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출 직후 린자니 산 정상에 오른 등산객들.
한참 오르다 보면 안개가 사라지고 랜턴 불빛과 하늘 별빛이 맞닿아 어느 것이 별빛이고 어느 것이 불빛인지 알 수 없을 정도다.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에 나오는 ‘별은 우리 머리 위에서 빛나는 것이 아니라 발끝에서 고통스럽게 만들어진다’는 현실적인 명언이 문득 떠오른다.
인도네시아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산이며, 활화산으로는 최고로 높은 산 린자니(해발 3726m)는 롬복(Lombok) 섬 북부 중앙에 우뚝 솟아 있다. 우리에게 친숙한 발리에서 35km밖에 떨어지지 않은 롬복은 제주 넓이의 2.7배 정도 되는 큰 섬이다. 화려한 발리와 달리 자연스럽고 깨끗하게 잘 보존해놓아 토속적인 자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수백만 년 전 폭발과 침식으로 형성된 린자니는 1901년 마지막으로 폭발해 지금 모습을 갖췄다. 화산으로는 독특하게 산 정상에 칼데라인 세가라아낙 호수가 있고, 그 중심에 구눙바루라는 또 하나의 작은 활화산이 있는 구조다.
인도네시아에서 두 번째 높은 산
린자니를 오르는 코스는 크게 두 가지. 북쪽 열대우림을 지나는 세나루 코스와 풀이 별로 없고 제주 오름 같은 언덕들이 이어진 동쪽 셈바룬라왕 코스다. 어느 쪽이든 2~3일 소요되고 하루 7시간 이상 걸어야 하는 힘든 산행이다. 더욱이 산행 중 숙박시설이나 편의시설이 일절 없어 야영을 해야 하고 취사도 직접 해결해야 해 포터를 수배해 함께 올라갈 수밖에 없다.
8월 말 맑은 린자니의 공기가 전날 10시간 가까이 이어진 비행의 피로를 날려버렸다. 오전 9시 셈바룬라왕에서 출발하면서 본 린자니의 첫 모습은 한국 산들과는 사뭇 다르게 웅장하게 다가왔다. 울창한 숲으로 시작하는 여느 산들과 달리 린자니는 제주 오름 같은 작은 언덕들이 위로 줄기줄기 이어져 있다. 아직도 왕성하게 활동하는 활화산답게 걸음을 뗄 때마다 작은 입자의 화산재가 불쑥 일어서며 여행자의 앞길을 방해한다. 앞서가는 이들의 뒤꿈치만 바라보고 걸을 수밖에.
출발하고 3시간 정도 후 점심을 먹으려고 린자니에 있는 휴식처 몇 곳 가운데 하나인 텐젠진(Tengengean)에서 멈췄다. 점심때여서인지 산에 오르는 모든 이가 그곳에 모여 있는 듯 인파로 북적였다. 세계 각국에서 온 젊은이들과 부부 여행객, 그들을 따르는 현지 가이드와 포터들, 이 나라 대학생들…. 갑자기 옆에서 한국말로 반갑게 인사하는 외국인과 마주쳤다. ‘곤니치와’나 ‘니하오’가 아니라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말에 깜짝 놀랐다. 해외에서 한국의 위상이 예전보다 높아졌다는 것을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히잡을 쓴 채 등산하는 인도네시아 여대생 요시(21)에게 어떻게 한국인인 줄 알아봤느냐고 물으니 “케이팝(K-pop)을 즐겨 들어서 익숙하기도 하지만 한국인은 옷차림을 보면 안다. 이렇게 등산장비로 ‘완전무장’하고 오는 사람은 한국인밖에 없다”고 한다. 그제야 주변을 살펴보니 우리 일행만 등산복, 등산화, 등산장비 등으로 ‘완전무장’을 하고 있지, 다른 외국인들은 반바지, 청바지, 운동화를 신고 오르는 이가 대부분이었다. 심지어 인도네시아 사람은 ‘쪼리’(엄지와 둘째 발가락에만 줄을 끼워 사용하는 슬리퍼)를 신고 그 험한 산을 오르고 있었다. 동네 뒷산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등산장비를 갖추고 오르는 한국의 ‘아웃도어’ 문화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자연과 가까이 어울리며 지내는 그들의 일상을 보는 듯했다.
린자니의 길은 좁았다. 아무리 넓은 구간이라도 2명이 같이 걸어가기 힘들었다. 자연스럽게 일행과 대화하기보다 자연을 숨 쉬며 끊임없이 이어진 길을 혼자 걷는 수밖에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아직도 화산 흔적이 시뻘겋게 남아 있다. 이 척박한 땅에서는 꽃 한 송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덧 구름과 같은 높이가 돼서인지 시원하면서도 물냄새가 나는 공기가 꽃향기를 대신했다.
