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급 호위함. [한국 해군 제공]
두테르테 대통령이 경제개발 파트너로 중국을 선택한 이유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집권 전부터 범죄와 전쟁을 외치며 인권보다 치안 확보를 우선시했다. 강력범의 경우 적법한 재판 절차 없이 현장에서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등 과격한 정책을 추진해 서방세계로부터 ‘인권 범죄국’으로 낙인찍히기도 했다.
미국에 의해 ‘인권 범죄국’으로 낙인찍힌 상황에서 서방세계의 투자를 받아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고, 이러한 순간에 중국이 접근해왔다. 중국은 필리핀의 도로와 항만, 철도 등 인프라 전반에 대대적인 투자를 약속했고, 두테르테 대통령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만나 260억 달러(약 31조6890억 원)에 달하는 투자 유치 합의를 받아내며 중국과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선포했다.
필리핀, 반중 감정 폭발
콘라도 얍. [필리핀 밀리터리 홈페이지 제공]
지난해 4월 국민적 신망이 두터웠던 안토니오 카피오 필리핀 대법원 선임 재판관이 두테르테 정부가 중국과 체결한 투자 계약서를 공개하면서 이 계약서의 위험성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나선 것이 계기였다. 카피오 재판관은 중국이 투자 계약서 곳곳에 독소 조항을 심어 필리핀의 자원과 인프라를 강탈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했으며, 이러한 함정 탓에 필리핀은 다른 나라들처럼 주요 국유 자산을 중국에게 빼앗길 것이라고 경고하고 나섰다.
카피오 재판관의 경고대로 중국은 일대일로(一帶一路·육상과 해상 실크로드) 사업을 통해 주요 개발도상국의 자원과 인프라를 강탈해왔다. 일대일로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한 파키스탄은 국가 파산 직전 상황까지 내몰렸고, 주요 에너지 산업은 물론 국가 전략 항구인 카라치를 빼앗겼다. 스리랑카는 최대 항구인 함반토타를 빼앗겼다. 라오스와 몰디브, 키르기스스탄 등도 디폴트 위기로 내몰리고 있다.
카피오 재판관의 경고 이후 필리핀 각지에서는 중국 자본의 위험성을 성토하는 여론이 급속도로 확산됐고, 중국인들에 의한 필리핀 내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과 중국인의 횡포 사례들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빠르게 퍼지면서 반중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 남중국해 필리핀 어선 격침 사건은 필리핀 국민의 반중 정서에 기름을 끼얹었다. 2019년 6월 9일 남중국해 스프래틀리 군도의 필리핀령 리드뱅크(필리핀명 렉토뱅크) 인근 해역에서 중국 선박이 필리핀 어선을 들이받아 침몰시킨 뒤 도주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중국 해상민병 소속의 대형어선으로 확인된 이 선박은 어둠 속에서 필리핀 어선을 들이받은 뒤 물에 빠진 22명의 선원을 그대로 두고 달아났다. 다행히 선원들은 인근을 지나던 베트남 어선에 의해 구조됐는데, 중국은 “필리핀 어선이 먼저 중국 어선을 위협해 도주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고”라며 사건 발생 원인을 필리핀 측에 돌려 필리핀 국민의 공분을 샀다.
남중국해 충돌에 대비한 군사력 증강
콘라도 얍 762 한국. [한국 해군 제공]
문제는 두테르테 정부가 서방 국가들로부터 ‘인권 범죄국’으로 낙인찍힌 상태라는 것이었다. 사실 두테르테 대통령은 집권 초기부터 다양한 군사력 증강 프로그램을 진행해왔지만, 미국과 유럽 등 서방 선진국의 제재로 소총조차 수입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당초 필리핀은 2018년 미국에 UH-60 블랙호크 헬기 16대와 SIG-516 소총 2만6000정을 주문했지만, 미 의회는 미국은 물론 인접 캐나다의 대(對)필리핀 무기 수출을 모두 불허했다. 필리핀이 중국이나 러시아로부터 무기를 구매할 경우 무역 보복 등 추가 제재를 가하겠다는 엄포도 잊지 않았다. 필리핀 입장에서는 새로운 무기 공급처를 찾는 것이 급선무였고, 한국이 유력한 공급처로 부상했다.
사실 두테르테 대통령은 다바오시장으로 재임할 때부터 ‘친한파’가 아니냐는 오해를 받을 정도로 한국제 무기를 좋아했다. 그가 K1A 기관단총을 들고 범죄와의 전쟁을 외치는 사진은 필리핀에서는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할 정도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두테르테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 필리핀군은 빠른 속도로 ‘Made in Korea’로 잠식되기 시작했다.
