs 검찰 신문
성 전 회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 적어놓은 ‘정치권 금품 제공 리스트’의 여권 핵심 인사 8명 가운데 홍 지사는 처음으로 검찰에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했다. 검찰은 ‘2011년 6월 한나라당 대표 경선에 출마한 홍 지사에게 윤모 전 부사장을 시켜 1억 원을 건넸다’는 성 전 회장의 통화 녹음 내용에 신빙성이 있다고 본 것이다. 검찰은 4월 12일 수사팀 출범 이후 “성 회장의 지시로 1억 원을 인출해 윤모 전 경남기업 부사장에게 건넸다”는 한모 전 경남기업 재무담당 부사장과 “한 전 부사장으로부터 돈을 받아 전달했다”고 주장하는 윤 전 부사장 등을 상대로 성 전 회장의 주장을 검증해왔다.
윤 전 부사장은 “아내가 운전한 차를 타고 국회 의원회관의 홍 지사 사무실(707호)로 가서 성 회장으로부터 받은, 돈이 든 쇼핑백을 홍 지사에게 전달했고 나경범 보좌관(현 경남도 서울본부장)이 쇼핑백을 들고 나갔다”는 구체적인 진술을 했고 검찰은 이를 다른 제반 상황과 맞아떨어지는지 검증했다. 그 결과 홍 지사를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기소하기로 했다.
성 전 회장의 자살로 ‘공여자’가 없는 상황이지만 한·윤 전 부사장 등의 진술이 구체적이고 일관성이 있다고 판단해 검찰은 홍 지사에 대한 처벌 방침을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일각에선 홍 지사 측 인사들이 윤 전 부사장을 회유한 정황이 드러난 만큼 구속영장을 청구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5월 8일 서울고등검찰청 12층 1208호 조사실에서 마주한 홍 지사와 검찰 특별수사팀 손영배 부장검사는 윤 전 부사장의 진술을 놓고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벼랑 끝’ 공방을 벌였다. 손 부장 옆엔 후배 김병문 검사가 배석해 홍 지사의 진술을 조서로 옮겼다. 영상 녹화는 하지 않았다. 검찰은 이날 홍 지사 측근 조사에서는 물어보지 않은 윤 전 부사장의 진술을 하나하나 꺼내 들며 홍 지사를 압박했다. 홍 지사도 준비해온 각종 자료를 내보이며 특유의 거침없는 언변으로 혐의를 강력히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홍 지사가 진술을 많이 해 검찰 조사는 예상보다 더 길어졌다. 수사 상황은 검찰 지휘 라인에 곧바로 보고됐다.
홍 지사는 조사 내내 2011년 6월 경선 당시 자신의 알리바이를 들이밀며 윤 전 부사장의 진술을 무너뜨리는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변호인인 이혁 변호사가 입회한 상태에서 홍 지사가 직접 나서 당시 기억과 윤 전 부사장과의 관계 등을 소상히 진술했다고 한다. 윤 전 부사장의 ‘배달사고’ 가능성과 검찰의 진술 조정 주장도 펼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성 회장이 (죽기 전) 측근들을 데리고 돈 전달 사실을 확인하고 녹취까지 한 것은 배달사고를 염두에 둔 것 아니냐”며 “윤 전 부사장의 주장대로 성 회장이 내게 ‘1억 원을 잘 받았느냐’는 확인 전화를 했다면 굳이 (성 회장이 죽기 전) 병원에 입원해 있던 윤 전 부사장을 찾아가 돈 전달 여부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겠느냐”고도 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 “성 회장이 ‘1억 원을 윤 전 부사장에게 생활자금으로 줬다’고 진술한 게 조서에 남아 있는데, 이 진술이 며칠 만에 ‘홍준표에게 준 불법 정치자금’으로 둔갑했다”며 “이는 당협위원장직을 받지 못한 윤 전 부사장의 ‘앙심’과 한 달가량에 걸친 검찰의 진술 조정 결과”라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외 여론전’ 왜?
