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1월14일 경기 성남시 상공회의에서 열린 한나라당 민생경제살리기 전체회의에 참석한 황영기 회장(맨 왼쪽).
9월9일 황영기 KB금융지주 회장(사진·전 우리금융지주 회장 겸 우리은행장)에 대한 금융위원회(이하 금융위)의 중징계 확정 전후에 벌어진 논란을 두고 한 금융권 인사가 한 말이다. 그는 “과거 ‘○양 비디오’가 인터넷에 나돌면서 이를 훔쳐보기 위해 때아닌 컴퓨터 공부 열풍이 일었듯, 황 회장에 대한 징계 논란으로 국민이 언론을 통해 자연스럽게 금융파생상품 공부를 하게 됐다”며 씁쓸해했다.
징계 억울? 재심 청구 관측도
이번에 논란이 된 금융상품은 부채담보부증권(CDO)과 신용부도스와프(CDS). 일반인은 평소 듣도 보도 못한 상품이다. 그러나 금융감독 당국이 이 상품에 대한 투자 손실 책임을 물어 황 회장을 징계하고, 황 회장이 이에 반발하는 상황이 연일 언론에 보도되면서 어느새 이 상품에 익숙해졌다.
우리은행은 2004년 6월부터 2007년 7월까지 CDO·CDS에 15억4000만 달러를 투자했다가 80%가 넘는 12억5000만 달러를 손실로 떠안았다. 우리 돈으로 1조5000억원이나 된다. 이 상품의 투자 결정 과정에서 당시 우리금융지주 회장 겸 우리은행장이던 황 회장이 은행법 등 관련 법규를 위반했다는 게 금융감독 당국의 판단. 금융위는 9월9일 황 회장에 대해 직무정지에 상당하는 징계를 확정했다.
이에 황 회장은 발표문을 통해 “옳고 그름을 떠나 그동안 심려를 끼친 점, 송구스러운 마음 금할 길 없다”면서도 “금융위의 징계 확정에 어떻게 대처할지를 심사숙고한 뒤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금융권에서는 그동안 황 회장이 금융감독 당국의 징계 방침에 억울함을 호소하고 항변해왔다는 점에서 재심을 청구하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많다.
황 회장 측은 그동안 “당시 우리은행 실무진이 자유로운 판단에 따라 투자했기 때문에 황 회장은 몰랐던 데다, 대규모 손실이 발생한 것은 황 회장 퇴임 이후 사후관리를 잘못했기 때문”이라고 해명해왔다. 경영적 판단을 사후 결과만으로 징계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주장. 일부에선 금융위의 징계 확정 이후에도 여전히 황 회장을 편들고 있다.
과연 황 회장의 주장은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가질까. 황 회장을 변호하는 쪽에서 주장하는 대로 금융감독 당국이 ‘사후 제재’ ‘편의적 감독’을 한 것일까.
상당수 금융 전문가들은 황 회장이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을 펴고 있다고 반박한다. 이들은 특히 CDO·CDS의 구조를 알면 황 회장 주장의 허구성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고 강조한다.
CDO·CDS는 선진 투자은행이 만들어놓은 ‘거품’이라고 할 수 있다. CDO·CDS를 설명하려면 모기지 시장을 먼저 언급해야 한다. 모기지는 상업은행이 주택을 담보로 대출을 해주는 것. 이때 채무자의 신용도에 따라 등급을 나누는데, 가장 낮은 등급이 ‘서브프라임’이다.
모기지는 일반적으로 만기 30년 정도의 장기 상품이다. 은행으로선 그동안 자금이 묶이게 될 뿐 아니라, 채무 불이행이라는 위험에 오랫동안 노출된다. 은행의 이런 문제를 해결해주는 게 바로 ‘패니메이’ ‘프레디맥’ 같은 모기지 전문회사다. 이들 회사는 은행의 모기지를 사들인 뒤 이들을 묶어 새로운 채권으로 만들어 투자자들에게 판매해왔다. 이 채권을 ‘모기지 유동화증권(MBS)’이라고 한다.
MBS를 사들이는 투자자는 주로 미국 월가의 투자은행이었다. 투자은행은 이후 MBS에 편입된 모기지를 재분류해 CDO라는 파생금융상품을 만들었다. 겉으로 보기엔 첨단 금융기법을 동원한 그럴듯한 상품이지만, 본질은 서브프라임 모기지나 신용등급이 낮은 일반 대출채권을 높은 등급으로 포장한 것에 불과하다.
