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이 말은 머지않아 사어(死語)가 될 비극적 운명을 지닌 말이다. 고향! 고향이라, 어쩌면 이 말을 들으면서 명치끝이 찌르르 아파오는 그런 세대가 한 번만 지나가면, 그러니까 지금의 30, 40대가 노년이 되는 21세기 중엽에 이르면 한반도의 인류에게 ‘고향’이란 큰 도시의 청결하게 단장된 산부인과나 병원쯤을 가리키는 단어가 될 것이다.
개인적 경험을 말한다면, 나는 초등학교 6학년이 되는 딸애와 3학년에 올라가는 아들 녀석에게 제대로 그들의 고향을 가르쳐준 일이 없다. 몇 번 시도는 해보았다. 우선은 생물학적으로 두 녀석 모두 시내의 큰 산부인과 병원에서 태어났으므로 어쩌다 시내 나들이 나갈 때 “이 녀석들아, 너희 고향이 저기다, 저 큰 병원이야” 한 일이 있다. 그 순간 나도 그렇고 아이들도 그렇고, 특히 아내는 더욱더 망연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고향이라, 최신 의료기관이 고향이라. 그것을 다시는 아이들에게 말해주기가 어려웠다.
한번은 아이들이 돌을 보내고 유치원에 다니던 옛 동네를 일러준 일이 있었다. 고향에 대해 알아오라는 학교 숙제 때문이었는데, 마침 어른들 찾아뵈러 들른 김에 오래전에 살던 강북의 어느 아파트 단지에 갔다. 아이들은 그제야 기억의 깊숙한 곳으로 끝없이 미끄러져, 사라져가던 희미한 편린들을 다시 꺼내올 수 있었다. 놀이터, 빵집, 유치원, 우중충한 모습으로 일제히 기립해 있는 아파트 단지. 그곳이 그들의 고향이었다. 이제 우리에게 더는 이청준의 소설 선학동 나그네가 보여주는 고향의 풍광, 그 아득한 풍경은 마침내 사멸하는 중이다.
왼쪽 눈 아래로 때마침 포구를 빠져나가는 완도행 여객선의 바쁜 뱃길이 그림처럼 내려다보였는데, 사내는 그 여객선의 긴 뱃고동 소리에조차 공연히 마음이 쫓기는 심사였다. 그는 그 여객선과 시합이라도 벌이듯 허겁지겁 산길을 돌아들고 있었다. 하지만 여객선의 속력과 사내의 걸음걸이는 처음부터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배는 순식간에 포구를 빠져나가 넓은 남해 바다를 향해 까맣게 섬기슭을 돌아서고 있었다.
사내도 이젠 거의 마지막 산굽이를 돌아들고 있었다. 선학동 쪽으로 길을 넘어설 돌고개 모롱이가 눈앞에 있었다.
사내는 새삼 표정이 긴장되기 시작했다. 산길이 제법 높아 그런지 저녁 해는 회진 쪽에서보다는 아직 한 뼘 길이나 남아 있었다. 이제 마지막 산모롱이를 하나 올라서고 나면, 거기서 다시 오른쪽으로 길게 뻗어 들어간 선학동 포구의 긴 물길이 눈앞으로 시원히 막아설 것이었다.
옥천의 정지용과 아름다운 풍경
‘고향’이라고 말할 때 우선 떠오르는 시인은 옥천의 정지용이다. 그의 이름 앞에 ‘옥천’이라는 지명을 먼저 새긴 것은, 요즘 같은 문화관광 열풍이 불기 이전부터 옥천은 오랫동안 정지용을 아껴왔고 그를 기리는 기념비, 문학관, 문학제 등을 정성껏 치러왔기 때문이다. 지역이 배출한 인물이나 특산물을 소재 삼아 1년에 무려 2000회가량의 ‘축제’가 성행하는 이 나라에서 옥천과 정지용은 적당한 긴장과 존중으로 서로를 해치지 아니하며 아름다운 풍경을 그려왔으니 ‘옥천의 정지용’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제법 현실성이 있는 것이다. 그의 시에 선율을 입힌 노래 향수는 국민가요 수준으로 등극한 지 오래됐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
그런데 향수에서 보이는 이 지극한 정한 때문에 오히려 정지용의 시와 생애가 절반쯤 가려지는 경우도 없지 않다. 작은 도시 옥천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정지용에 관한 여러 기념비와 그 이미지는 ‘고향을 향한 그리움’으로만 요약될 뿐, 희대의 모더니스트이자 정갈한 언어 속에 격렬한 감정을 응축시킨 시인 정지용의 면모는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는 생존 당시만 해도 일상에선 사용되지 않던 고어나 방언을 거침없이 활용했으며 언어를 독특하게 변형하기도 한 ‘모던 뽀이’였다. 그의 옛 우리말 활용은 한편으로는 사라져가는 문화유산의 지킴이 노릇을 했지만 본질적으로는 단정한 시풍(詩風)에서 벗어나려는 열망의 표현이었다. 그는 2행 1연의 단시뿐 아니라 줄글로 이어지는 산문시도 많이 썼고, 쉼표나 마침표를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으며 때로는 낯선 언어를 배치해 시각적인 멀미까지 일으키려 했다.