양측은 서로에게 예의를 지키면서도 곳곳에서 치열한 설전을 벌였다. 홍 지사의 발언이 반복되면 손 부장이 “그 얘기는 아까 하신 말씀입니다”라는 식으로 정중히 제지했다. 평소 ‘버럭 준표’라 불리는 홍 지사지만 이날은 “아, 그랬죠”라고 선선히 받아들였다. 이날 홍 지사가 성 전 회장이 돈을 건넸다는 ‘2011년 6월’ 윤 전 부사장과 만난 것을 부인했기 때문에 검찰은 굳이 1억 원이 건네진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서는 질문할 필요가 없었다고 한다. 당시 상황에 대해 세세히 질문할 경우 쥐고 있는 ‘카드’를 노출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검찰 관계자는 5월 10일 “홍 지사의 변명은 예상한 범위 내에 있다”고 말했다. 조사는 9일 새벽 1시 10분에 끝났지만 조서를 검토하느라 오전 3시가 넘어서야 마무리됐다. 홍 지사는 문무일 팀장과 구본선 부팀장을 15분 면담한 뒤 9일 새벽 3시 20분 검찰청을 나섰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던 홍 지사는 “최선을 다해 소명했다. 부족한 부분은 차후에 다시 소명하겠다”고 짤막하게 답변했다.
조사가 끝난 뒤 주말 곧바로 대대적인 여론전이 펼쳐졌다. 검찰은 통상 핵심 피의자에 대한 소환조사가 끝나면 곧 구속영장을 청구하거나 불구속기소를 해 수사의 결론을 맺어왔다. 피의자도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 실질심사)장에서나 재판정에서 검찰과 다투면 된다. 그러나 홍 지사와 검찰이 소환조사를 끝내자마자 이례적인 장외 여론전을 펼치는 것에 대해 검찰 고위 관계자는 “홍 지사와 검찰 모두 불안하기 때문”이라고 잘라 말했다. “양측 모두 재판을 염두에 두고 판사의 심증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라는 얘기다.
일단 검찰이 쥔 카드는 윤 전 부사장 진술의 구체성과 믿을 만한 정황이 많다는 것이다. 이번 수사에 대해 잘 아는 검찰 관계자의 얘기를 들어보자.
“윤 전 부사장의 진술을 입증할 객관적인 증거는 솔직히 없다. 그 대신 전달했다는 금액과 날짜, 방법 등이 소상하게 나오지 않았나. 그걸 하나하나 맞춰보는 거다. 법정에서도 망자의 증언이 있고, 윤 전 부사장이 일관되게 진술하면 공소 유지에 문제가 없다고 본다. 홍 지사의 경선 기탁금 1억2000만 원 또는 경선 비용 1억1000여만 원의 출처 문제 또한 그중 1억 원이 ‘성완종 돈’이라는 완벽한 입증은 불가능하다. 섞여버린 돈에 꼬리표가 없기 때문이고, 홍 지사가 ‘아내가 조금씩 모은 돈’이라고 해버렸기 때문에 검찰이 과연 조금씩 모였는지 입증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이제 홍 지사든 검찰이든 어느 쪽이 판사 마음을 잡느냐에 달렸다.”
홍 지사 측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홍 지사 측 관계자는 “돈을 줬다는 사람이 계속 줬다고 하는데, 안 받았으니 안 받았다고 하는 수밖에 없지 않느냐. 안 받은 걸 입증할 방법이 뭐가 있나. 성 회장을 수사하다 죽게 만든 게 바로 검찰이다. 게다가 전(前) 정부를 사정한답시고 칼을 휘두르다 현 정부의 전·현직 대통령비서실장과 총리까지 ‘역린’을 건드린 당사자가 검찰이다. MB(이명박 전 대통령) 잡겠다고 하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똥바가지’ 뒤집어씌운 셈이다. 검찰 자기네들이 살고자 면피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그나마 ‘전달자’가 살아 있는 홍 지사 건 하나라도 무조건 기소해야 한다. 그래서 검찰은 윤 전 부사장과 한 달여 동안 조서 한 장 작성하지 않고 진술을 만들어갔다. 공여자인 성 회장의 진술과 전달자의 진술을 엮어 법정에 던져버리면 그만이다. 성 회장과 윤 부사장이 깔아놓은 올무를 검찰이 자기 것인 양 이용해 먹고 있다.”
