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석물을 재사용한 예릉의 석물은 거창하고 웅장하다.
철종은 사도세자의 증손자이며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의 손자다. 철종은 은언군의 3남 전계대원군과 용성부대부인 염(廉)씨 사이에서 태어난 셋째 아들이다. 철종의 할아버지 은언군은 정조 때 홍국영과 모반사건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강화로 유배됐다가 그의 부인과 며느리가 천주교 신자라는 죄로 순조 때 처형을 당했다. 철종의 아버지인 전계대원군은 헌종 10년 큰아들인 원경마저 ‘민진용의 안옥’ 사건으로 사형을 당하자 자식들을 데리고 한양을 떠나 강화도에서 피신하고 있었으나 그 역시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즉 강화도령 원범(철종)은 주위에 아무도 없는 힘없는 왕실 끄나풀이었던 것이다.
헌종이 젊은 나이에 후사 없이 승하하자 순조 비인 순원왕후는 농사꾼 강화도령을 왕위에 오르게 하고 수렴청정했다. 이때 순원왕후는 철종으로 하여금 손자인 헌종의 대를 잇게 하지 않고, 자신의 양자로 입적시켜 순조의 대를 잇도록 했다. 이는 이제까지 찾아볼 수 없었던 왕위 항렬의 역행으로 순원왕후의 친정인 안동김씨의 농간이었다. 순원왕후는 은언군 집안에서 철종의 호적을 세초(洗草·실록 편찬 후 추고를 없애버림)하고 원범이었던 이름도 자신의 장남 익종(효명세자)의 돌림자( )를 딴 날일(日)의 항렬자인 변( )자로 바꿨다. 철종은 헌종이 승하한 날 순원왕후의 양자로 입적되고 3일 후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식을 가졌다. 말 그대로 속전속결이었다. 왕자 교육을 받지 않은 철종은 즉위 후 ‘소학(小學)’ 등을 읽으며 교육을 받았고, 국정은 순원왕후가 독단적으로 수렴청정을 했다. 그 결과 세도정치는 극에 달했다.
나름대로 ‘애민정치’ 그러나 실권 없어
철종은 나름대로 ‘애민(愛民)’ 정치를 하려 노력했다. 심지어 자신이 고기를 좋아하면 백성들이 이를 본받아 가축이 줄어들지 않을지 걱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실권과 세력이 없는 철종은 순원왕후의 안동김씨와 며느리인 익종비의 풍양조씨의 세력 다툼 틈바구니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전정, 군정, 환곡의 삼정(三政) 문란이 극에 달해 백성들의 생활은 도탄에 빠졌다. 세도정치에 대항할 방법이 없던 철종은 국사를 등한히 하고 술과 궁녀를 가까이했는데, 철인왕후와 7명의 후궁 사이에서 5명의 아들을 낳았지만 모두 요절했다. 유일한 혈육인 영혜옹주마저 개화사상가 박영효와 혼인한 지 3개월 만에 죽었다. 그로써 그의 혈육은 대가 끊겼다.
순원왕후 승하 후 안동김씨와 조 대비의 풍양조씨 간 세력 다툼은 더욱 치열해졌다. 정국의 혼란 속에 힘없는 철종은 재위 14년 6개월 만인 1863년 12월 8일 묘시에 33세의 나이로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했다. 철종과 철인왕후는 고종이 조선을 대한제국으로 황제국 변경을 할 때 수직 추존되지 못하고 순종 때 추존황제에 올랐다.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이 된 조 대비는 220년 전에 대가 갈린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후손인 남연군을 사도세자의 3남 은신군에게 양자로 입적시키고, 그의 손자를 왕위에 앉히니 그가 고종이다. 즉 남연군의 아들이 흥선대원군 이하응이고 그의 아들이 고종이다. 철종 승하일에 맞춰 고종을 즉위시킨 조 대비 역시 수렴청정을 했는데 철종의 예릉을 조성하면서 310여 년 전 중종(11대)의 정릉(靖陵) 초장지에 매몰됐다가 땅 밖으로 나온 석물을 재사용했다. 힘없고 손 없는 철종에 대한 홀대였다.
하지만 그 덕분일까. 철종의 예릉 석물에서는 거창하고 웅장한 조선 중기 석물 조각의 특징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이는 인근 희릉(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능)의 석물과 같은 시기에 조영된 것으로, 특히 문무석인의 형태가 비슷하다. 조상의 고석물을 재사용한 대표적 사례다. 이렇게 선대의 석물을 재사용하는 것은 조선시대에만 볼 수 있었던 특이한 사례로, 현종의 숭릉과 순조의 인릉 등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오래된 선대의 석물을 그대로 사용한 예는 이곳 예릉이 대표적이다. 예릉 광중(壙中) 작업 때 중종의 애책문(哀冊文·제왕이나 왕비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을 적은 옥판의 책)과 증옥백(贈玉帛·유택에 넣었던 옥과 비단)이 발견돼 철종이 묻힌 이곳이 중종 정릉의 초장지였음을 알 수 있게 됐다.