철저한 낭만성의 역사적 무게
정지용은 일본 도시샤(同志社) 대학 영문과에서 수학한 후 휘문고보와 이화여대에서 영문학을 가르쳤으며, 윌리엄 블레이크와 월트 휘트먼의 시를 소개한 모더니스트다. 정지용은 이 위대한 시인들이 그러했듯, 전통의 언어 속에 급속히 변모하는 근대의 열병을 담아냈다. 시 임종에서 “나의 임종하는 밤은/ 귀또리 하나도 울지 말라”고 쓸 만큼 비루한 현실을 벗어나려는 철저한 낭만성을 보여준 정지용은 초기작 카페 프린스에서 “나는 자작의 아들도 아모것도 아니란다/ 남달리 손이 희어서 슬프구나!// 나는 나라도 집도 없단다/ 대리석 테이블에 닿는 내 뺌이 슬프구나!”라고 썼던 당대성의 시인이었다.
공연한 말장난이 아니라 철저한 낭만성으로 당대성을 이룩한 그의 시는, 특히 ‘고향’을 비롯한 애틋한 서정의 시들은 오늘날 우리 세대를 마지막으로 사라지게 될 ‘유서 깊은’ 어떤 감정에 뭉클한 역사적 무게를 더한다. ‘고향’이 사라지고, 어느 대도시에서나 똑같은 구조와 빛깔과 형상과 기능을 가진 산부인과, 아파트, 유치원 등이 고향을 대신하는 획일성의 시대에 그의 시 ‘고향’이 들려주는 애틋한 감정은 진실로 마음 깊숙한 곳을 뒤흔드는 바가 있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꽁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메끝에 홀로 오르니
흰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개인적 경험을 말한다면, 나는 초등학교 6학년이 되는 딸애와 3학년에 올라가는 아들 녀석에게 제대로 그들의 고향을 가르쳐준 일이 없다. 몇 번 시도는 해보았다. 우선은 생물학적으로 두 녀석 모두 시내의 큰 산부인과 병원에서 태어났으므로 어쩌다 시내 나들이 나갈 때 “이 녀석들아, 너희 고향이 저기다, 저 큰 병원이야” 한 일이 있다. 그 순간 나도 그렇고 아이들도 그렇고, 특히 아내는 더욱더 망연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고향이라, 최신 의료기관이 고향이라. 그것을 다시는 아이들에게 말해주기가 어려웠다.
한번은 아이들이 돌을 보내고 유치원에 다니던 옛 동네를 일러준 일이 있었다. 고향에 대해 알아오라는 학교 숙제 때문이었는데, 마침 어른들 찾아뵈러 들른 김에 오래전에 살던 강북의 어느 아파트 단지에 갔다. 아이들은 그제야 기억의 깊숙한 곳으로 끝없이 미끄러져, 사라져가던 희미한 편린들을 다시 꺼내올 수 있었다. 놀이터, 빵집, 유치원, 우중충한 모습으로 일제히 기립해 있는 아파트 단지. 그곳이 그들의 고향이었다. 이제 우리에게 더는 이청준의 소설 선학동 나그네가 보여주는 고향의 풍광, 그 아득한 풍경은 마침내 사멸하는 중이다.
왼쪽 눈 아래로 때마침 포구를 빠져나가는 완도행 여객선의 바쁜 뱃길이 그림처럼 내려다보였는데, 사내는 그 여객선의 긴 뱃고동 소리에조차 공연히 마음이 쫓기는 심사였다. 그는 그 여객선과 시합이라도 벌이듯 허겁지겁 산길을 돌아들고 있었다. 하지만 여객선의 속력과 사내의 걸음걸이는 처음부터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배는 순식간에 포구를 빠져나가 넓은 남해 바다를 향해 까맣게 섬기슭을 돌아서고 있었다.