홍 지사의 무기는 윤 전 부사장을 ‘믿을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그가 한 진술의 신빙성을 최대한 깎아내리는 것이다. 홍 지사가 당대표가 된 뒤 총선 공천을 바라는 윤 전 부사장에게 당협위원장 자리를 주지 않아 윤 전 부사장이 홍 지사에게 등졌던 이력, 2012년 경남도지사 선거에서 ‘배달사고’가 났음을 알 수 있는 정황 등을 홍 지사 측은 조목조목 법정에서 제시할 방침이다. 홍 지사는 5월 11일 기자회견에서 “성 회장이 2012년 경남도지사 선거 때(선거캠프에서 일하던) 박주원 전 경기 안산시장에게 전화를 걸어 윤 전 부사장을 통해 ‘큰 거 한 장(1억 원)’ 보냈는데 잘 받으셨느냐고 물어봤다고 하는데 나는 그 돈을 받지 못했다”고 밝혔다. 박 전 시장도 같은 내용의 진술서를 검찰에 제출하기도 했다.
‘모래시계 검사’ 정치인생 최대 위기
홍 지사가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에 소환돼 조사받은 데다 수사팀이 대검찰청에 구속영장 청구 방안까지 보고하면서, 그는 정치권 입문 이후 최대 위기를 맞았다. 그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 여부는 김진태 검찰총장의 결단만 남았다. 김 총장과 홍 지사는 1982년 사법시험(24회)에 함께 합격한 사법연수원 동기다. 둘 다 늦깎이로 서른이 넘어 검사가 됐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어 당시엔 어느 정도 동류의식도 지녔었다고 한다.
두 사람과 함께 일해본 선후배 검사들은 김 총장과 홍 지사의 스타일이 전혀 다르다고 평가한다. 홍 지사가 다소 요란하게 밀어붙이는 수사 스타일이라면, 김 총장은 치밀하게 내사한 뒤 단칼에 비리 혐의자를 처단하는 스타일이라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심재륜 전 부산고등검찰청장은 “두 사람이 서로 스타일이 달라 동기라 해도 교류가 깊진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화려했던 검사직을 내려놓고 여의도에 발을 디딘 ‘정치인 홍준표’는 그리 순탄치 않았다. 1996년 15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한 홍 지사는 당시 선거운동원들에게 불법금품을 건넨 혐의로 상대 후보 측에 의해 고발됐다. 당시 홍 지사는 서울남부지방검찰청에 오전에 출석해 고려대 선배인 이종찬 지청장(전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과 마주 앉아 2시간 넘게 억울함을 하소연했고, 시간이 지연돼 조사는 오후에야 이뤄졌다고 한다. 이 사건에서 검찰은 무혐의 처분했다.
그러나 김영삼(YS) 정부 때인 1997년 2월 상대 후보 측의 재정 신청을 법원이 받아들였고 김대중(DJ) 정부 때인 99년 3월 대법원 판결로 국회의원직을 잃었다. 홍 지사는 당시 “이번 판결은 사법의 칼을 빌린 이 정부의 결정”이라며 자신이 YS, DJ에 저항한 대가라고 주장했다. 홍 지사가 5월 3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20여 년 전 선거법 위반 재정 신청 사건에서 나는 팻감(희생양)으로 사용된 적이 있다’고 밝힌 것도 이 때문이다.
그 후 홍 지사는 미국 워싱턴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거기서 선거법 위반 혐의로 재판 중 의원직을 사퇴한 MB를 만났고 MB와 함께 ‘차기’의 꿈을 키워갔다. 홍 지사는 2001년 10월 서울 동대문을 국회의원에, MB는 2002년 5월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에 각각 당선해 두 사람 모두 화려하게 복귀했다. 2007년 대통령선거에서 MB정권 ‘개국공신’이던 홍 지사는 여당 원내대표, 최고위원, 당대표에 이어 경남도지사에도 당선하며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성완종 전 회장이 남긴 한 장의 메모지에 발목이 잡힐 처지에 놓였다.
