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기(52·사진) 씨가 입을 여는 순간 멍해지고 말았다. 준비해간 수많은 질문이 머릿속에서 하얗게 지워졌다.
김씨는 스스로 말했듯 암환자다. 동시에 정신건강의학과(정신과) 전문의이기도 하다. 그는 2012년 4월 벚꽃이 흩날리던 어느 봄날 소장 임파선(림프샘)암 진단을 받았고, 이후 몇 달간 참혹한 항암치료를 했다. 머리카락이 다 빠지고, 말단신경의 감각이 무뎌졌으며, 온몸 구석구석에서 끝없이 염증이 생겨났다. 치료가 끝난 뒤에도 후유증은 오래 갔다. 하지만 그는 모든 과정을 견뎌냈고, 지금은 전과 다름없이 병원에서 환자를 돌보고 있다.
김씨를 만나기로 마음먹은 건 이 때문이었다. 많은 암환자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우울증으로 삶의 질이 추락하는 경험을 한다. 정신과 전문의는 자신에게 닥친 이 위기를 어떻게 이겨냈을까 묻고 싶었다.
김씨의 전문 분야가 트라우마 치료인 것도 그를 만나야겠다고 마음먹는 데 한몫했다. 트라우마는 전혀 예측하지 못한 순간 찾아와 사람을 죽을 듯한 공포와 무력감에 시달리게 만드는 감정을 뜻한다. 건강하게 살던 이가 암 선고를 받으면 바로 이런 고통에 직면하게 된다.
김씨는 20여 년간 트라우마 치료에 몰두해왔고 본인이 직접 경험하기까지 했다. 암환자들이 겪는 심리적 문제의 해결책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미처 질문을 꺼내기도 전, 그가 먼저 “나는 여전히 고통받고 있고, 이 상처는 영영 치유되지 않을 것”이라고 털어놓은 것이다.
“I am cancering”
문득 시선을 돌려 바라본 시곗바늘은 오후 6시 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침부터 쉼 없이 환자를 만나온 김씨는 막 그날의 일과를 끝낸 참이었다. 의자 등받이에 깊이 몸을 기대며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꽤 힘든 하루였어요. 어깨가 뻐근하고 목소리도 잘 안 나오네요. 이런 순간이 오면 덜컥 겁이 나요. 혹시 암이 어깨뼈로 전이된 건 아닐까. 이 목의 통증이 잠깐 있다 사라지는 게 아니면 어쩌지…. 우습죠? 그런데 암환자는 다 그래요. 사소한 배탈에도, 콧물감기에도 부정적 생각이 솟아올라 결국 죽음에 대한 공포로까지 치달아가죠.”
늦은 오후, 마지막 환자가 병원 문을 나서고 비로소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오면, 그는 종종 이런 감정에 사로잡힌다고 했다. 나약함과 무기력함이 커지는 날이면 3년 전 봄날의 기억도 다시 떠오른다.
계속되는 체기와 복부 통증으로 후배 의사를 찾아갔던 날이다. CT(컴퓨터 단층촬영) 영상을 본 후배는 “아무래도 암인 것 같다”며 바로 큰 병원 예약을 잡아줬다. 그리고 다음 날, 그는 어느 대학병원 혈액내과에서 자신을 덮친 가혹한 운명의 실체를 확인했다.
의대생 시절 연극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에서 주연 맥머피 역을 맡아 열연하고 있는 청년 김준기 씨. 김씨에게 연극반 활동의 추억은 암의 고통을 잊게 해주는 ‘안전지대’ 가운데 하나다.
분노는 오래가지 않았다. ‘의사랍시고 만날 환자들한테 이런저런 충고를 해왔으면서 정작 내 몸 하나 관리 못 하고 이게 대체 뭔가’ 하는 생각이 드니 곧 온몸의 힘이 빠져버린 것이다. 이번엔 우울과 절망감에 눈물이 쏟아졌다.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이라는, 책에서나 보던 ‘사람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5단계 심리변화’를 고스란히 겪었다. 그동안 수많은 환자를 만나왔지만 그들의 고통에 100% 공감하지는 못했다는 것도 절실히 깨달았다.