사내도 이젠 거의 마지막 산굽이를 돌아들고 있었다. 선학동 쪽으로 길을 넘어설 돌고개 모롱이가 눈앞에 있었다.
사내는 새삼 표정이 긴장되기 시작했다. 산길이 제법 높아 그런지 저녁 해는 회진 쪽에서보다는 아직 한 뼘 길이나 남아 있었다. 이제 마지막 산모롱이를 하나 올라서고 나면, 거기서 다시 오른쪽으로 길게 뻗어 들어간 선학동 포구의 긴 물길이 눈앞으로 시원히 막아설 것이었다.
옥천 정지용 생가와 시비. 정지용의 모교 죽향초교에 세워진 시비와 정지용 문학관의 동상 및 그 내부 (왼쪽 위부터 반시계 방향).
‘고향’이라고 말할 때 우선 떠오르는 시인은 옥천의 정지용이다. 그의 이름 앞에 ‘옥천’이라는 지명을 먼저 새긴 것은, 요즘 같은 문화관광 열풍이 불기 이전부터 옥천은 오랫동안 정지용을 아껴왔고 그를 기리는 기념비, 문학관, 문학제 등을 정성껏 치러왔기 때문이다. 지역이 배출한 인물이나 특산물을 소재 삼아 1년에 무려 2000회가량의 ‘축제’가 성행하는 이 나라에서 옥천과 정지용은 적당한 긴장과 존중으로 서로를 해치지 아니하며 아름다운 풍경을 그려왔으니 ‘옥천의 정지용’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제법 현실성이 있는 것이다. 그의 시에 선율을 입힌 노래 향수는 국민가요 수준으로 등극한 지 오래됐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
그런데 향수에서 보이는 이 지극한 정한 때문에 오히려 정지용의 시와 생애가 절반쯤 가려지는 경우도 없지 않다. 작은 도시 옥천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정지용에 관한 여러 기념비와 그 이미지는 ‘고향을 향한 그리움’으로만 요약될 뿐, 희대의 모더니스트이자 정갈한 언어 속에 격렬한 감정을 응축시킨 시인 정지용의 면모는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는 생존 당시만 해도 일상에선 사용되지 않던 고어나 방언을 거침없이 활용했으며 언어를 독특하게 변형하기도 한 ‘모던 뽀이’였다. 그의 옛 우리말 활용은 한편으로는 사라져가는 문화유산의 지킴이 노릇을 했지만 본질적으로는 단정한 시풍(詩風)에서 벗어나려는 열망의 표현이었다. 그는 2행 1연의 단시뿐 아니라 줄글로 이어지는 산문시도 많이 썼고, 쉼표나 마침표를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으며 때로는 낯선 언어를 배치해 시각적인 멀미까지 일으키려 했다.
정지용의 모교 옥천 죽향초교와 옥천성당(좌).
정지용은 일본 도시샤(同志社) 대학 영문과에서 수학한 후 휘문고보와 이화여대에서 영문학을 가르쳤으며, 윌리엄 블레이크와 월트 휘트먼의 시를 소개한 모더니스트다. 정지용은 이 위대한 시인들이 그러했듯, 전통의 언어 속에 급속히 변모하는 근대의 열병을 담아냈다. 시 임종에서 “나의 임종하는 밤은/ 귀또리 하나도 울지 말라”고 쓸 만큼 비루한 현실을 벗어나려는 철저한 낭만성을 보여준 정지용은 초기작 카페 프린스에서 “나는 자작의 아들도 아모것도 아니란다/ 남달리 손이 희어서 슬프구나!// 나는 나라도 집도 없단다/ 대리석 테이블에 닿는 내 뺌이 슬프구나!”라고 썼던 당대성의 시인이었다.
공연한 말장난이 아니라 철저한 낭만성으로 당대성을 이룩한 그의 시는, 특히 ‘고향’을 비롯한 애틋한 서정의 시들은 오늘날 우리 세대를 마지막으로 사라지게 될 ‘유서 깊은’ 어떤 감정에 뭉클한 역사적 무게를 더한다. ‘고향’이 사라지고, 어느 대도시에서나 똑같은 구조와 빛깔과 형상과 기능을 가진 산부인과, 아파트, 유치원 등이 고향을 대신하는 획일성의 시대에 그의 시 ‘고향’이 들려주는 애틋한 감정은 진실로 마음 깊숙한 곳을 뒤흔드는 바가 있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꽁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메끝에 홀로 오르니
흰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