철인왕후 김씨는 안동김씨 김문근의 딸로 세도가인 아버지와 달리 말수가 적고 즐거움과 성냄의 내색도 없이 부덕이 높았다고 한다. 하지만 세도가의 딸로 친정세력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음은 분명하다. 1878년 5월 12일 인시(寅時)에 창경궁 양화당에서 승하해 예릉에 쌍분으로 모셔졌다.
당초 빈청은 철종의 묘호로 철종(哲宗), 선종(宣宗), 장종(章宗)을, 능호로 예릉(睿陵), 헌릉(憲陵), 희릉(熙陵)을 올렸는대 최종적으로 철종과 예릉이 낙점됐다. 이처럼 조선 왕실에서는 묘호와 능호를 정할 때 선왕의 품성, 업적 등을 고려해 3개의 묘호와 능호를 올리면 신임 왕이 최종적으로 하나를 선정하는 게 전통이었다.
철종의 예릉은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개명하고 황제국을 선포함에 따라 조선시대 왕릉제 상설제도(象設制度)를 따른 마지막 능이 됐다. 즉 예릉은 조선 왕실의 마지막 왕릉이라 할 수 있다. 고종 이후부터는 황제국의 지위에 맞게 능제도 황제의 능제를 따랐다.
(왼쪽) 예릉은 쌍릉으로 중종의 정릉(靖陵) 초장지로 알려져 있다. (오른쪽) 예릉의 장명등은 융릉의 예를 따르면서도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다.
철종의 예릉은 조선 왕실의 마지막 왕릉제 능원으로 정자각 규모도 커지고 잡상도 이제까지와 달리 3개에서 5개로 늘었다.
예릉의 봉분은 병풍석을 세우지 않았으며 난간석으로 능을 둘러 쌍릉으로 연결했다. 난간석의 석주에는 음각 세로선과 원문을 새기고 원문 안에 방위를 나타내는 문자인 십이간지를 새겨넣었다. 보통의 능침은 봉분을 상계, 문인공간을 중계, 무인공간을 하계로 해 3개의 계단을 만드는데 영조의 원릉부터는 중계와 하계 공간의 구분을 두지 않고 문무인석을 배치했다. 예릉은 하계 앞의 폭이 넓으며 장명등을 여느 능처럼 중계에 놓지 않고 하계 끝에 두었는데 이는 조선시대 유일의 배치 형태다. 장명등은 사각 장명등이 아니라 융릉과 건릉의 양식에 따른 팔각으로 이전보다 다리가 길어졌으며 지붕 위의 상륜도 없이 둥근 파문이 몇 겹 겹쳐 있어 특이하다. 가운데 원형 틀 안에 꽃문양을 새긴 것은 융릉의 예를 따른 것이다.
맞배지붕의 정자각은 다른 능에 비해 웅장하고 크며 처마의 잡상도 기존의 3개에서 5개로 늘었다. 참도 역시 기존의 향로와 어로가 2단에서 3단으로 변화됐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이후 고종의 홍릉과 순종의 유릉에서 3단 양식으로 이어지는데, 황제로 추존되면서 능제가 변화하는 과정에서 생긴 형태로 추정된다. 예릉의 비각은 대한제국 융희 2년에 순조를 황제로 추존하면서 세운 것으로 앞면에는 ‘대한제국 철종장황제 예릉, 철인장황후 부좌’라고 쓰여 있다.
예릉과 그 주변은 서삼릉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축협의 종축장과 한국마사회의 목장이 있어 더욱 유명하다. 서삼릉에는 소현세자의 소경원과 사도세자의 아들로 정조의 이복형이자, 은언군의 맏형인 의소세손의 의령원 그리고 정조의 아들인 문효세자의 능원으로 숙명여대 옆 효창공원에서 이장한 효창원 등 3개의 원(園)이 있다. 따라서 철종의 능 옆에 큰할아버지의 유택과 당숙부의 유택이 함께 있는 셈이다.
그리고 성종의 폐비 윤씨 묘인 회묘를 비롯해 조선 말기에 천장한 후궁, 왕자, 공주, 옹주 등의 묘와 왕실의 태실을 모은 태묘가 자리한다. 이와 같이 서삼릉지구는 조선 왕실 무덤 문화의 최대 공간이나, 일제강점기와 국가 근대화과정에서 국가 발전과 축산 진흥정책이라는 명목으로 가장 많이 훼손된 지역이다. 골프장과 목장 등으로 훼손된 지형을 원래대로 살리고 없어진 재실, 연지, 금천교 등을 복원해야 한다. 그래야 세계유산으로 가치를 더욱 빛내고 문화민족으로서 긍지를 가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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