구름 위의 트래킹 첫날 숙영지(왼쪽). 굽이굽이 이어진 셈바룬라왕의 언덕길.
숙영지에서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가이드.
그다음 날 새벽 2시, 따뜻한 우유로 허기만 달래고 새벽 등정에 올랐다. 불어오는 바람이 세가라아낙 호수의 물안개를 밀어 올리며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시계를 흐리게 만들었다. 정상을 향한 산등성이 길은 1m 남짓한 폭으로 하늘까지 이어질 듯한 기세로 뻗어 있었다. 가파른 산등성이의 길 양쪽은 가파른 낭떠러지다. 칠흑 같은 어둠과 추위를 헤드랜턴에만 의지한 채 가이드의 발뒤꿈치만 보며 헤쳐 나갔다. 가슴이 답답해지고 숨이 가빠왔다. 고산병이 오는 것 같았다. 등반을 포기했는지, 올라간 일행이 내려오기를 기다리며 길가에 침낭을 꺼내놓고 누워 있는 이들이 보인다. 나도 저들처럼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독버섯처럼 머릿속에서 자라난다.
그렇게 혼자 머릿속으로 등반을 포기하다 말다를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드디어 어두웠던 밤하늘에 한 줄기 빛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멀리 보이는 롬복 해수면에 수평으로 한 줄, 두 줄 새빨간 줄이 쌓이고 있었다. 일출 직전 정상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러나 화산재로 뒤덮인 길은 쉽게 정상을 허락하지 않았다. 두세 걸음 오르고 나면 한두 걸음 밀리는 인고의 길. 경사마저 40도가 넘는 듯했다. 해병대를 제대한 지 6개월도 되지 않은 몸이지만 허벅지가 터질 것 같고 발뒤꿈치가 끊어질 것만 같다. 거친 호흡만 내쉬며 오르고 또 오르니 갑자기 마음이 텅 빈 것 같은 편안함이 찾아들었다. 고통의 카타르시스였다.
오전 6시, 드디어 해발 3726m의 린자니 꼭대기에 섰다. 말 그대로 파노라마처럼 사방이 훤히 보인다. 롬복 섬 정점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니 마치 세상에 나 혼자만 있는 것 같다. 앞쪽에는 저 멀리 떨어진 발리 섬의 아궁 산이 보인다. 왼쪽에는 사람이 오를 수 없는 절벽이 보이고, 오른쪽에는 분화구 안에 생성된 세가라아낙 호수가 에메랄드 같은 청록빛을 띠고 있다. 그 분화구 중앙에 또 하나의 화산이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다. 정상에 이른 모든 사람이 그 감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뒤로는 걸어온 산등성이가 보인다. 어둠 속에서 한 발자국 앞만 바라보며 걸어왔던 그 길을 정상에서 내려다보니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롬복은 산스크리트어로 ‘끝이 없는 길’이라는 뜻이다. 걸어온 산등성이를 돌아보니 ‘이 길이 린자니의 하늘로 이어진 끝없는 길이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다시 내려갈 생각을 하니 정말 끝이 없는 것 같았다. 그곳에서 그냥 살고 싶었다.
셈바룬라왕의 출발점에 선 필자와 일행. 셈바룬라왕 근처 야생화 길. 린자니 산 정상에서 바라본 바다의 일출(왼쪽부터).
하늘과 가까워서인지 유독 더 뜨겁게 느껴지는 햇빛을 견디지 못하고 내려오는 길에도 호수의 물안개가 몰려왔다. 짙은 운무에 산 정상도 자취를 감추고 근방마저 구별하기 힘들었다. 건기라서 비가 올 리 없다는 가이드의 호언장담이 무색하게 비마저 내리기 시작했다. 린자니는 다시 그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올라갔던 길로 하산했는데도 9시간이 걸렸다. 출발지인 셈바룬라왕에 1박 2일 만에 내려오니 정상에 올라갔던 일이 꿈처럼 느껴졌다. 우리나라에서 경험할 수 없는 산 형태를 가진 린자니를 등반하고 한국으로 돌아오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린자니에 갔을까, 나는 왜 그 끝없는 길을 걸어야 했을까.’
아직도 눈을 감으면 칼날처럼 솟아 줄기줄기 이어진 산등성이가 눈에 선하다. 마치 지금도 그 길 위에 서 있는 것만 같다. 살면서 우리는 끊임없이 길을 걷는다. 가끔은 다른 길을 가기도 하고, 주저앉기도 하고, 헤매기도 하지만 결국 길 위에 서 있다. 린자니에 간 것은 그 끝없는 길을 계속 걸어갈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린자니 산 칼데라인 세가라아낙 호수와 그 안의 작은 화산인 구눙바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