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는 11월 6일(이하 현지 시간) 대선 승리 연설에서 “미국에는 러시아와 사우디아라비아를 포함한 세계 어느 나라보다 더 많은 ‘액체 금(liquid gold)’이 있다”며 “이 화석연료를 채굴해 저렴한 전기를 가정과 기업에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액체 금은 석유와 천연가스를 가리킨다. 트럼프는 화석연료 생산을 대폭 늘려 미국을 최대 에너지 생산국으로 만들겠다는 입장이다. 그럼 미국 국민의 에너지 비용을 절반 이상 낮출 수 있는 데다, 미국과 우방은 적대국의 에너지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유에서다. 게다가 물가 안정과 경제성장에 도움이 되고 양질의 일자리도 창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11월 6일(현지 시간) 미국 플로리다주 팜비치 행사장에서 미소 짓고 있다. [뉴시스]
“美, ‘액체 금’ 어느 나라보다 많아”
트럼프는 내년 1월 20일 취임 이후 △파리기후변화협약 재탈퇴 △알래스카 북극국립야생보호구역 시추 허용 △화석연료 활성화 등 에너지 정책을 적극 추진할 계획이다. 그는 2017년 “기후위기는 사기”라며 파리기후변화협약에서 탈퇴했는데, 이번에도 취임 즉시 탈퇴할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는 석유·천연가스에 대한 미국의 에너지 패권을 강화하겠다는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실제로 2기 정부에서 에너지 정책을 총괄할 국가에너지회의를 신설할 계획이다. 국가에너지회의는 에너지의 허가·생산·발전·유통·규제·운송 업무를 수행하는 모든 관련 부처 및 기관으로 구성될 예정이다. 트럼프는 “이 회의는 불필요한 규제를 줄이고, 경제 전반에 민간 부문 투자를 강화하며, 오래된 규제 대신 혁신에 초점을 맞춰 ‘미국의 에너지 지배’로 가는 길을 감독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트럼프가 화석연료 옹호론자들을 에너지 관련 부처 수장으로 발탁한 것도 화석연료 개발에 적극 나서겠다는 의도라고 볼 수 있다. 대표적 인물이 내무장관과 신설될 국가에너지회의 의장에 지명된 더그 버검 노스다코타 주지사다. 트럼프는 버검 내정자를 ‘에너지 차르’라고 부르며 2기 정부의 에너지 정책을 총괄하도록 했다. 내무부는 미국의 국유·공유지, 국립공원, 야생동물 보호구역 등 연방정부가 관리하는 토지를 담당한다. 석유와 가스 시추, 풍력과 태양광발전 관련 부지를 임대하는 업무도 내무부 소관이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이 같은 행보에 대해 “트럼프의 의도는 연방정부 소유의 땅과 바다를 석유·천연가스 시추 사업에 개방하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트럼프는 청정 지역인 북극에서 화석연료 개발을 대거 허용할 계획이다. 알래스카주 북극국립야생보호구역은 북극곰, 물새, 순록 등이 서식하는 미개발지이지만 석유 110억 배럴이 매장된 자원의 보고이기도 하다.
버검 내정자는 지난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로 경선에 출마했으나 조기 사퇴하고 트럼프를 지지했다. 트럼프는 한때 그를 부통령 후보로 검토했다. 버검 내정자는 소프트웨어 기업 운영과 부동산 사업으로 부를 축적한 억만장자이기도 하다. 재산이 15억 달러(약 2조1500억 원)나 된다. 특히 버검 내정자는 자신의 토지 82만㎡(약 25만 평)를 미국 굴지 석유·가스회사 ‘콘티넨털 리소시즈’에 임대해주고 있다. 노스다코타는 미국의 3대 석유 생산 지역이자 최대 셰일가스 매장지로, 버검 내정자는 2016년부터 주지사로 일하며 굴지의 에너지 기업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버검 내정자는 트럼프 2기 정부에서 에너지 회사들에 국유지 시추권을 내주는 등 대규모 탈규제 정책을 통해 미국의 석유·천연가스 생산 늘리기에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
‘원유 과잉 공급’ 우려에도 직진
미국 최대 에너지 기업 엑손모빌이 텍사스주 퍼미언 분지에서 셰일오일을 생산하고 있다. [엑손모빌 제공]
트럼프는 환경보호국(EPA) 국장으로 리 젤딘 전 하원의원을 지명했다. 젤딘 내정자는 하원의원 시절 주요 환경보호 법안에 반대한 인물로, 미국 기업의 힘이 최대한 발휘될 수 있는 환경 규제를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 에너지업계는 트럼프의 화석연료 활성화 계획에 따라 대대적인 석유·천연가스 개발과 생산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미국 최대 에너지기업 엑손모빌은 올해 460만 배럴인 하루 석유·가스 생산량을 2030년 540만 배럴로 늘리겠다고 밝혔다. 540만 배럴은 중동 주요 산유국인 이라크나 쿠웨이트의 하루 생산량보다 많다. 이를 위해 설비투자액을 올해 280억 달러(약 40조2200억 원) 수준에서 내년 290억 달러(약 41조6500억 원), 2026년부터 2030년까지 330억 달러(약 47조4000억 원)로 늘릴 것이라고 밝혔다. 전 세계 원유시장의 과잉 공급 우려에도 화석연료 투자를 확대하겠다는 계획이다.
사우디와 러시아 등 주요 산유국 협의체인 OPEC+는 세계 경제성장 둔화와 소비 약세를 이유로 내년 4월까지 감산을 연장한 바 있다. 엑손모빌의 대규모 설비투자 및 화석연료 생산 계획은 사우디와 러시아의 감산을 통한 고유가 유지 전략에 타격을 줄 것으로 보인다. 미국 원유 생산량은 2023년 말 기준 하루 1330만 배럴로, 러시아(1000만 배럴)와 사우디(900만 배럴)를 제치고 세계 1위다. 미국이 앞으로 원유 생산량을 더욱 늘릴 경우 압도적인 1위가 될 전망이다.
미국은 천연가스 생산량에서도 세계 1위다. 영국 에너지 기업 BP가 발간한 ‘세계 에너지 통계 분석 2023’에 따르면 2022년 미국 천연가스 생산량은 9786억㎥로 같은 기간 전 세계 천연가스 생산량의 24.2%를 차지했다. 중동 국가들의 천연가스 생산량을 모두 합한 것보다 많은 양이다. 이란(2594억㎥), 카타르(1784억㎥), 사우디(1204억㎥) 등 중동 국가의 전체 천연가스 생산량은 7213억㎥로, 전 세계 생산량의 17.8% 수준이다. 러시아의 천연가스 생산량은 6184억㎥로 전 세계 생산량의 15.3%를 차지했다. 유럽 국가들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 대한 제재 조치로 천연가스 수입을 대부분 중단한 것이 영향을 미쳤다. 향후 미국의 천연가스 생산량은 증가할 전망이다. 퍼미언·애팔래치아·헤인즈빌 분지 등에서 프래킹 기법을 통해 추가적으로 셰일가스를 추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