“암수술을 받았을 때도 그랬어요. 마취가 깨니 정말 아프고, 또 아프더군요. 병원 침대에 누워 ‘통증이란 게 이런 거구나’ 생각했어요.”
견디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런데 한순간, 신기하게도 그의 안에서 그동안 환자들에게 수없이 들려줬던 ‘주문’이 흘러나왔다.
“편안하게 심호흡을 하면서 당신의 삶에서 가장 안전하고 평온했던 장소, 평화롭던 순간, 행복한 장면을 떠올려보십시오.”
암이 가르쳐준 것
내면의 목소리가 그에게 이야기를 건네고 있었다. 그 지시에 따라 숨을 들이쉬고 잠시 멈췄다 천천히 내뱉었다. 복부통증 때문에 심호흡이 쉽지 않았지만 서서히 익숙해졌다. 그와 동시에 어린 시절 자주 그를 안아주던, 외할머니의 따뜻한 품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몸이 이완될수록 점점 푸근한 할머니 냄새와 기분 좋은 웃음소리, 엉덩이를 도닥여주던 손길까지 하나하나 되살아났다.
“나중에 보니 제가 3시간을 행복한 추억에 빠져 있었더군요. 그 덕에 통증을 어느 정도 잊을 수 있었어요. 우리 뇌는 상상과 실제 일어나는 일을 잘 구별하지 못해요. 좋은 기억을 불러낼 수만 있다면, 긍정적인 신체감각도 느낄 수 있는 거죠.”
그는 이렇게 자신의 몸으로 하나하나 치유의 방법을 실험했다. 등산하기, 잘 먹기, 규칙적으로 운동하기, 명상하기, 그리고 친구들과 만나 ‘낄낄대기’ 등도 순간순간 찾아오는 고통을 잊는 데 도움이 됐다. 그는 이 체험을 모아 에세이 ‘넘어진 그 자리에 머물지 마라’도 펴냈다.
하지만 암은 트라우마 전문가에게도 결코 마음의 평화를 허락하지 않는다. 항암치료 후 한동안 재발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3개월마다 정기검진을 받은 그는 지금은 6개월마다 병원을 찾는다. 그런데도 의사가 검진 결과를 살펴본 뒤 입을 열기까지의 순간에 도저히 적응할 수 없다고 했다. 매번 극도의 공포를 느낀다는 것이다.
얼마 전 검진에서 갑상샘 기능 항진증 진단을 받고는 또 한 번 삶의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몸의 면역체계가 갑상샘을 외부 물체(항원)로 파악하고 공격하는 ‘자가면역질환’이 왜 내게 찾아온 걸까, 그 사실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또 화가 솟구쳤고 처절하게 절망했어요. ‘내가 그동안 얼마나 노력했는데. 건강한 음식, 운동, 명상…. 할 수 있는 건 다했는데, 그래도 안 되면 어쩌라는 거야. 이 망할 면역시스템아…’ 하고.”
하지만 그는 여전히 살고 있다. 다시 좋은 음식을 챙겨 먹고, 즐거운 생각을 하며, 친구를 만나 웃음을 나눈다. 그것은 자신을 짓누르는 트라우마를 이겨내는 과정이면서, 동시에 하루하루의 삶을 그 누구보다 생생하고 찬란하게 체험하는 것이기도 하다.
“세상 모든 사람은 다 살아가는 동시에 죽어갑니다. 자신이 죽어가고 있음을 깨닫지 못할 뿐이죠. 하지만 저는 암에 걸린 덕에 내가 죽어간다는 걸 분명히 알게 됐어요. 그건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니지만, 그 깨달음 덕분에 매순간을 더 소중히 여기게 됐습니다.”
그는 사람 좋은 미소를 띠고 말했다. 김씨가 기자를 만난 건 바로 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라는 걸 그제야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