이번 수사를 지휘하는 검찰 특별수사팀장도 19년 전과 마찬가지로 대학 동문(문무일 검사장)이다. 그러나 19년 전 같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이번 수사가 정치인 홍준표의 끝이 될지, 아니면 또다시 화려한 부활의 계기가 될지도 관심이다.
‘조용한 대응’ 이완구, 재판서 ‘2라운드’ 준비
‘성완종 리스트’ 8인 중 두 번째 수사 대상은 ‘부패와의 전쟁’을 선언하며 사정정국을 주도했던 이완구 전 국무총리다. 이 전 총리는 성 전 회장으로부터 2013년 4월 충남 부여·청양 국회의원 재선거 당시 불법 정치자금 3000만 원을 받은 혐의를 받고 올해 5월 14일 오전 10시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에 출석했다. 이 전 총리는 검찰 조사에 앞서 “이 세상에 진실을 이기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며 “검찰에서 소상히, 상세히 제 입장을 말씀드리고 이 문제가 잘 풀리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국정 2인자였던 이 전 총리는 취임한 지 한 달도 안 된 3월 12일 ‘부패와의 전쟁’을 선언했다. 하지만 성 전 회장이 숨지기 전 남긴 메모와 언론 인터뷰에 이름이 등장하면서 사정의 칼날은 부메랑이 됐다. 성 전 회장으로부터 “사정 대상 1호가 사정을 외치고 있다”는 비판도 받았다.
검찰은 성 전 회장의 수행비서 금모 씨로부터 “성 회장에게서 (돈이 담긴) 쇼핑백을 들고 오라는 지시를 받았다. 내가 차에 있던 쇼핑백을 들고 가 선거사무소 안에서 이 전 총리를 독대하고 있던 성 회장에게 드리고 나왔다”는 취지의 진술을 확보한 것으로
5월 12일 확인됐다. 금씨는 성 전 회장과 이 전 총리가 독대하던 상황을 또렷하게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검찰은 복수의 성 회장 측근으로부터 “금씨가 성 회장 지시로 (비타500 음료 상자가 아니라) 쇼핑백을 성 회장에게 갖다 주고 나온 사실을 주변에 털어놓은 일도 있다”는 취지의 진술까지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이 이 전 총리를 피의자로 특정한 것은 그의 금품 수수 의혹을 뒷받침할 진술과 물증을 확보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전 총리는 검찰 조사에서 돈을 받은 적이 없다고 혐의를 완강히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홍 지사 관련 의혹과 마찬가지로 문제는 검찰이 돈을 직접 건넸다고 주장한 성 전 회장이 숨져 돈을 건넬 당시 상황과 최종 행적에 대한 진술을 ‘공여자’로부터 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 전 총리가 성 전 회장과 독대를 인정한다 해도, 재판에선 독대 상황에서 돈이 건네졌다는 금품 수수 혐의는 끝내 부인할 개연성이 높다는 얘기다. 설령 성 전 회장이 쇼핑백을 놓고 갔다는 게 확인된다 해도 이 전 총리로선 사람이 빈번히 드나드는 선거사무소 특성상 분실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을 펼 여지도 충분하다.
홍 지사는 공여자 부재 상태라는 점을 십분 활용해 여론전을 펼치고 있고, 이 전 총리 측은 기소될 경우 재판에서 무죄를 이끌어내 정치적으로 재기한다는 판단 아래 조용히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연일 검찰과 장외 설전을 벌이는 홍 지사와 조용한 대응을 하는 이 전 총리, 모두 ‘핵심 공여자’ 성 전 회장이 없는 재판에서 승리를 장담하며 ‘2라운드’를 준비한다는 점에선 같은 편이다.
‘2011년 한나라당 대표 경선 기탁금 1억2000만 원을 비롯한 경선 자금의 출처를 홍 지사에게 추궁했으나 근거를 못 댔다. 재산등록 기록도 봤지만 개인 돈에서 나온 것도 아니다. 따라서 이 돈이 윤모 전 경남기업 부사장이 전달했다는 성완종 회장 돈이 아닐지 의심스럽다.’(5월 10일 검찰 관계자)
5월 8일 홍준표 경남도지사가 고(故)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의 정관계 로비 및 금품 제공 의혹을 수사 중인 검찰 특별수사팀(팀장 문무일 검사장)의 조사를 받고 나온 직후, 홍 지사와 검찰 양측의 대대적인 여론전이 벌어졌다. 5월 9, 10일 주말 내내 ‘1억에 양심을 팔지 않았다’는 홍 지사의 얘기가 여론을 휘어잡는 듯하자 검찰은 10일 오후부터 반격을 시작했다. ‘홍 지사가 검찰 조사에서 자금 출처에 대해 해명하지 못했다’는 얘기를 흘리며 ‘경선 자금 출처 의혹’의 불을 지폈다.
