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오른쪽)이 5월 16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코로나19 손실 보상을 위한 추가경정예산(추경)안 시정연설을 마친 후 국민의힘 권성동 당시 원내대표와 국회 본관을 나서고 있다. [뉴스1]
국민의힘에 드리운 신분제 정당 그림자
초청 순서가 특이하다. 선후가 뒤바뀐 게 아닌가라는 의문이 생길 법하다. 단순한 의전 실수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국민의힘 중진의원 대부분이 ‘뜨악’했을 것이다. 1순위는커녕 2순위에서도 밀려서다. 이번 만찬이 갖는 한 가지 함의는 국민의힘이 ‘신분제 정당’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윤핵관이라는 성골, 친윤석열(친윤)계라는 진골, 그리고 나머지 의원들 순이다.정치권에서는 이번 만찬 정치를 노골적인 당무 개입으로 보는 분위기다. 윤 대통령은 그동안 당무 불개입 원칙을 강조해왔다. 7월 이준석 전 대표에 대한 징계가 이뤄진 직후 윤 대통령이 권 전 원내대표와 나눈 문자메시지가 논란이 된 적이 있다. “내부 총질이나 하던 당대표가 바뀌니 달라졌습니다”라는 내용이었다. 당시에도 당무 개입 논란이 불거졌다.
이번 만찬 정치는 지난번 문자메시지 발송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특히 비공개로 이뤄졌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만찬에서 나눈 대화를 비밀에 부치겠다는 의미다. 윤 대통령과 윤핵관은 어떤 대화를 나눴을까. 초청 순서로 추론해 보건대 윤 대통령이 윤핵관과 특정 사안에 대해 기본 방향을 정하고 이를 당 지도부와 공유하는 순서를 거친 것으로 보인다.
앞선 자리에서 전당대회 관련 대화를 나눴다는 설이 힘을 얻는다. 관저 만찬 사흘 후인 11월 28일 정 위원장의 발언 때문이다. 이날 정 위원장은 다음 비상대책위원회 회의 때 전당대회 시점에 대해 의견을 모아보자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직후 또 다른 소식이 보도되면서 상황이 구체화됐다. 첫째, 윤핵관이 윤 대통령에게 정 비대위원장 임기 만료일인 내년 3월 13일 이전에 전당대회를 마쳐야 한다는 보고를 했다. 둘째, 정 위원장이 11월 25일 만찬 직전 독대에서 내년 5월 전당대회를 개최하자는 의견을 제시했지만 윤 대통령이 이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자연히 전당대회 ‘2말 3초’ 개최설이 불거졌고 정 위원장은 11월 29일 “말이 안 된다”는 입장을 냈다. 전당대회 2말 3초 개최설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 위원장은 윤 대통령의 당무 개입 의혹에 대해서도 “대통령이 그런 일까지 지침을 주고 그러진 않는다”고 말했지만 정치권에서는 이번 만찬 정치를 당무 개입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무엇보다 전례를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과거 대통령들도 당 지도부 또는 중진급 의원들과 청와대에서 만찬을 갖곤 했지만 집권 초기 개국공신들만 따로 불러 만찬 자리를 갖진 않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경우 집권 2년 차인 2014년 12월에야 새누리당 친박근혜계 중진들과 만찬 회동을 했다.
유승민 견제 위해 뭉친 윤핵관
권 전 원내대표가 자진 사퇴한 것을 기점으로 국민의힘이 ‘윤 대통령 친정체제’로 넘어간 것으로 분석된다. 이 맥락에서 보면 이번 만찬 정치는 매우 자연스러운 흐름의 일환이다. 차기 전당대회를 앞두고 윤핵관을 비롯한 친윤석열(친윤)계 여럿이 당대표 출마를 준비 중이다. 비윤석열(비윤)계 유승민 전 의원이 차기 당대표 적합도 여론조사에서 1위를 기록하는 등 위협적 존재로 부상하고 있다. 자칫 유 전 의원이 차기 대표로 선출된다면 윤 대통령의 국민의힘 친정체제는 단번에 무너진다. 윤 대통령과 윤핵관의 2024년 총선 공천 영향력도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다.이는 윤 대통령과 윤핵관에게 위협적인 상황이다. 교통정리가 필요하다고 판단 내렸을 테고, 윤 대통령이 직접 나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만찬 정치는 이 같은 고려 하에서 기획됐을 개연성이 크다. 대통령실과 국민의힘의 공식 부인에도 윤 대통령과 윤핵관의 회동 자리에서는 전당대회 시점은 물론, 차기 당대표 후보에 대한 공감대도 형성됐을 것이다.
이번 만찬 정치를 계기로 국민의힘은 윤 대통령 친정체제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 ‘총재정치’로 회귀한 모양새다. 적어도 친윤계의 마음속 국민의힘은 이미 그렇게 변한 것으로 보인다. 과거 대통령이 여당 총재까지 겸하던 권위주의 정권 시절, 여당 지도부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공천권도 대통령이 행사했다. 과거로 다시 회귀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역사는 직진하지 않는다.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기 마련이고, 일시적으로는 반동기가 도래하기도 한다. 총재정치 시대가 다시 열린다면 본격적으로 반동기에 들어섰다고 봐야 한다. 한국이 경제 선진국에 등극한 시점에 총재정치 시대가 다시금 열릴 수도 있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경제적 선진화와 정치적 선진화 간 괴리가 심해지는 탈구 현상이 발생하면 사회적 갈등이 증폭된다. 윤 대통령과 윤핵관에게 역사적 소명 의식이 있다면, 또한 국론 대분열을 원하지 않는다면 의도적으로라도 총재정치를 멀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