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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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아직도 현역 플레이어, 심사로 남 훈수 둘 생각 없다”

한국 기타의 전설 신중현

  •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입력2011-11-21 10: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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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아직도 현역 플레이어, 심사로 남 훈수 둘 생각 없다”
    두 가지 뉴스가 ‘기타의 전설’신중현(73) 선생을 또 한 번 세상으로 불러냈다.

    11월 9일 문화체육관광부가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수상자 6명의 명단에 그를 포함한 게 하나, 그리고 최근 컴백한 원더걸스가 2집 앨범 ‘원더월드’에 ‘미인’이란 곡을 넣은 게 둘.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란 가사와 독특한 기타 리프로 유명한 신중현의 1974년 작 ‘미인’을 샘플링한 곡이다. 40년이 흘러 걸그룹이 다시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세련됐다.

    1960년대 작 김추자의 ‘거짓말이야’와 펄 시스터즈의 ‘커피한잔’에서도 신중현의‘토속적 모던함’이 발견되지 않는가. 또한 1980년대 이선희가 리메이크한 ‘아름다운 강산’이나 김완선의 파격적 댄스곡 ‘리듬 속의 그 춤을’에서는 21세기 케이팝(K-pop) 내음이 난다. 신중현은 우리나라 최초의 솔로 기타리스트면서 록밴드의 시조였고, 500여 곡을 쓴 작곡가, 그리고 섹시가수 제조기였던 셈이다.

    “전설이라기보단 워낙 오래된 거죠. 미8군 무대를 통해 1958년 첫 앨범을 내고 음악을 시작했으니까요. 고생 끝에 70년부터는 예술성과 상업성 모두를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곧장 활동 금지를 당하면서 (그간) 이룬 게 모두 사장됐어요. 워낙 피해가 크다 보니 재기가 쉽지 않더라고요(웃음).”

    “어찌나 심사위원 해달라는지…”



    웬 겸손인가. 한국 대중음악 시장이 한층 원숙해지고 세계화된 지금, 원조와 원류의 가치는 급등할 수밖에 없게 마련이다. 그가 한국 대중음악의 ‘원로’를 넘어 ‘전설’이라는 데 이견을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한국에서보다 팝의 원류인 미국에서 그에 대한 관심이 더 뜨겁다. 노장의 히트곡은 머지않아 미국에서 재출시를 앞두고 있다.

    “제 음악이 세계적 음악의 대열에 낄 수 있다는 점에서 보람과 희망을 엿봅니다. 음악이란 전 세계와 소통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점에서 1970년대는 얼마나 암흑기였는지….”

    뭐가 그리 깜깜했다는 걸까. 널리 알려진 일이지만 그는 ‘1974년 대마초 파동’의 직접적 피해자다. 퇴폐음악의 생산자이자 대마 조달책으로 지목된 그는 4개월간 수감되면서 모진 고통을 당했다. 신중현 개인의 좌절이자 대중음악 전체의 암흑기였다. 그는 이제 그 시절과 화해했을까.

    “글쎄… . 그땐 포기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내 삶 자체가 음악이더군요. 음악을 떠날 수 없었기에 복잡한 감정을 안고 오늘날까지 흘러온 거예요. 지금도 앨범작업을 하면서 기록을 남기는 이유는 그래야 분이 풀리기 때문이기도 해요.”

    그는 여전히 그 시절에 대한 아픔을 잊지 못했다. 아니, 어찌 잊을 수 있으랴. 말머리를 돌려 분위기를 바꿔야 했다. 최근 KBS ‘TOP밴드’를 필두로 밴드음악이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젊은이들에게 기타가 소통의 수단으로 재등장한 것이다. 30년 만에 맞이한 ‘기타 부활’의 시대다.

    “어휴, 어찌나 심사위원 해달라는 요청이 많은지….”

    누구나 인정하는 기타의 거장(巨匠)이라는 뜻이니, 반갑게 받아들여야 할 청이 아닐까.

    “심사가 당최 무슨 소리요…. 심사위원석에 앉아가지고 훈수 둘 생각은 전혀 없어요. 나는 아직도 현역 플레이어예요. 아직은 할 일 많은 신인 기타리스트에 가깝지, 기성세대가 돼 뒷방에 앉아 심사나 할 수는 없는 일.”

    “서열 세다간 의욕도 순진함도 잃기 십상”

    “난 아직도 현역 플레이어, 심사로 남 훈수 둘 생각 없다”

    1959년 내놓은 신중현의 첫 음반.

