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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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처럼 쓴 뒷맛 한번 맛보면 이것만 찾네

‘007 제21탄-카지노 로얄’에서 연인 베스퍼와 마신 마티니

  • 김원곤 서울대병원 흉부외과 교수 wongon@plaza.snu.ac.kr

    입력2014-03-17 11: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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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사랑처럼 쓴 뒷맛 한번 맛보면 이것만 찾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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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007 시리즈에서는 제임스 본드를 통해 많은 술을 소개하는데, 그중에서도 “젓지 말고 흔들어서”라는 불후의 명대사를 낳은 ‘보드카 마티니’가 단연 최고 스타다. 하지만 본드의 첫사랑에 대한 추억이 담긴 ‘베스퍼 마티니(Vesper Martini)’만큼 아련한 분위기를 가진 칵테일은 드물다.

    베스퍼 마티니가 일반인에게 널리 소개된 것은 영화 ‘카지노 로얄’을 통해서다. ‘카지노 로얄’은 마틴 캠벨 감독이 2006년 007 시리즈 21번째 작품으로 만든 영화다. 제6대 제임스 본드로 대니얼 크레이그가 첫 주연을 맡은 이 작품은 1963년 발표된 이언 플레밍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것으로, 시점만 놓고 보면 007 시리즈 가운데 가장 처음에 해당한다. 즉 본드가 007로서 첫 경력을 시작하며 이른바 살인면허를 얻어가는 과정을 그렸다.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배경은 첨단 테크놀로지를 바탕으로 한다. 이는 제작사 처지에선 비록 007의 출발점 이야기에 기초하지만 실제로는 새로운 007 시리즈임을 내세우려는 시도로 해석된다. 어쨌든 크레이그가 ‘카지노 로얄’에서 새로운 007로 선정됐을 때 기존 007과는 다른 평범한 외모로 구설에 오르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성공을 거뒀다.

    막대한 돈 걸고 일생일대 도박

    영화는 체코 수도 프라하에서 시작한다. 부패한 MI6 현지 책임자와 그의 정보원을 성공적으로 제거한 본드는 마침내 영국정보국의 공식적인 살인면허를 얻어 007로 불리게 된다. 이어서 무대는 아프리카 우간다로 바뀐다. 세계적 범죄조직 퀀텀의 주요 멤버인 화이트는 자신의 불법자금을 해외로 빼돌리려는 우간다 게릴라조직의 우두머리 오바노를 르 쉬프르(매즈 미켈슨 분)에게 소개한다. 르 쉬프르는 불법자금을 전문으로 다루는 알바니아 출신 인물로 체스 챔피언이자 포커에 미친 수학천재다.



    자금 운용의 안전성을 강조하는 오바노에게 르 쉬프르는 “걱정하지 마라”고 큰소리친다. 하지만 실제 그는 오바노의 자금을 이용해 특정 회사 주식을 공매한 후 테러로 회사를 망하게 함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불법으로 챙기는 국제 테러조직의 주범이다.

    첫사랑처럼 쓴 뒷맛 한번 맛보면 이것만 찾네

    영화 ‘007 제21탄 - 카지노 로얄’ 포스터.

    한편 007이 된 본드는 국제 테러조직의 자금원을 밝히라는 첫 임무를 맡고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로 간다. 그곳에서 본드는 한 테러 분자의 휴대전화에서 바하마에 있는 디미트리오스라는 사람으로부터 받은 문자메시지를 발견한다. 디미트리오스는 사실 르 쉬프르와 연결된 인물로, 르 쉬프르의 테러에 필요한 사람과 무기를 공급해주는 중간책 노릇을 하고 있다. 이때부터 르 쉬프르와 본드의 숙명적 대결이 007 영화 특유의 현란한 액션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칵테일 베스퍼 마티니는 본드가 카지노에서 막대한 돈을 걸고 르 쉬프르와 일생일대 도박을 하는 장면에서 탄생했다. 베스퍼(에바 그린 분)는 본드에게 도박자금을 건네주려고 영국 재무성이 파견한 요원으로, 본드와 곧바로 사랑에 빠진다. 원작 소설로만 따지면 베스퍼는 본드의 첫 여자인 셈이다.