팽팽한 평행선 달린 홍준표 vs 검찰 신문
성 전 회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 적어놓은 ‘정치권 금품 제공 리스트’의 여권 핵심 인사 8명 가운데 홍 지사는 처음으로 검찰에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했다. 검찰은 ‘2011년 6월 한나라당 대표 경선에 출마한 홍 지사에게 윤모 전 부사장을 시켜 1억 원을 건넸다’는 성 전 회장의 통화 녹음 내용에 신빙성이 있다고 본 것이다. 검찰은 4월 12일 수사팀 출범 이후 “성 회장의 지시로 1억 원을 인출해 윤모 전 경남기업 부사장에게 건넸다”는 한모 전 경남기업 재무담당 부사장과 “한 전 부사장으로부터 돈을 받아 전달했다”고 주장하는 윤 전 부사장 등을 상대로 성 전 회장의 주장을 검증해왔다.
윤 전 부사장은 “아내가 운전한 차를 타고 국회 의원회관의 홍 지사 사무실(707호)로 가서 성 회장으로부터 받은, 돈이 든 쇼핑백을 홍 지사에게 전달했고 나경범 보좌관(현 경남도 서울본부장)이 쇼핑백을 들고 나갔다”는 구체적인 진술을 했고 검찰은 이를 다른 제반 상황과 맞아떨어지는지 검증했다. 그 결과 홍 지사를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기소하기로 했다.
성 전 회장의 자살로 ‘공여자’가 없는 상황이지만 한·윤 전 부사장 등의 진술이 구체적이고 일관성이 있다고 판단해 검찰은 홍 지사에 대한 처벌 방침을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일각에선 홍 지사 측 인사들이 윤 전 부사장을 회유한 정황이 드러난 만큼 구속영장을 청구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5월 8일 서울고등검찰청 12층 1208호 조사실에서 마주한 홍 지사와 검찰 특별수사팀 손영배 부장검사는 윤 전 부사장의 진술을 놓고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벼랑 끝’ 공방을 벌였다. 손 부장 옆엔 후배 김병문 검사가 배석해 홍 지사의 진술을 조서로 옮겼다. 영상 녹화는 하지 않았다. 검찰은 이날 홍 지사 측근 조사에서는 물어보지 않은 윤 전 부사장의 진술을 하나하나 꺼내 들며 홍 지사를 압박했다. 홍 지사도 준비해온 각종 자료를 내보이며 특유의 거침없는 언변으로 혐의를 강력히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홍 지사가 진술을 많이 해 검찰 조사는 예상보다 더 길어졌다. 수사 상황은 검찰 지휘 라인에 곧바로 보고됐다.
홍 지사는 조사 내내 2011년 6월 경선 당시 자신의 알리바이를 들이밀며 윤 전 부사장의 진술을 무너뜨리는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변호인인 이혁 변호사가 입회한 상태에서 홍 지사가 직접 나서 당시 기억과 윤 전 부사장과의 관계 등을 소상히 진술했다고 한다. 윤 전 부사장의 ‘배달사고’ 가능성과 검찰의 진술 조정 주장도 펼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성 회장이 (죽기 전) 측근들을 데리고 돈 전달 사실을 확인하고 녹취까지 한 것은 배달사고를 염두에 둔 것 아니냐”며 “윤 전 부사장의 주장대로 성 회장이 내게 ‘1억 원을 잘 받았느냐’는 확인 전화를 했다면 굳이 (성 회장이 죽기 전) 병원에 입원해 있던 윤 전 부사장을 찾아가 돈 전달 여부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겠느냐”고도 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 “성 회장이 ‘1억 원을 윤 전 부사장에게 생활자금으로 줬다’고 진술한 게 조서에 남아 있는데, 이 진술이 며칠 만에 ‘홍준표에게 준 불법 정치자금’으로 둔갑했다”며 “이는 당협위원장직을 받지 못한 윤 전 부사장의 ‘앙심’과 한 달가량에 걸친 검찰의 진술 조정 결과”라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외 여론전’ 왜?
