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1 소릉에 쓴 박영효 글씨.
중국보다 한국과 일본서 유행
1900년 8개국 연합군이 중국에서 약탈한 수많은 보물은 미국과 유럽의 미술관과 박물관에 전시됐고, 관련 학자들은 그것을 바탕으로 연구했다. 그 후 20여 년간 영국, 스웨덴, 프랑스 등 서구의 고급 컬렉터들은 중국 땅에서 더 많은 명화를 가져가려고 작품 진위를 감정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래서 얻은 결론은 현미경만으로는 중국 서화를 감정하는 일이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현미경을 이용한 기술적 감정에는 반드시 미술품 감정학의 과학적 사고와 인문학적 지식이 선행돼야 하기 때문이다.
작품 재료의 특징은 작품 하나하나의 진위를 가리는 일뿐 아니라, 미술사 전체를 조감하는 연구를 지속적으로 반복해야 나타난다. 특정 시기 서화를 감정하는 데 비단이나 안료가 결정적 근거가 된다는 사실도 그러한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그림에 사용한 비단이나 안료가 작가가 죽은 뒤 나온 것이라면 그 그림은 가짜임에 틀림없다. 이는 마치 일제강점기에 죽은 할아버지가 외국산 스마트폰을 이용해 문자메시지를 남긴 것과 같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필자가 발견한 특이 현상 가운데 하나는 소릉이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까지 한중일 3국 서화에 쓰였다는 점이다. 소릉은 본래 명나라 성화(1465~1487)와 홍치(1488~1505) 연간에 사용하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유행한 것은 천계(1621~1627)와 숭정(1628~1644) 때다. 소릉은 청나라 초기까지 유행하다가 어느 순간 자취를 감췄다. 그러다 청나라 말기인 19세기 말 다시 나타났지만 널리 쓰이진 않았다. 오히려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유행했다. 2002년 5월 필자는 서울옥션 제54회 문방사우와 문인화 경매에서 소릉에 쓴 박영효(1861~1939)의 서예(그림1)를 발견하고 구매했다. 이때부터 필자는 우리나라 서화가가 썼던 소릉에 주목했다.
그림2 소릉에 그린 흥선대원군의 ‘총란도’. 그림3 1907년 고종황제가 소릉에 쓴 글씨.
그림4 1910년 소릉에 쓴 안중근 의사 글씨.
상류층 고급문화는 굳이 전파하려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아래로 흘러간다. 흥선대원군 이후 고종황제(그림3)는 물론, 여러 서화가가 작품 창작에 소릉을 사용했다. 안중근 의사가 중국 뤼순 감옥에서 쓴 글씨 중에는 소릉에 쓴 것도 있다(그림4). 당연히 안 의사를 존경한 일본인이 소릉을 구해다 제공했던 것이다.
조선시대 서화가 가운데 흥선대원군보다 먼저 소릉에 그림이나 글씨를 쓴 이는 없다. 흥선대원군이 우리나라에서 맨 처음 소릉에 작품을 그린 것이다. 흥선대원군이 ‘총란도’를 1886년 이전에 그렸다는 점, 그가 1882년부터 1885년까지 청나라에 잡혀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가 1880년대에 처음 소릉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안중근 의사도 소릉에 글씨 써
그렇다고 흥성대원군이 소릉에 그린 난 그림이 모두 진짜는 아니다. 또한 1880년대 이후 소릉에 그린 서화가 무조건 진짜는 아니다. 최근 몇 년 사이 우리나라 미술품 경매에는 소릉을 이용한 위조품이 계속 나오고 있다. 그중에는 옛날에 만든 것도, 최근에 만든 것도 있다.
분명한 것은 1880년대 이전에 활동한 작가가 소릉에 그린 서화는 모두 가짜라는 점이다. 2003년 서울 인사동 공화랑 특별기획전 ‘9인의 명가비장품전’ 도록 표지에 실린 김홍도의 ‘섭쉬쌍부도’(그림5)는 소릉에 그린 가짜다. 2006년 추사 김정희 서거 150주년을 기념한 서울 예술의전당 한국서예사 특별전 ‘추사 문자반야’에 전시되고 도록에 실린 김정희의 ‘팔곡병’(그림6) 역시 무늬가 있는 소릉에 쓴 가짜다.
종이나 비단은 조상 대대로 변함없이 만들어졌기에 감정 근거가 되기 어렵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중국산 서화 창작용 비단인 소릉에 그린 1880년대 이전 조선 서화가의 작품이 모두 가짜라는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됐다. 그렇다. 이렇게 확실한 근거만 알면 독자 여러분도 반은 감정가다.
그림5 소릉에 그린 김홍도의 가짜 ‘섭쉬쌍부도’. 그림6 소릉에 쓴 김정희의 가짜 ‘팔곡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