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국적을 버리지 않으면 ‘만년 조수(한국의 조교에 해당)’로 머물러야 했지요.” 부산 출신인 그는 오사카시립대 상학과를 졸업한 뒤, 63년 모모야마대학 전임강사로 임용됨으로써 폐쇄적 학풍을 유지하고 있던 일본 사회를 놀라게 했다. 이는 이 대학이 기독교 계통으로 일본의 여타 대학과 달리 자유스러웠던 교풍을 가진 덕분으로, 이후 그는 65년 조교수, 71년에는 정교수로 승진했고, 74년에는 외국인으론 처음 이 대학의 대학원장(경영대학원)에 올랐다.
그의 ‘기나긴 싸움’은 정교수에 임용된 다음해인 72년, ‘재일한국-조선인(조총련계 교포) 대학교원간담회’를 결성한 때부터 시작됐다. 이후 그는 일본 정부와의 지루한 10년 투쟁 끝에 지난 82년 결국 ‘국공립대학 외국인 임용법’의 제정이라는 큰 성과물을 얻어냈다. 이는 그간 제도적 차별 때문에 유흥업소나 음식점, 파친코장을 운영하는 데 그쳐야 했던 재일교포에게도 학계에서 활약할 기회가 주어진 엄청난 사건이었다.
“이 법에 따라 많은 분들이 일본에서 정식교수 신분으로 강의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의 노력 덕분에 지난해까지 일본의 국립대 외국국적 보유 교원(조교 제외) 705명 중 한국인 교수나 강사가 118명에 이르는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차별의 골’이 아직 선명하게 남아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 705명의 외국계 교원 중 일본 국적자와 평등한 조건으로 임용된 사람은 46명뿐이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채용시 임기를 미리 정해놓은 일종의 계약직 형태로 근무하고 있는 것. 또 그는 이같은 차별의 뒤안길에는 한국-조선계 연구자에 대한 끊임없는 귀화 회유와 압력이 존재한다고 귀띔했다. 남은 여생을 일본 내 교원임용 차별운동에 보내겠다는 노교수의 다짐에서 간단치 않았던 그의 인생역정을 읽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