양측은 서로에게 예의를 지키면서도 곳곳에서 치열한 설전을 벌였다. 홍 지사의 발언이 반복되면 손 부장이 “그 얘기는 아까 하신 말씀입니다”라는 식으로 정중히 제지했다. 평소 ‘버럭 준표’라 불리는 홍 지사지만 이날은 “아, 그랬죠”라고 선선히 받아들였다. 이날 홍 지사가 성 전 회장이 돈을 건넸다는 ‘2011년 6월’ 윤 전 부사장과 만난 것을 부인했기 때문에 검찰은 굳이 1억 원이 건네진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서는 질문할 필요가 없었다고 한다. 당시 상황에 대해 세세히 질문할 경우 쥐고 있는 ‘카드’를 노출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검찰 관계자는 5월 10일 “홍 지사의 변명은 예상한 범위 내에 있다”고 말했다. 조사는 9일 새벽 1시 10분에 끝났지만 조서를 검토하느라 오전 3시가 넘어서야 마무리됐다. 홍 지사는 문무일 팀장과 구본선 부팀장을 15분 면담한 뒤 9일 새벽 3시 20분 검찰청을 나섰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던 홍 지사는 “최선을 다해 소명했다. 부족한 부분은 차후에 다시 소명하겠다”고 짤막하게 답변했다.
조사가 끝난 뒤 주말 곧바로 대대적인 여론전이 펼쳐졌다. 검찰은 통상 핵심 피의자에 대한 소환조사가 끝나면 곧 구속영장을 청구하거나 불구속기소를 해 수사의 결론을 맺어왔다. 피의자도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 실질심사)장에서나 재판정에서 검찰과 다투면 된다. 그러나 홍 지사와 검찰이 소환조사를 끝내자마자 이례적인 장외 여론전을 펼치는 것에 대해 검찰 고위 관계자는 “홍 지사와 검찰 모두 불안하기 때문”이라고 잘라 말했다. “양측 모두 재판을 염두에 두고 판사의 심증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라는 얘기다.
일단 검찰이 쥔 카드는 윤 전 부사장 진술의 구체성과 믿을 만한 정황이 많다는 것이다. 이번 수사에 대해 잘 아는 검찰 관계자의 얘기를 들어보자.
“윤 전 부사장의 진술을 입증할 객관적인 증거는 솔직히 없다. 그 대신 전달했다는 금액과 날짜, 방법 등이 소상하게 나오지 않았나. 그걸 하나하나 맞춰보는 거다. 법정에서도 망자의 증언이 있고, 윤 전 부사장이 일관되게 진술하면 공소 유지에 문제가 없다고 본다. 홍 지사의 경선 기탁금 1억2000만 원 또는 경선 비용 1억1000여만 원의 출처 문제 또한 그중 1억 원이 ‘성완종 돈’이라는 완벽한 입증은 불가능하다. 섞여버린 돈에 꼬리표가 없기 때문이고, 홍 지사가 ‘아내가 조금씩 모은 돈’이라고 해버렸기 때문에 검찰이 과연 조금씩 모였는지 입증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이제 홍 지사든 검찰이든 어느 쪽이 판사 마음을 잡느냐에 달렸다.”