    또 겸손이다. ‘영원한 현역’으로 뛰겠다는 무한의 욕심이기도 하다. 후배들의 기타 실력은 어떻게 보고 있을까.

    “정말들 잘하는 것 같아요. 연주를 볼 때마다 깜짝 놀라요. 우리 젊은이들이 세계 수준에서 결코 떨어지지 않아요.”

    그가 덧붙인다.

    “젊은이들의 주법(속주)을 따라 하기란 쉽지 않은 일인데…. 저는 결코 남을 흉내 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제 주법이 더욱 창의적이죠.”

    그의 집념에 혀가 내둘러진다. 젊은 뮤지션의 실력을 평론가의 관점이 아닌 연주자의 관점에서 보며, 그러니까 자신의 라이벌로 규정하는 것이다. 이런 ‘멘탈’덕분에 50년간 현역으로 무대를 장악해온 게 아닌가 싶다. 한국 최초의 록 뮤지션으로 손꼽혀온 신중현은 미국 록 음악계에서도 ‘새로운 발견’으로 통한다. 그가 선보이는 독특한 한국적 리듬감에 매료당한 것이다. 2009년 세계적 기타 제조사인 펜더(Fender)가 그에게 수제 커스텀 기타를 헌정한 게 그 방증이다.

    기타 하나 선물 받은 게 뭐 그리 대수냐고? 천만의 말씀. 전 세계에서 이 기타를 헌정받은 기타리스트는 에릭 클랩튼, 제프 벡, 에디 반 헤일런, 잉베이 맘스틴, 그리고 스티비 레이본 등 ‘기타의 신’으로 불리는 이들이다. 신중현은 6번째이자 아시아인 최초로 펜더 수제 기타를 받은 뮤지션으로 기록됐다. 그가 얼마나 감격했는지 짐작조차 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늘이 준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늘이 아니면 나에게 이런 귀한 것을 줄 수 없으니까. 그런 것을 받는다는 것은 꿈에도 차마…. 동양 사람은 안 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이것을 받은 이상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 그것이 마음의 부담이자 자신감의 원천이죠.”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거의 울 뻔했다. 그가 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이유는 독창적인 색깔 때문이다.

    “음악은 나라마다 특성이 있어요. 저는 일찍부터 한국이 가진 가락, 흥, 리듬, 장단 등을 현대화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고전음악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현대문명(기타)과 함께 세계 수준으로 갖고 놀아야 한다고 생각했죠.”

    신중현은 기타로 ‘궁-상-각-치-우’ 5음계를 풀어내고 우리의 전통가락에서 솔과 리듬 앤드 블루스, 심지어 사이키델릭까지 뽑아낸다. 그가 시도한 모던과 전통의 조화가 결국은 세계적 보편성을 획득한 것이다. 거장과의 만남에서 다른 아티스트 얘기는 꺼내는 게 예의는 아니다. 그러나 시나위 기타리스트 신대철(44)에 대한 질문은 필연이다. 그의 아들이자 한국 기타의 자존심으로 불리는 뮤지션이기 때문이다.

    “제 아들은 볼 시간도 없네요. 알아서 잘하고 있겠지만 만족은 안 합니다. 아직은 갈 길이 멀어요.”

    대답이 조금은 퉁명스럽다. 흡사 라이벌을 대하는 듯하다. 신대철도 어느덧 중견 연주자로서 수많은 기타리스트의 롤모델이 됐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가 거부한 TOP밴드 심사위원을 아들이 대신한 모양새다.

    “저는 나이는 상관 안 해요. 대철이 나이가 몇이라고요? 나이를 잊어야 젊음을 유지할 수 있는 법이에요. 서열 세다간 의욕도 잃어버리고 순진함도 잃어버리는 법이에요. 예술가에게 나이는 무의미해요.”

    그는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음악에 대한 자세가 똑같다고 강조한다. 음악 하는 후배가 아닌 이 땅의 모든 예술 하는 후배에게 건네는 조언으로 들린다.

    “난 아직도 현역 플레이어, 심사로 남 훈수 둘 생각 없다”
    “음악에 빠져들던 초창기 때가 자주 생각나요. 그때는 물불 모르고 로큰롤에 빠져들었어요. 전 세계적인 록밴드의 시대였죠. 오로지 음악에 빠져 살았고 재미도 있었고 추억도 가장 많았어요. 그런 순박한 ‘우드스탁’의 시대로 다시 돌아가고 싶네요. 가능하다면 영.원.히.”

    노장 망막에 50년간의 시공간이 압축됐다 스프링처럼 튀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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