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가 150일 동안 세상을 가득 덮고 있는 동안 육지에 사는 코로 숨을 쉬는 생물은 모두 죽었다.
홍수가 노아의 나이 600세가 되는 해 2월17일에 시작되었고 601세 되는 해 2월27일에 노아가 방주에서 나왔으니 노아의 가족들이 1년여 동안 방주에 있었던 셈이다. 노아 부부와 셈, 함, 야벳 세 아들 부부가 각종 생물들과 함께 방주에서 나오자 여호와가 천지창조 때 베풀었던 그 축복을 다시 내렸다.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편만하여 그중에서 번성하라.’
성(性)을 매개로 하여 땅에서 번성했던 생물들 가운데 방주 안에 있었던 생물들을 제외한 생물들은 다 죽고 이제 새로운 번성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다시 말해 새로운 성의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그 새로운 성의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 바로 무지개다. 무지개는 태양과 물이 교접한 결과물이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하나 생긴다. 노아가 500세 된 후에 셈, 함, 야벳을 낳았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100세 가까이 된 셈, 함, 야벳 부부 사이에 자식들이 있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그 자식들, 그러니까 노아에게 손자 손녀가 되는 그들은 타락했기 때문에 다른 지상의 생물들과 함께 대홍수 때 죽은 것일까.
성경은 거기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다만 셈, 함, 야벳 부부가 홍수가 난 후에 아들들을 낳기 시작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셈이 26종족을 이루고 함이 30종족, 야벳이 14종족을 이루어 다시금 인류는 번성해나갔다.
성경상으로 노아는 포도주 제조법 첫 개발자
노아는 홍수가 지나간 후에 농사를 짓기 시작해 포도나무를 심었다. 그런데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 장막 안에 벌거벗은 채 쓰러지는 일이 발생했다. 기독교에서 중요시하는 ‘포도주’라는 말이 노아의 그 사건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노아가 포도주를 만드는 법을 최초로 개발한 셈이 된다. 노아는 포도주의 아버지인 것이다.
노아는 포도가 술이 된다는 사실을 처음에는 잘 몰랐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구덩이 같은 곳에서 포도가 썩어 벌건 즙이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마셔본다. 맛이 시기도 하고 달콤하기도 한 그것을 마시자 정신이 알딸딸해지면서 은근히 기분이 좋아진다.
노아는 포도를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실험해본다. 드디어 포도를 숙성시켜 포도주를 만드는 법을 터득한다. 노아가 포도주 실험을 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포도주를 많이 마시고 인사불성이 되어 벌거벗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포도주를 즐겨 마시다 음주량이 늘어나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폐인이 됐는지도 모른다. 포도주에 취한 노아의 머릿속에는 홍수에 떠내려가다 죽은 친지들의 모습이 악몽처럼 어른거렸을 수도 있다. 그래서 또 포도주를 마시게 되고.
태양과 물이 교접한 결과물인 무지개는 새로운 성의 시대의 시작을 알렸다.
노아도 평소에는 엄격하고 복장도 단정했을 것이다. 그런데 술에 취하자 사람이 달라졌다. 거추장스런 옷들을 훌렁훌렁 벗고, 하체를 다 드러낸 상태에서 쓰러져 세상 모르고 잠을 자고 있었다. 아내나 여종과 몸을 섞은 후 그대로 잠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때 함이 장막 안으로 들어와 아버지가 벌거벗은 채 누워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것도 힐끗 본 게 아니라 구경거리라도 생긴 듯 가까이 가서 자세히 본 모양이다. 은밀한 부분이 다 드러난 아버지의 하체를 살펴보며 피식 웃었을 수도 있다.
함이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장막 밖으로 나와 셈과 야벳에게 아버지의 행색을 알렸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함과 다른 반응을 보였다. 그 둘은 옷을 둘러메고 장막 안으로 들어가 고개를 돌린 채 옷으로 아버지의 하체를 가린 뒤 얼굴도 돌리지 않고 그대로 다시 장막을 나왔다.
술이 깬 뒤 자초지종을 들은 노아는 함을 저주하고 셈과 야벳을 축복하였다. 함의 자손들이 그 형제들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한다고 저주한 것으로 보아 노아 자신도 벌거벗고 있었던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던 것임이 틀림없다. 아버지의 수치를 가려주기는커녕 오히려 구경하고 조롱거리로 삼은 함은 그 홍수를 다 견뎌내고도 그만 아버지의 저주를 받고 말았다.
인류가 자신의 성기를 가리려고 하는 까닭은…
하체를 뜻하는 히브리어 ‘에르와’는 원래 ‘벌거벗기다’ ‘드러내다’ ‘수치’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특히 여성의 외음부(pudenda)를 가리키는 말로 ‘에르와’가 많이 사용된다. 그러니까 ‘에르와’라는 한 단어에 ‘하체가 드러나는 것은 수치다’라는 뜻이 다 들어 있는 셈이다.
그런데 에덴에서는 ‘에르와’ 상태가 결코 ‘에르와’가 되지 않았다고 했다.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성경에 따르면 벌거벗은 것을 수치로 알고 몸을 가리기 시작한 것은 타락의 결과다. 술에 취해 벌거벗는 것도 수치로 여기지 아니하는 현상은 에덴으로 돌아가고 싶은 무의식의 발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벌거벗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상태가 ‘에덴’이라고 하면서 막상 그 ‘에덴’으로 돌아가려고 하면 ‘불칼’을 세워 막기에 급급한 것은 어쩌면 모순인지도 모른다. 그 모순 자체가 타락의 징표인 셈이다.
왜 인류는 종족을 불문하고 자기 하체, 특히 자신의 성기를 가리려고 하는 것일까? 그리고 성기와 관련된 말들을 사용하는 것을 꺼리는 것일까?
인류학자들은 미개한 종족들이 생식기를 가리는 관습을 연구하여 분석함으로써 그 원인을 찾아보려 했다. 노르베르트 엘리아스는 ‘문명화 과정’이라는 책에서 미개 종족이 자신들의 생식기를 가리는 것은 수치심 때문이 아니라 신성의 상징을 강조하기 위해서며 마법의 영향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특히 여성의 경우는 악령이 음부의 구멍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생식기를 가린다는 것이다.
한스 페터 뒤르는 ‘나체와 수치’ ‘은밀한 몸’ 등의 저서에서 엘리아스의 이론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그는 결국 인간은 마음에 내재되어 있는 수치심 때문에 자신의 생식기를 가린다고 주장하면서 그 실례들을 미개 종족의 각종 관습에서 찾고 있다.
완전 나체로 생활하는 뉴기니 북부 쿼마족의 경우에도 여자들은 함부로 다리를 벌려서도 안 되고 음부가 보이지 않도록 허벅지를 꼭 붙이고 다녀야 하며 길쭉한 짐으로 등을 덮지 않은 상태에서는 몸을 앞으로 숙여서는 안 된다고 교육받는다. 남자들은 여성의 음부를 멍하니 쳐다봐서는 안 된다. 남자가 그런 시선을 던지고 있는데도 여자가 몸을 돌리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논다니 취급을 당한다.
앙골라 서북부에 사는 수쿠족의 경우 여자가 부주의하여 남자로 하여금 자신의 음부를 보게 하면 남자가 “우템봉기!”하고 외친다. 그 말은 “나는 너와 잤어!”라는 뜻이다.
노아 역시 자신의 생식기가 드러난 사실을 수치로 여기고 그것을 가려주지 않은 함을 저주한 것이다. 아버지의 수치를 가려주지 않는 예의 없는 아들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대목이다.