홍 지사 측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홍 지사 측 관계자는 “돈을 줬다는 사람이 계속 줬다고 하는데, 안 받았으니 안 받았다고 하는 수밖에 없지 않느냐. 안 받은 걸 입증할 방법이 뭐가 있나. 성 회장을 수사하다 죽게 만든 게 바로 검찰이다. 게다가 전(前) 정부를 사정한답시고 칼을 휘두르다 현 정부의 전·현직 대통령비서실장과 총리까지 ‘역린’을 건드린 당사자가 검찰이다. MB(이명박 전 대통령) 잡겠다고 하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똥바가지’ 뒤집어씌운 셈이다. 검찰 자기네들이 살고자 면피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그나마 ‘전달자’가 살아 있는 홍 지사 건 하나라도 무조건 기소해야 한다. 그래서 검찰은 윤 전 부사장과 한 달여 동안 조서 한 장 작성하지 않고 진술을 만들어갔다. 공여자인 성 회장의 진술과 전달자의 진술을 엮어 법정에 던져버리면 그만이다. 성 회장과 윤 부사장이 깔아놓은 올무를 검찰이 자기 것인 양 이용해 먹고 있다.”
홍 지사의 무기는 윤 전 부사장을 ‘믿을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그가 한 진술의 신빙성을 최대한 깎아내리는 것이다. 홍 지사가 당대표가 된 뒤 총선 공천을 바라는 윤 전 부사장에게 당협위원장 자리를 주지 않아 윤 전 부사장이 홍 지사에게 등졌던 이력, 2012년 경남도지사 선거에서 ‘배달사고’가 났음을 알 수 있는 정황 등을 홍 지사 측은 조목조목 법정에서 제시할 방침이다. 홍 지사는 5월 11일 기자회견에서 “성 회장이 2012년 경남도지사 선거 때(선거캠프에서 일하던) 박주원 전 경기 안산시장에게 전화를 걸어 윤 전 부사장을 통해 ‘큰 거 한 장(1억 원)’ 보냈는데 잘 받으셨느냐고 물어봤다고 하는데 나는 그 돈을 받지 못했다”고 밝혔다. 박 전 시장도 같은 내용의 진술서를 검찰에 제출하기도 했다.
‘모래시계 검사’ 정치인생 최대 위기
홍 지사가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에 소환돼 조사받은 데다 수사팀이 대검찰청에 구속영장 청구 방안까지 보고하면서, 그는 정치권 입문 이후 최대 위기를 맞았다. 그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 여부는 김진태 검찰총장의 결단만 남았다. 김 총장과 홍 지사는 1982년 사법시험(24회)에 함께 합격한 사법연수원 동기다. 둘 다 늦깎이로 서른이 넘어 검사가 됐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어 당시엔 어느 정도 동류의식도 지녔었다고 한다.
두 사람과 함께 일해본 선후배 검사들은 김 총장과 홍 지사의 스타일이 전혀 다르다고 평가한다. 홍 지사가 다소 요란하게 밀어붙이는 수사 스타일이라면, 김 총장은 치밀하게 내사한 뒤 단칼에 비리 혐의자를 처단하는 스타일이라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심재륜 전 부산고등검찰청장은 “두 사람이 서로 스타일이 달라 동기라 해도 교류가 깊진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화려했던 검사직을 내려놓고 여의도에 발을 디딘 ‘정치인 홍준표’는 그리 순탄치 않았다. 1996년 15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한 홍 지사는 당시 선거운동원들에게 불법금품을 건넨 혐의로 상대 후보 측에 의해 고발됐다. 당시 홍 지사는 서울남부지방검찰청에 오전에 출석해 고려대 선배인 이종찬 지청장(전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과 마주 앉아 2시간 넘게 억울함을 하소연했고, 시간이 지연돼 조사는 오후에야 이뤄졌다고 한다. 이 사건에서 검찰은 무혐의 처분했다.
그러나 김영삼(YS) 정부 때인 1997년 2월 상대 후보 측의 재정 신청을 법원이 받아들였고 김대중(DJ) 정부 때인 99년 3월 대법원 판결로 국회의원직을 잃었다. 홍 지사는 당시 “이번 판결은 사법의 칼을 빌린 이 정부의 결정”이라며 자신이 YS, DJ에 저항한 대가라고 주장했다. 홍 지사가 5월 3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20여 년 전 선거법 위반 재정 신청 사건에서 나는 팻감(희생양)으로 사용된 적이 있다’고 밝힌 것도 이 때문이다.