“은행은 투기성 고위험에 진출하지 않아”
투자은행들은 이런 CDO를 다른 기관투자가나 헤지펀드에 팔아치웠다. 이때 CDO가 부도날 가능성에 대비해 채권보증기관 같은 곳에 CDS를 주문한다. CDS 구매자는 판매자에게 매년 일정 금액을 지급하고, 그 반대급부로 기초증권이 파산하면 기초증권의 액면가를 지급받는다. 이런 점에서 CDS는 일종의 보험상품인 셈이다. ‘주간동아’가 입수한 우리은행의 내부 자료 ‘외화 유가증권 투자 내역’에 따르면, 우리은행이 2005~07년 CDO·CDS에 투자한 금액은 총 15억4000만 달러.
이 가운데 서브프라임 모기지를 기초자산으로 하는 CDO에 투자한 금액은 4억9000만 달러다. 또한 비(非)모기지를 기초자산으로 하는 CDO와 CDS에는 각각 5억5000만 달러와 5억 달러를 투자했다. 우리은행의 CDO·CDS 투자금액 가운데 황 회장의 행장 시절에 이뤄진 것은 12억5000만 달러. 나머지는 후임인 박해춘 행장(현 국민연금공단 이사장) 시절에 투자가 이뤄졌다. 우리은행의 내부 자료를 검토한 한 금융 전문가는 “CDO·CDS의 구조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무모하게 투자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일반 상업은행이 CDO·CDS에 투자한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CDO·CDS는 일반 채권에 비해 고수익이긴 하지만, 그만큼 위험률이 높다. 고객 자산을 안정적으로 운용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는 정통 뱅커(banker) 출신이라면 당연히 CDO·CDS를 거들떠보지 않아야 한다는 얘기. 더욱이 우리은행의 내부 자료를 보면, 황 회장의 행장 시절에 투자한 CDO·CDS는 만기 10년 이상 30~40년짜리가 대부분인 후순위 채권이다.
한 시중 은행 관계자는 “은행은 관례적으로 투기성 고위험 영역인 10년 이상의 채권에는 진출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우리은행이 투자한 CDO·CDS는 특성상 유동성 부족으로 유통시장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아 중도 매각이 어렵고, 경우에 따라서는 만기 때까지 보유해야 하는 상품이다. 손실을 감수하고 중도 매각을 하고 싶어도 거의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따라서 ‘사후관리 잘못’이라는 황 회장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과도한 자산 성장 욕심이 화 불러
황 회장이 국제금융 전문가라는 평판에 대해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대목은 또 있다. 바로 매입 시점이다. 특히 서브프라임 모기지 CDO를 2006년 이후 집중적으로 사들였다. 당시는 서브프라임 모기지의 연체율이 급등한 상태였다. 2005년 1분기에 10.8%이던 연체율이 2006년 1분기에는 12.6%, 2007년 1분기에는 15%로 상승했다. 당연히 서브프라임 모기지를 기초자산으로 하는 CDO의 위험도도 급상승했다.
한 금융 전문가는 “당시 미국 투자은행들이 국내 은행을 상대로 CDO·CDS 판매에 열을 올린 것은 결과적으로 ‘폭탄 돌리기’ 차원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금융권 관계자는 “정통 뱅커 출신인 강정원 국민은행장이 CDO·CDS에 투자하지 않은 것은 많은 점을 시사한다”고 말했다. 금융위는 “CDO·CDS 투자에 대해 몰랐다”는 황 회장의 주장도 사실이 아니라고 못 박았다.
황 회장이 행장 재임 시절, 투자은행(IB) 본부에 전년 대비 자산수익 증대 목표를 은행 전체의 증대 목표보다 과도하게 높게 부여해 사실상 CDO·CDS 투자 확대를 지시했다는 것이다. 또 이를 위해 별도의 은행장 지시도 내렸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은행의 CDO·CDS 투자와 대규모 손실 처리는 황 회장의 행장 재임 시절 과도한 자산 성장정책이 불러온 필연적 결과다.
우리은행의 자산은 황 회장의 행장 취임 직후 119조원이었으나 퇴임 시 186조원으로 증가했다. 연평균 18%의 성장률이었다. ‘명목 성장률 이상의 대출 증가는 대출 부실로 귀결된다’는 금융상식을 무시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은행의 CDO 투자는 이해하기 어렵다. 원래 CDO는 대출자산의 유동화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대출자산을 급격히 늘리고 있던 우리은행이 CDO에 투자한 것은 난센스였다.
오히려 우리은행의 주택담보 대출 가운데 신용등급이 낮은 것을 CDO로 만들어 팔았어야 옳다. 황 회장에 대한 금융위의 징계가 확정된 이후 금융권에서는 대체로 이 조치가 국민 경제의 핵심 인프라인 은행산업의 정립을 위해 바람직하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무엇보다 단일 투자 건으로 최대 손실을 기록한 점에 대해 책임 규명을 확실히 함으로써 향후 공적자금 투입 은행의 모럴 해저드를 예방하는 데 기여하리라는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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