    포커게임 분위기가 서서히 무르익을 무렵 본드는 바텐더에게 ‘드라이 마티니’를 부탁했다 곧 취소하고 이렇게 주문한다.

    “Three measure’s of Gordon’s, one of Vodka, half of Kina Lillet, shake it over ice. Then add a thin slice of lemon peel(고든스 세 번 넉넉하게 넣고, 보드카 한 잔, 키나 릴레 절반에 얼음 넣어서 흔들어요. 그리고 레몬 껍질 슬라이스도 추가).”

    레시피 중 ‘고든스’는 ‘진’ 상품명이고 두 번째 재료인 ‘보드카 한 잔’은 새삼 설명이 필요 없다. 여기서 중요한 대목은 세 번째 나오는 재료인 ‘키나 릴레’라는 술이다. 이 술은 19세기 말 프랑스 보르도 지방에서 개발한 술로, 와인과 오렌지 리큐어를 혼합한 것에 당시 강장제로 인기를 끌던 키니네를 섞은 것이다. 술 이름에 들어 있는 키나라는 말 자체도 키니네와 연관 지어 붙인 것이다.

    키니네가 약간 쓴맛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키나 릴레도 조금 쓴맛을 가졌으리라 추측되지만, 1986년 생산이 중단됐기 때문에 그 맛이 어떠했는지 지금은 확인할 방법이 없다. 다만 현재는 키니네의 양을 대폭 줄인 블롱드 릴레(Blonde Lillet)라는 제품이 출시돼 그 대용품으로 쓰인다.

    본드가 여섯 잔이나 마신 술

    본드는 이 칵테일이 마음에 들어 계속 마시다 급기야 르 쉬프르의 애인이 독을 탄 술까지 마시면서 생명을 잃을 뻔한 고비를 맞기도 한다. 결국 포커게임에서 승리한 본드는 베스퍼와의 자축연에서 또다시 그 칵테일을 주문한다. 그러고는 문득 “칵테일 이름을 베스퍼라 부르고 싶다”고 말한다. 베스퍼는 칵테일의 쓴맛을 떠올리며 내심 당황해 “쓴 뒷맛 때문인가요?” 라고 조심스럽게 묻는다. 그러자 본드는 “아니, 한번 맛을 보면 영원히 그것만 찾게 되기 때문이오” 라고 대답한다. 이 말을 들은 베스퍼는 환하게 미소 짓는다.

    이것이 바로 베스퍼 마티니의 탄생 이야기다. 요즘에는 진 대신 보드카를 사용하기도 하며, 앞에서 말했듯 키나 릴레 대신 블롱드 릴레를 쓴다. 베스퍼 마티니는 ‘카지노 로얄’의 속편인 ‘퀀텀 오브 솔러스’에도 등장한다. 2008년 22번째 007 시리즈로 상영된 ‘퀀텀 오브 솔러스’는 ‘카지노 로얄’에서 베스퍼의 비극적인 죽음을 겪고 복수심에 사로잡힌 본드가 그 배후를 밝히려고 뛰어드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퀀텀 오브 솔러스’에서 베스퍼 마티니는 본드가 옛 동료 마티스의 도움으로 함께 범인을 추적하려고 볼리비아로 가는 도중 비행기 안에서 술을 마실 때 등장한다. 비행기 안 특별 바에서 술을 마시는 본드에게 마티스가 무엇을 마시느냐고 묻는다. 본드는 짐짓 모른 체하면서 바텐더에게 자기가 마시는 술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아마 베스퍼와의 추억이 진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리라. 바텐더는 앞서 소개한 베스퍼 마티니의 레시피를 다시 한 번 얘기해준다. 그리고 “본드가 벌써 베스퍼 마티니를 여섯 잔이나 마신 상태”라고 말한다.

    오늘 밤 베스퍼 마티니 한 잔이면 칵테일의 제왕 마티니에 대한 지식의 외연을 넓히는 수확과 함께 007의 첫 연인에 대한 추억도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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