우선 필리핀 육군은 개인화기와 포병, 기동장비까지 한국산으로 도배되고 있다. 최근에는 우리나라 S&T모티브의 K2C1 소총과 K12 다목적 기관총, K15 경기관총 등 한국산 총기가 육군과 경찰에 대량으로 깔리기 시작했다. 기동장비로는 ‘두돈반’으로 불리는 KM250 트럭 450대, ‘사오톤’으로 불리는 KM450 트럭이 1400대 가까이 납품됐다. 40억 페소(약 960억 원)가량의 규모로 ‘한국판 험비’인 K151 소형전술차량도 도입이 진행되고 있다. K151 방탄 모델 기준 납품가가 1억5000만 원 선인 것을 감안하면 630대 이상이 도입되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필리핀 육군은 최근 한국 육군이 무상 공여한 K-136 구룡 다련장로켓 18문으로 필리핀 육군 창군 이래 최초의 로켓포병부대인 제1·2다련장로켓시스템포대를 창설해 전략자산으로 운용을 개시했다. 필리핀 육군의 숙원 사업인 차세대 전차 도입 사업에서도 우리나라 한화디펜스의 K21-105 모델이 최종 후보로 선정돼 납품을 목전에 두고 있다.
중국과의 해상 영유권 분쟁에서 핵심 전력으로 활약할 해·공군 전력 역시 ‘Made in Korea’가 주력이거나 주력이 될 예정이다. 필리핀 공군의 주력 전투기는 2016년부터 도입된 FA-50PH 전투기 12대인데, 이 전투기는 반군을 상대로 한 정밀 폭격 임무에서 맹활약하며 필리핀 공군의 핵심 전략자산으로 자리 잡았다.
단일 무기로서는 최고가를 자랑하는 무기
차세대 호위함. [현대중공업 제공]
델 필라급 다음으로 강력한 전투함인 콘라도 얍급은 한국의 포항급 초계함 충주함이 공여된 것이고, 핵심 연안 초계전력으로 활약 중인 보니 세라노급 고속정은 한국의 참수리급 고속정을 넘겨받은 것이다.
필리핀이 구입하거나 무상으로 제공받은 여러 한국산 무기 가운데 필리핀 국민들로부터 가장 큰 기대를 받고 있는 것은 현재 우리나라 현대중공업에서 필리핀 인도를 준비 중인 차세대 호위함 호세 리잘급이다. 호세 리잘급은 외국산 퇴역 전투함만 사용하던 필리핀군이 처음으로 보유하게 되는 신조함으로 2척에 3억3700만 달러, 즉 1척에 약 2000억 원에 육박해 필리핀이 주문한 외국산 무기 가운데 단일 무기로는 최고가를 자랑한다.
당초 필리핀 해군은 이탈리아 해군의 퇴역 호위함인 마에스트랄레급 2척을 도입하려 했지만, 배 상태가 너무 나빠 신규 건조로 사업 방향을 바꿨다. 그런데 우선협상대상자이던 인도국영조선소의 카몰타급 호위함의 품질이 너무 나빠 다른 대안을 찾았고, 결국 한국의 인천급 호위함을 기반으로 한 신규 호위함을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현대중공업은 대구급 호위함 설계를 기반으로 필리핀의 예산 사정에 맞춘 새로운 설계를 제안했고, 필리핀이 이를 수용함에 따라 호세 리잘급이 탄생하게 됐다.
호세 리잘급. [필리핀 밀리터리 홈페이지 제공]
그러나 필리핀은 호세 리잘급을 중국과의 해양 영유권 분쟁에 대비한 함대 기함으로 운용할 계획이라 곧바로 성능 개량 계획을 준비해왔다. 필리핀 해군은 올해 안에 호세 리잘함을 인수해 취역시키고, 내년에 2번 함 안토니오 루나함을 인수할 예정이다. 인수가 완료되면 예산이 확보되는 대로 한국형 함대공미사일인 해궁과 CIWS(Close-In Weapons System·근접 방어 병기 시스템) 등을 탑재해 대공 전투 능력을 크게 강화한다는 계획이다.
이처럼 현재까지 두테르테 정부가 추진한 필리핀군 현대화 프로그램은 ‘Made in Korea’를 위한 무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필리핀의 군사력 현대화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최근 국방 분야에 대대적으로 투자하고 있는 필리핀 정부가 신형 장갑차와 야포, 전투기, 잠수함 등 다양한 신규 무기체계 소유를 발표했기 때문이다. 필리핀시장을 선점하고 나아가 동남아시아시장에서 한국산 무기의 ‘한류’를 일으킬 수 있도록 정부 차원의 적극적인 지원이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