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상 최초 전기 슈퍼카’를 표방한 페라리 루체. 페라리 제공
‘페라리 느낌’의 상실
페라리 루체 논란이 가라앉은 지금, 질문을 조금 바꿔볼 필요가 있다. 루체는 정말 잘못된 시도였을까. 혹은 정답 없는 문제 앞에서 페라리가 먼저 써내려간 하나의 답안이었을까.슈퍼카 브랜드들이 EV 시대에 고전하는 것은 사실이다. 이유는 분명하다. 슈퍼카의 매력은 성능에만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낮은 차체, 뜨거운 엔진, 귀를 찌르는 배기음, 기계적인 진동, 과한 비율, 불필요할 정도의 존재감. 이 모든 감각이 슈퍼카를 욕망의 대상으로 만든다. 슈퍼카는 빠르기만 한 차가 아니다. 빠르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느끼게 하는 사치품이다. 전기차는 이 감각의 상당 부분을 지운다. 조용하고, 매끈하고, 즉각적이다. 그만큼 체감하는 드라마가 줄어든다.
여기서 슈퍼카 브랜드들은 오래된 숙제를 다시 마주한다. 배기음 없는 차를 어떻게 섹시하게 만들 것인가. 엔진이 사라진 자리에 무엇을 둘 것인가. 전기모터의 빠른 반응만으로 충분할까. 제로백(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까지 도달하는 시간) 숫자와 최고속도만으로 고객 욕망을 자극할 수 있을까. 아직 뚜렷한 정답을 제시한 브랜드는 없다.
페라리 루체는 이 난제를 정면으로 건드린 모델이다. 루체는 낮고 납작한 2인승 베를리네타(고성능 쿠페)가 아니다. 4도어, 5인승 구조를 지닌 전기 GT(장거리 운전용 고성능차)에 가깝다. 조용하고, 넓고, 매끈하다. 페라리의 전통적인 관능미와는 거리가 있다. 바로 이 점이 논란의 중심이 됐다. 사람들은 루체를 보며 “이게 페라리인가”라고 물었다.
하지만 달리 보면 그 낯섦이 루체의 의도였을 수 있다. 슈퍼카가 EV에서 예전 방식으로 섹시하기 어렵다면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수밖에 없다. 배기음, 변속감, 엔진룸의 드라마를 그대로 가져올 수 없다면 다른 감각으로 욕망을 설계해야 한다. 루체는 그 답을 테크 럭셔리, 실내 경험, 새로운 비율, 새로운 고객층에서 찾으려 했다. 전통 슈퍼카의 문법을 전기차에 억지로 덧씌우기보다, 전기 페라리라는 낯선 카테고리를 새로 만들려 한 것이다.

페라리 루체 내부. 디지털 계기판과 터치스크린에는 곡선으로 가공한 삼성디스플레이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패널이 사용됐다. 페라리 제공
전기차가 ‘욕망의 대상’ 되려면
그래도 페라리의 겁 없는 시도를 깎아내리기만 할 수는 없다. EV라는 시험에서 백지를 내기보다 뭐라도 쓴 쪽에 가깝기 때문이다. 지금 슈퍼카 브랜드는 대부분 전동화 앞에서 속도를 조절하고 있다. 람보르기니는 순수 EV보다 하이브리드 슈퍼카에 무게를 둔다. 전기모터를 성능 증폭 장치로 쓰되, 엔진 소리와 폭력적인 이미지는 남긴다. 포르쉐 역시 전동화를 밀어붙이면서도 911의 순수 전기화에는 신중하다. 브랜드의 핵심 감각을 잃지 않는 속도를 계산하고 있는 것이다. 리막 같은 전기 하이퍼카는 압도적인 성능으로 다른 길을 보여주지만, 그것이 페라리나 람보르기니의 해법이 되기는 어렵다. 기술적 충격과 브랜드의 관능은 다른 문제다.결국 질문은 반복된다. EV 시대에 슈퍼카가 섹시함을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첫 번째 답은 비율이다. 지나치게 합리적인 비율은 슈퍼카를 고급 전자제품처럼 보이게 만든다. 슈퍼카는 여전히 불필요할 만큼 낮고, 넓고, 긴장감이 있어야 한다. 전기차가 되더라도 한눈에 ‘욕망의 대상’처럼 보여야 하는 것이다.
공력 역시 중요하다. 배기구가 사라진 자리에는 공기 흐름이 들어올 수 있다. 날개, 덕트, 디퓨저, 액티브 에어로는 전기 슈퍼카의 새로운 장식이자 기능이 된다. 예전 슈퍼카가 엔진을 시각적으로 드러냈다면, EV 시대 슈퍼카는 공기 다루는 방식을 뚜렷하게 보여줘야 한다. 보이지 않는 성능을 보이게 만드는 디자인이 필요하다.
그리고 또 하나 유념할 것이 감성이다. 엔진음을 대신할 사운드를 제시해야 한다. 가짜 배기음보다 중요한 건 전기차만의 위험하고 정교한 감각을 만드는 일이다. 엔진이 사라졌다면 모터와 소프트웨어가 새로운 본능을 만들어야 한다.
페라리 루체는 완벽한 답은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시도다. 페라리는 EV 시대에 기존 문법을 반복하는 대신 새로운 문법을 써보려 했다. 그 문법이 어색했고, 페라리답지 않다는 평가를 들었으며, 관능미를 설득하는 데는 실패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문제를 피하지는 않았다. 배기음 없는 페라리도 가능하다는 명제를 실제 제품으로 밀어붙였다. 어쩌면 지금 슈퍼카 브랜드들에 가장 필요한 건 완벽한 정답보다 먼저 쓰인 문장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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