그 후 홍 지사는 미국 워싱턴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거기서 선거법 위반 혐의로 재판 중 의원직을 사퇴한 MB를 만났고 MB와 함께 ‘차기’의 꿈을 키워갔다. 홍 지사는 2001년 10월 서울 동대문을 국회의원에, MB는 2002년 5월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에 각각 당선해 두 사람 모두 화려하게 복귀했다. 2007년 대통령선거에서 MB정권 ‘개국공신’이던 홍 지사는 여당 원내대표, 최고위원, 당대표에 이어 경남도지사에도 당선하며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성완종 전 회장이 남긴 한 장의 메모지에 발목이 잡힐 처지에 놓였다.
이번 수사를 지휘하는 검찰 특별수사팀장도 19년 전과 마찬가지로 대학 동문(문무일 검사장)이다. 그러나 19년 전 같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이번 수사가 정치인 홍준표의 끝이 될지, 아니면 또다시 화려한 부활의 계기가 될지도 관심이다.
‘조용한 대응’ 이완구, 재판서 ‘2라운드’ 준비
‘성완종 리스트’ 8인 중 두 번째 수사 대상은 ‘부패와의 전쟁’을 선언하며 사정정국을 주도했던 이완구 전 국무총리다. 이 전 총리는 성 전 회장으로부터 2013년 4월 충남 부여·청양 국회의원 재선거 당시 불법 정치자금 3000만 원을 받은 혐의를 받고 올해 5월 14일 오전 10시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에 출석했다. 이 전 총리는 검찰 조사에 앞서 “이 세상에 진실을 이기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며 “검찰에서 소상히, 상세히 제 입장을 말씀드리고 이 문제가 잘 풀리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국정 2인자였던 이 전 총리는 취임한 지 한 달도 안 된 3월 12일 ‘부패와의 전쟁’을 선언했다. 하지만 성 전 회장이 숨지기 전 남긴 메모와 언론 인터뷰에 이름이 등장하면서 사정의 칼날은 부메랑이 됐다. 성 전 회장으로부터 “사정 대상 1호가 사정을 외치고 있다”는 비판도 받았다.
검찰은 성 전 회장의 수행비서 금모 씨로부터 “성 회장에게서 (돈이 담긴) 쇼핑백을 들고 오라는 지시를 받았다. 내가 차에 있던 쇼핑백을 들고 가 선거사무소 안에서 이 전 총리를 독대하고 있던 성 회장에게 드리고 나왔다”는 취지의 진술을 확보한 것으로
5월 12일 확인됐다. 금씨는 성 전 회장과 이 전 총리가 독대하던 상황을 또렷하게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검찰은 복수의 성 회장 측근으로부터 “금씨가 성 회장 지시로 (비타500 음료 상자가 아니라) 쇼핑백을 성 회장에게 갖다 주고 나온 사실을 주변에 털어놓은 일도 있다”는 취지의 진술까지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이 이 전 총리를 피의자로 특정한 것은 그의 금품 수수 의혹을 뒷받침할 진술과 물증을 확보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전 총리는 검찰 조사에서 돈을 받은 적이 없다고 혐의를 완강히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홍 지사 관련 의혹과 마찬가지로 문제는 검찰이 돈을 직접 건넸다고 주장한 성 전 회장이 숨져 돈을 건넬 당시 상황과 최종 행적에 대한 진술을 ‘공여자’로부터 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 전 총리가 성 전 회장과 독대를 인정한다 해도, 재판에선 독대 상황에서 돈이 건네졌다는 금품 수수 혐의는 끝내 부인할 개연성이 높다는 얘기다. 설령 성 전 회장이 쇼핑백을 놓고 갔다는 게 확인된다 해도 이 전 총리로선 사람이 빈번히 드나드는 선거사무소 특성상 분실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을 펼 여지도 충분하다.
홍 지사는 공여자 부재 상태라는 점을 십분 활용해 여론전을 펼치고 있고, 이 전 총리 측은 기소될 경우 재판에서 무죄를 이끌어내 정치적으로 재기한다는 판단 아래 조용히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연일 검찰과 장외 설전을 벌이는 홍 지사와 조용한 대응을 하는 이 전 총리, 모두 ‘핵심 공여자’ 성 전 회장이 없는 재판에서 승리를 장담하며 ‘2라운드’를 준비한다는 점에선 같은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