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밀면’의 밀면(왼쪽)과 ‘개금밀면’의 밀면.
일본인들이 떠나자 일본에서 돌아온 귀한(歸韓) 동포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이들은 미군정에서 나오는 미군물자나 구호물자를 팔았다. 이때부터 이곳은 ‘돗데기(도떼기)시장’으로 불렸다. 1948년에는 ‘자유시장’으로, 49년에는 ‘국제시장’이란 지금의 명칭이 붙었다. 50년 6·25전쟁이 일어나고 피난민이 몰려들면서 전국에서 온 피난민과 증명서를 받은 월남 실향민들이 국제시장 주변에 터를 잡고 장사를 시작했다.
국제시장은 더욱 비대해졌다. 상인 중에는 광복 이후 서울 남대문과 동대문에서 장사를 해온 북한 실향민 출신도 많았다. 북한 실향민은 생존을 위해 강한 유대를 이뤘다. 서울에서나 부산에서나 그들 연대의 중심 공간은 냉면집이었다. 고향 음식을 먹으며 정보를 교환하고 정체성을 확인했다.
1951년부터 54년 사이 부산을 찍은 사진에는 냉면집이 다섯 군데나 등장한다. 국제시장 ‘함흥냉면옥’을 비롯해 신창동 ‘고려정냉면’, 시청 옆 ‘평양서부면옥’, 동아극장 옆 ‘황금냉면옥’, 동광동 ‘광락냉면’같이 냉면은 어느 특정 지역이 아니라 부산 전 지역에서 고르게 발견된다. 53년 전쟁이 끝나자 남한 출신 실향민은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북한 출신은 부산에 대거 정착했다. 이들을 위해 대규모 정착촌이 만들어졌는데 지금의 남구 우암동과 부산진구 당감동이다. 그들 중 상당수가 흥남철수와 1·4후퇴 때 넘어온 함경도 출신이었다.
우암동 입구에는 함경도 흥남 내호 출신 실향민이 세운 ‘내호냉면’이 들어서고 당감동에는 ‘본정냉면’ ‘함흥회냉면’ 같은 식당이 장사를 시작했다. 당시 부산 사람들은 우동이나 소면 같은 밀가루 국수 문화에 익숙해 있었다. 피난 기간이 길어지면서 북한에서 먹던 음식을 그대로 만드는 데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겼다. 감자나 고구마전분 같은 재료를 구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동안 북한식 냉면을 아꼈던 부산 토박이 손님들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내호냉면’은 창업 후부터 북한 실향민에게는 회국수 같은 함경도식 냉면을, 부산 토박이에게는 일반 국수를 팔았다. 몇 년이 흐른 1959년 냉면과 국수의 이 불편한 동거를 끝맺을 새로운 면이 ‘내호냉면’에서 만들어진다. 밀가루 70%와 고구마전분 30%를 섞은 밀냉면이 만들어진 것. 실향민과 부산 토박이 모두가 좋아하는 냉면의 탄생이었다.
밀냉면이 한동안 경상도 냉면, 부산 냉면이라 불린 이유도 그 때문이다. 1970년대 초반 ‘가야밀면’에서 100% 밀가루를 이용한 면이 만들어지면서 밀면은 확고한 정체성을 갖게 된다. 다양하던 명칭도 이때부터 밀면으로 통일된다. 한약재로 우려낸 달달한 국물로 최고 인기를 얻고 있는 ‘개금밀면’과 시원한 육수가 일품인 ‘국제밀면’ 등 밀면은 새로운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봄인가 했더니 기온이 20도를 넘나든다. 시원한 밀면 한 그릇이 그리워지는 계절이 다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